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고와서 고야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니 ‘고야의 그림에는 에스파냐 특유의 니힐리즘이 짙개 배여있다.’라고 나와 있다.   니힐리즘이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8세기 말, 종교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련의 일들과 로렌조 신부를 보니 고야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네스라는 여성이 술집에서 돼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신부가 유대교인이라는 의심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종교 재판에 회부된 이네스는 유대교인이라는 자백을 강요받으며 견딜 수 없는 심문을 당한다. 그 과정에서 신부들이 바라는 대답, 유대교인이라는 거짓 자백을 하고 그 자백을 증거로 삼아 돼지 우리 같은 동굴에 벌거벗겨 다리와 손에 수갑을 채워 가둔다.  

  

   딸이 종교 재판에 회부되자 이네스의 아버지는 고야를 통해 로렌조 신부를 소개 받아 딸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 과정에서 딸이 심문을 받고 유대인이라는 거짓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네스 아버지는 로렌조 신부에게 심문이 이성을 마비시켜 거짓 자백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딸은 부당한 상황에서의 거짓 자백을 했으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신부 로렌조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이네스는 더 이상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렌조는 직업이 신부였을 뿐이었다. 동굴 감옥에 갇힌 이네스를 찾아간 로렌조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부탁해 보자며 기도를 하다가 색정을 누르지 못하고 겁탈을 하고 급기야 임신을 시킨다.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스페인에도 미치고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략, 지배를 하게 된다. 그로 인해 없는 죄도 만들어 종교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풀려나게 된다. 눈부신 햇살을 쬐며 집으로 돌아온 이네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목숨을 잃은 것을 알게 된다. 기억을 더듬어 이네스는 고야를 찾아온다. 세상에는 자기와 자신의 딸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감옥에서 낳은 아이가 어디 있는지 찾아달라고 한다. 실성한듯한 이네스의 말을 반신반의 하지만 스페인에서 추방된 후 프랑스 혁명군 간부가 되어 돌아와 스페인을 혁명과 이성으로 바꾸어 보겠다고 날뛰는 로렌조를 찾아가 이네스가 감옥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로렌조는 자신의 더러운 행위가 탄로 날까봐 이네스가 정신이 이상해져 횡설수설한다는 말로 덮으려 하고. 

 

   우여곡절 끝에 창녀로 살아가는 알라시아라는 처녀가 이네스의 딸임을 알게된 고야는 이네스와 만나게 해 주려고 애를 쓰지만 이번에도 로렌조의 방해로 결국 만나지 못한다.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를 찾고자 하는 소망조차 로렌조로 인해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이다. 

 

  부유한 상인의 딸로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던 이네스가 어느 날 말도 안되는 이유로 종교 재판을 받고 실성한 여인이 되어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줄거리에 ‘고야의 유령’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는 이네스가 고야의 그림 모델이자 영원한 뮤즈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고야의 그림 몇 점을 보니 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그리고 본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굴러가던 이네스의 삶의 수레바퀴를 보며 알 수 없는 삶 앞에 겸손해야 겠다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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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에 난 이 영화평을 보니 이스라엘 출신 감독이 만든 영화란다. 지금은 앙숙 관계에 있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집트 경찰 악단이 이스라엘 작은 마을에 예기치 않게 하룻밤을 보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데. 암튼 구미가 당겼다. 83분자리 영화라 금방 끝났다.

 

 표를 예매하고 영화관에서 제공하는 영화안내 포스터를 보니 독특한 인물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밴드 주자들을 다들 잔뜩 굳은 표정으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앞을 응시하고 있는데 멀쑥한 키에 냉소적인 표정의 젊은 악단(영화를 보니 남의 연애질 코치도 잘하고 연애도 잘하는 할레드였다)만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껄렁하게 서서 일행과는 반대 방향을 보고 있다. 아무래도 한마음으로 뭔가 하려는 일행들에게 찬물을 끼얹을 것 같은 인물이라 관심이 간다. 이 인물 내 예측을 배반하진 않았는데 관심은 할레드가 아니라 악단장 투픽의 행동과 대사에 쏠렸다. 

