식탁에서 가족이 식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린이가 입을 뾰족 내밀고 '나는 병아리콩이 좋은데'라고 말한다. 식탁에 있던 어른 남자(강하늘)가 벌떡 일어나 식탁을 아마도 쾅 쳤던가. '오늘부터 밥은 각자 햇반한다'라고 선언한다. 광고를 보는데, 주부의 심정으로 깊이 분노했다. 

햇반, 밀키트, 간편식, 그래 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식탁이 차려졌고, 모두 밥을 한 그릇씩 앞에 두고 앉았는데!!! 그 식탁에서 병아리콩이 든 밥이 좋다고 말하는데 그게 수용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먹을 게 없는데, 라며 식탁에 앉는 아들놈에게 생기는 분노가 티비 광고 속 강하늘에게 뻗쳤다. 모든 욕망이 다 채워져야 하는 게 아니다. 

아니, 엄마, 내가 해 먹을게, 내가 먹고 싶은 병아리콩 햇반으로 내가 돌려 먹는다니까.

아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수고 때문만은 아니다. 햇반을 먹고 나면, 쓰레기가 나온다고. 

각자의 모든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는 건, 더 많은 것들을 버린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게 시간이건 수고건, 누가 너보고 하래, 왜 그래, 누가 하던지 총량이 늘잖아. 쓰레기도 늘고, 수고도 늘고. 심지어 자원도 늘어. 취향을 전시하는 세상 가운데, 무언가 특별한 양 전시하는 취향 가운데 수고하는 엄마-그래, 나는 따로 아들 놈의 비빔면을 삶았다-가 있고, 더 많이 생겨버린 쓰레기가 있고, 장거리를 달려온 음식들이 있다. 

취향을 존중한다는 건, 자신이 해먹는 자신의 밥에나 주장할 수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는 지경이다. 독재자 엄마가 되어 '주는 대로 먹어!'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순간마다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내가 한 어떤 젊은 날의 불편함의 토로가 부당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날들이다. 

밥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데도 쌀을 사기보다 햇반을 사는 와중에 삶을 유지하는 비용이 늘고, 쓰레기도 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줄어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햇반은 혼자 들어온 쓸쓸한 저녁, 밥솥에 밥이 딱 떨어진 날, 긴급하게 돌려서 먹는 그런 식사로는 수요가 부족했던 것일까. 

배가 고프지 않은 다음에야 취향이라도 남는 건 또 아닌가. 이미 우리는 배고프지 않아서 취향을 주장하는 건 줄은 알지만, 그런 취향 때문에 방법을 잃을까봐 두려운 마음이 있다. 아무리 내팽개쳐져도 산과 들을 뒤져서 먹을 걸 찾아서,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이 편리함 가운데 사라질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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