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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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를 힘든 시기에 읽어냈다. 도저히 뭔가가 눈에 들어올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읽어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5.18.

정말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 것일까?

 

각자가 쌓아온 견고한 일상이 폭압적 국가권력에 의해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그리고 한번 무너진 것은 결코 온전히 회복되지 않는다. 작가는 잔인하고 폭압적인 상황을 순결하고 정결한 언어로 그려냈다. 각 캐릭터가 품위를 잃지 않도록 언어를 얼마나 고르고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p. 211

 

작가가 광주에서 산 적이 있어 공간에 대한 묘사도 훌륭했다. 다행히 나 역시 금남로, 상무지구 등을 다녀본 적이 있어 머릿속에 그려가며 읽을수 있었다.

 

내 어린시절도 80년대의 폭압적인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고 감히 주장해본다.  

 

전라도 시골 출신인 우리 아버지는 올림픽 열기가 막 시작되려는 86년에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죽음은 아닌, 정말 허망한 사고 때문이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p.99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누가 물어보면 그냥 교통사고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아버지는 범죄의 희생자였다. 초동수사가 허술해 30년 전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최근에 경찰인 친구를 통해 알아보려 했으나 기록이 폐기되었다는 답을 들었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그 즈음이었다. 신문에 한 줄로도 나오지 않은 그런 사건이었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한 불행한 사내의 죽음과 관련해 순간 배우자를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수사를 시작한다. 어떻게든 뭔가 만들어보고자 했으나 결국 증거 미비로 며칠 만에 풀려난다. 허나 아버지 부모형제들은 이로 인해 엄마를 배척하게 된다.

 

국민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한 형사에게 국밥을 얻어먹으며 엄마는 언제 귀가했고 평소 아빠와 사이는 어떠했는지 집요하게 질문을 받았다. 맞거나 위협적 상황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너무 반복하니 답이 자꾸만 달라졌다.

 

엄마는 00시에 00에서 집을 나갔니?

 

00시에 무슨 문소리를 들었니?

 

22시인지 10시인지 왜 같은지 다른지 10살이 분간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형사는 왜 답이 다르냐고 잘 기억해보라고 중요하다고 다그쳤다. 3학년이 그것도 하나 모르냐고.

 

엄마 어디 데려 갈까봐 무서워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거짓말 하는 아이는 나쁘다고.

 

흰셔츠에, 툭 튀어나온 배, 검정 가죽벨트로 기억되는 아저씨였다. 우리 반 친구 아버지 같았고 내게 다정하게 숟가락을 쥐어 주었다. 깍두기와 뿌연 국물과 알루미늄 오봉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 p. 134

 

엄마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모들은, 외삼촌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들었다. 당시 여대생이었던 이모는 한 경찰관이랑 노래방(순간 노래방이 그 시기에 있었을까 가라오케였나, 호프였나 잠시 딴생각을 하긴 했다)에 갔고 오토바이를 타고 그자의 등에 매달려 집에 왔다고 한다. 삼촌은 정강이를 딱 한번 맞았는데 죽도록 때린 건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00 경찰서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하셨다.

 

다들 격앙된 어조로 때로는 차분한 어조로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어. 다, 잊자 한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p.79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5월에 어떤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내 결혼식에 친가쪽 사람들을 보고 이후 처음 온 연락이었다. 뜬금없는 안부인사로 시작되었으나 아버지가 남긴 땅을 우리가 제때 등기이전을 안해둔 탓에 지지부진한 다툼이 있었다.  

 

아예 개념 자체가 다른데 말이 통할리가! 그분들의 시계는 엄마가 30대이고 내가 열 살이던 때에 멈춘듯했다. 남편 잡아먹은 여자와 어린 여자애들에게서 자신들의 땅?을 가져가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듯했다. 특히 가장 집요한 분은 이사 간 외가에까지 따라와 엄마 머리채를 잡고 우리에게 모진 말을 했던 친척이라 상대하다보니 거친 말이 오갔다. 전화를 끊고 나서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땅을 그냥 달라는 게 아니라며 푼돈?을 제시하고 아버지 산소에도 못갈 거라고 소송해서 땅을 찾을 거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어릴 때 맺힌 걸 아직도 못 잊고 그런다, 사납다 등등

 

이때 내가 정말 생뚱맞게 그리 오래되었는데 오일팔이 잊히던가요? 라고 했다.

 

그분은 그제야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너네 일이 어찌 그거에 비교되냐.

그때는 그냥 그런 시절이었어.

 

고심 끝에 전화를 수신차단했다. 법무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다 수수료가 아까워 물어물어가며 등기 이전을 마쳤다.

 

오일팔 기념식에 갈까 아주 잠시 고민하다 그곳은 어쩐지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일처리를 하다 기념식 생중계는 보지 못했다. 그러다 오후 뉴스를 보았는데 대통령이 유족을 안아주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53년생으로 알고 있던 우리 아버지는 사실은 52년생이고, 나는 유족도 아니다. 그래도 한동안 코끝이 찡해서 서재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밥하러 나오니 애들이 또 나쁜 할아버지 전화 받았어 한다.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로 가, 꽃 핀 쪽으로.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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