 

  해체 위기에 처한 이집트 경찰 악단이 이스라엘 아랍 문화센터 개관 축하공연을 하러 왔다가 영어 발음을 잘못 알아들어 ‘벳 하티크바’라는 시골의 작은 마을에 도착을 하게 된다. 내일 공연인데, 이 공연을 성공리에 마쳐야 해체 위기를 면할 수 있는데, 하필 이들이 도착한 마을에는 하루에 버스가 한번 밖에 오지 않는 외진 곳이다. 오도가도 못하고 하룻밤을 이 낯선 땅에서 보내야 할 처진데 가진 건 이집트 돈 밖에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마을의 카페 여주인 다나는 당황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게 해 준다.악단장과 할레드는 자신의 집에, 몇몇은 마을 청년들에게 부탁해서 잠자리를 잡아 준다. 카페 문을 닫고 집으로 온 다나는 악단장 투픽에게  시내 데이트를 제안한다. 솔로인 다나는 (하는 일에 완벽을 기하려는 모습에서 어찌 보면 답답해 보일 만큼 고지식해 보이긴 하지만) 인간적인 투픽에게 다가가려하는는데 사랑하는 부인이 자식의 자살로 인해 병을 얻고 죽은 뒤 자신의 잘못으로 부인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투픽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데이트 중에 다나가 투픽에게 어떤 음악을 연주하냐고 묻는다

  ‘ 우린 클래식한 아랍전통음악을 연주’한다고 한다. 그러자 다나는 -움 쿨톰- 같은 거? 경찰이 웬? 이라고 의아해 한다. 그러자 투픽은 ‘경찰도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고 말한다. 참 멋진 대사다. 다나의 신청으로 식당에서  ‘움쿨통-‘KOL SHEE HELO’이 흘러나왔다.가볍지 않고 뭔가 깊은 여운을 주는 투픽과 참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투픽이 다나가 마음에 없는 건 아닌것 같은데 마음을 쓰다듬어 주려는 다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어긋날 것 같다.아니나 다를까 밤을 함께 보내는 인물은 할레드였다.

 

 다음날, 마을에 한 대뿐인 공중전화로 대사관에 자신들의 처지를 알린 악단원 ‘카말’의 노력으로 아랍문화센터로 데려다 줄 차가 도착한다. 다나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투픽의 표정에 아쉬움 같은게 비친다. 다나 또한 미안함( 다나는 토픽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지만 자신의 일에 완벽함을 추구하는 투픽은 낼 공연을 염려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 사이 한 집에 머물던 할레드와.... )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듯한 얼굴이고. 다나와 투픽의 감정도 하룻밤 해프닝으로 끝난다. 이 영화 참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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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영화를 보러 갔다가 아프가니스탄이 배경이라는 이 영화를 예고편을 보고 개봉 첫날 보러 갔다. 그런데 내용은 접어두고 겨울에 하얀 눈이 내리고 골목마다 아이들이 나와 연을 날리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나는 무슨 까닭인지 아프가니스탄이 건조하고 더운 나라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물론 촬영은 중국 서북부 지역에서 했다고 하지만) 그리고 매스컴을 통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막을 향해 달려가는 군용지프와 무장한 탈레반 같은 것만 봐 온 터라  소련 침공 전 아프가니스탄의 활기차고 평화로운 풍경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아시아와 동유럽의 경계에 있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옛소련연방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에 나오는 두 꼬마 주인공 핫산과 아미르 중, 아미르는 서구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고, 핫산은 동양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핫산은 아자라족, 아미르는 파슈툰 족이란다. 아자라족은 핫산처럼 대부분 하류층을 이루고 파슈툰 족은 아미르네처럼 상류층을 이루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미국에서 작가 된 아미르가 아버지의 친구인 라힘 칸으로부터 파키스탄에 한번 다녀가라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아미르의 표정이 좋지 않다. 라힘 칸이 파키스탄을 다녀가라는 것이 못 마땅해서가 아니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미르가 미국으로 오기 전 하인의 아들이자 자신의 단짝 친구였던 핫산과 함께 했던 어린시절이 펼쳐진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아미르는 핫산과 함께 연을 날리고, 자신이 쓴 글을 핫산에게 들려주거나 소설책을 읽어주기도 하면서 단짝 친구로 지낸다. 아미르는 하인의 아들이지만 똑똑한 핫산이 자신이 쓴 이야기를 듣고 잘못된 곳을 짚어줄 때 시기심이 일기도 하지만 여전히 둘도 없는 친구였다. 

 

   어느 날 아미르는 핫산과 함께 나간 마을 연날리기 대회에서 우승을 한다. 승리의 징표인 떨어진 아미르의 연을 찾으러 간 핫산이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찾아 나섰다가 마을 불량배 아세프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세프가 핫산에게 아미르의 연을 달라고 하자 핫산이 끝까지 못주겠다고 버티다가 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미르는 못본척 외면한다.  

 

자신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새총을 겨누며 자신을 지켜준 핫산인데 정작 핫산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은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도망을 치게 되자 자신의 비겁함에 화가 난 아미르는 죄책감에 핫산을 자신의 집에서 내 보낼 궁리를 하게 된다. 죄책감이 증오로 변한 것이다. 아미르는 아버지가 죄 중에 가장 큰 죄라고 했던 도둑 누명을 핫산에게 씌워 자신의 집에서 내쫓는다.  

 

  그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미르는 공산주의를 비판해 온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피신, 자신이 꿈꾸던 소설가로 성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아미르의 가슴 속에는 늘 핫산에 대한 죄책감이 가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 친구의 부름을 받고 파키스탄으로 간 아미르는 라힘 칸으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는다. 핫산이 어머니가 다른 자신의 형제라는 것, 라힘 칸의 부탁으로 아미르의 집을 지키던 핫산이 아미르의 집을 끝까지 지키려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 그래서 어린 아들만 혼자 남아 있다는 것, 부모가 없어 고아원 어디서 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도둑질을 하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진실을 알아야 할 사람의 권리를 훔치는 것’이므로 가장 나쁜 짓이라고 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기막혀 하지만 라힘 칸이 ‘다시 좋아질 수 있단다’라는 말 뜻을 반추하며 아프가니스탄으로 핫산의 아들을 구하러 떠난다. 그런데 하필 하산의 아들을 공산주의자 앞잡이 노릇을 하던 아세프가 노리개처럼 부리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핫산의 아들을 데리고 아프가니스탄을 탈출, 미국에 도착한  아미르는 핫산의 아들을 데리고 언덕에 올라 연을 날린다. 그런데 핫산의 아들은 연을 날릴 줄 모른다.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의 일상적인 겨울철 놀이였던 연날리기도 소년 침공이후 사라졌던 것이다. 아미르의 도움으로 핫산의 아들이 연을 날리다가 다른 연과의 싸움 끝에 땅으로 떨어뜨린다. 그러자 아미르는 연을 주우러 가면 말한다.

  “널 위해서라면 천번이라도 찾아올게(For you, a thousand thimes over).”

  이 말은 핫산이 아미르의 떨어진 연을 주으러 갈 때마다 한 말이었다.   이로서 끊어졌던  연(緣)을 다시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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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뜨 비아프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봤다. 집 가까운 인디 영화 상영관에 상영 시간을 알아보니 예술 영화 쪽에 가까워서 그런지 평일엔 오전에 한번 아주 늦은 저녁에 한번, 하루에 두 번 밖에 상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주 오전은 내내 일이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이번주 중에 상영이 끝나면 어쩌나 조바심을 냈는데 마침 토요일 수업할 아이들이 기말고사에, 한자 시험에... 그래서 휴강을 하고  오전에 하는 이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영화를 볼 때는 모르겠더니 영화가 끝났을 때 굴곡많은 에디뜨 삐아프의 삶이 애잔해서 눈물이 질끔질끔 나오는 바람에.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어머니와 서커스단 곡예사였던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에띠뜨 삐아프. 그녀 또한 어머니처럼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하루하루 되는 대로 살아가던 어느 날, 루이스 레플리의 클럽 무대에 설 기회가 찾아온다. 그로 인해 가수로서 빛을 발하기 시작할 무렵 행운의 여신이 등을 돌린다. 에디뜨를 클럽 무대에 서게 해 준 레플리가 살해된 것이다. 레플리를 살해한 범인과  에디뜨 삐아프가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더 이상 클럽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다. 살인자라는 비난을 수없이 받으며 다시 거리에서 되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 때 에띠뜨 삐아프의 재능을 눈여겨 본 시인 레이몽 아쏘가 그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게 해 준다.

  레이몽 아쏘로 인해 명성도 얻고 돈도 벌지만 그녀는 철들면서 끼고 살았던 술병을 끝내 내려놓지 못했다. 슬픔이 그녀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늘 따라다녔다. 거리를 떠돌며 살 때 동거했던 남자와의 사이에 난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진정으로 사랑했던 권투챔피언 막셀의 돌연사, 고난을 함께 했던 친구의 의절. 수많은 사람 속에 휩싸여 살았지만 그녀는 늘 혼자였다. 그녀의 생을 알지 못했을 때도 진정이 느껴지는  그녀의 노래는 마음을 파고드는 뭔가가 있었지만 영화를 보며 들었던 귀에 익은 샹송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장미빛 인생’ 같은- 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그녀의 노래 속에는 외롭고 쓸쓸했던 그녀의 삶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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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베토벤이 말년에 작곡한 곡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으로 손꼽히는 ‘9번 합창 교향곡’ 탄생 뒤에 숨겨진 비밀을 그럴듯하게 상상해서 만들었다.

 

  말년의 베토벤은 청력을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살다갔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 와중에 어떻게 ‘합장 교항곡’과 같은 명곡을 작곡해서 남겼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제9번 합창 교향곡 초연 당시 베토벤이 감격한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우뢰 같은 박수쳤지만 그것을 듣지 못하자 무대에 있던 한 여성이 올라와 그를 관중들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하여 응답을 하게 했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합창 교향곡’이 탄생한 비밀을 상상한 것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영화를 볼 때도  그림 한 점을 보고 어떻게 이런 기막힌 상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영화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그랬다.  어떻게 짧은 일화 한 토막을 읽고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는지!

 

  베토벤 역을 맡은 에드 해리스 연기가 탁월했다. 에드 해리스가 전생에 베토벤이었나 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큼.

  베토벤은 작곡가인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을 신과 동격으로 생각했다. 동굴에 신과 자신이 있다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곰 두 마리가 한 동굴 속에 있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는 음악을 신의 언어라고 했다. 그러면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신의 언어를 알아듣고 그것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신의 언어를 들려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게 아닌가! 베토벤이 이 말을 했을 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베토벤이 안나 홀츠에게 자신의 머릿속에는 소리로 가득차 있다고 했는데 신이 베토벤을 가장 신뢰한 건가. 베토벤이 자신의 언어를 사람들에게 가장 잘 전해줄 것 같은 사람이므로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한 건가... 그러지 않고야 어떻게 ‘합창’과 같은 음악들을 만들었겠는가!‘ 이러면서. '

 

 그런데 신과 가까운 사람들은 대분분 참 불행한 삶을 살다간다. 베토벤 뿐만 아니라 고흐나 이상 같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 대부분이 그랬으니까. 사람들은 그들을, 그들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고독감을 평생 느끼며 살아야 했고, 현실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영역을 넘나드느라 궁핍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베토벤 곁에 정말 안나 홀츠 같은 여성이 있었다면? 베토벤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영혼의 소리까지 감지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

 

 

  그런데 나는 베토벤이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려 깊고, 지혜롭고, 똑똑하고, 예쁘고, 거기다가 헌신적이기 까지, 그러나 자존심을 잃지 않는 품위있는 여인이었던 홀츠가 베토벤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혼자 쓸쓸하게 늙어가고 있었으니.그렇다고 자신의 재능(그녀는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다)을 활짝 꽃 피운 것도 아니고. 물론 덕분에 몇 백년이 흐른 지금도 신의 언어를 듣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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