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의 댄서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0. 개괄

[어둠 속의 댄서]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마 선언 자기배반이니 '선의' 3부작의 마지막 시리즈니 이런 앞뒤 맥락은 차치해도, 영화 자체로 평이 엇갈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독특한 영화다. 극단적으로 불쌍하게 살아가는 셀마를 하드보일드하게 그려나가다가, 갑자기 뮤지컬로 화면을 사로잡는 놀라운 변신을 보여준다. 단순한 멜로드라마로 볼 수도 없고, 단순한 뮤지컬 영화로 볼 수만도 없는 영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시사회, 비디오방, 수업시간에 DVD, 다시 비디오방 이렇게 4번을 본 영화이기도 하다.

 

1. 외적인 것

뮤지컬 장면을 제외하고는 영화 전체가 핸드 헬드를 사용해서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관객에게 셀마의 비루하고 고달픈 현실 그리고 삶의 부조리와 비애를 있는 그대로(처럼 보이게 해서) 강요한다. 이따금씩 점프 컷으로 대화를 생략하거나 심경의 변화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2시간 동안 흔들리는 화면과 디지털 필름의 거친 질감에 시달려야 하니, 사람에 따라 짜증날 만도 하다. 무엇보다 그 ‘강요’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영화 경력이 없는 뮤지션 Bjork(우리말 발음으로는 뷔욜ㅋ에 가까운데 이하 그냥 비욕)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파격적이다. 워스트 드레서니 전위적(?)이라든지 그런 말을 듣는 어쨌든 그녀의 창법이나 음악 자체가 벌써 듣는 이에게 극단적인 호오를 종용한다. 개인적으로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이 영화에서 비욕이 보여준 음악들은 대개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Radiohead의 톰 요크와 듀엣으로 부른 I've Seen It All은 뮤직비디오를 다운받아 몇 번씩 볼 정도로 멋진 곡이다.

비욕의 음악은 일렉트로니카 혹은 더 포괄적으로 말해 탈장르이다. 그녀는 이미 뮤지컬적인 요소와 인더스트리얼적 요소를 추구한 바 있는데, 특히 인더스트리얼이 이 영화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찌들대로 찌든 고된 삶의 현실 속에서 그녀를 뮤지컬의 판타지 속으로 빠지게 만드는 것은 기계들의 소음,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 연필 소리, 발자국 소리 등의 소위 음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닌 현실 속의 소음들이다(빌을 죽인 후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정도가 예외다). 비욕이기에 이 뮤지컬들을 책임질 수 있었던 것이다.

 

2. 액자구조

트리에가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일단 어둠을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를 표방하는 영화라고 치면, 그 뮤지컬 영화라는 어둠 속에서 트리에는 액자구조식으로 뮤지컬 혹은 뮤지컬 영화에 대해 또다시 얘기하고 있다. 셀마(비욕)가 미국에 온 것은 아들의 눈 수술 때문이라고는 하나, 동시에 헐리웃 뮤지컬에 대한 동경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 진부한 아메리카 드림 이야기이다. 실상 현실은 고달프며, 그녀는 끝까지 '드림' 즉 뮤지컬이라는 판타지로 도피할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도피하는 뮤지컬은 기존의 뮤지컬과는 조금 다르다. 무대가 있는 것도, 밴드가 있는 것도 아니라 공장, 기차선로 등등 그녀가 외면하고 싶은 힘든 현실 속에서 그녀는 자기 식의 뮤지컬을 꿈꾼다. 이런 식으로 트리에는 뮤지컬이라는 외적·내적 장치를 통해서 아메리칸 드림을 꼬집고 있다(영화가 비판하는 것들은 3.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그리고 셀마는 뮤지컬의 마지막 노래가 정말 싫다고 몇 번이나 얘기한다. 그녀의 현실 도피성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부분이기도 한데, 이것이 재미있게도 또 한 번 영화 자체에 적용된다. 바로, 그 기분 나쁜 엔딩 신 말이다. 처음 볼 때도 생각했던 건데, 그 마지막 장면은 정말 억지로 눈물 흘리게 하려는 건지, '이런 비참한 게 바로 현실이야'라고 강요하고 있는 건지, 단순히 셀마의 이미지를 깎아먹게 하려는 건지, 어쨌거나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4번째 볼 때는 마지막 장면을 안 보고 비디오방에서 나와 버렸고, 그때 불현듯 나 역시 셀마처럼 행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트리에는 일부러 라스트 신을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바깥→안의 액자 구조에서 이번엔 안→바깥의 액자 구조를 만들기 위해 말이다.

 

3. 내적인 것

셀마는 현실 도피적인만큼이나 엄청나게(답답할 정도로) 순진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울드리치 노비라는 체코에서 좋아했던 탭댄서의 이름을 거짓으로 대기도 하고, 법정에서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시사회 때 같이 본 법대 친구는 이런 면에 대해 셀마에게 비난을 쏟아 부었다) 그런 그녀에게 사회는 너무나도 가혹하다. 그녀가 아무 의도 없이, 혹은 선의로 내뱉었던 말들은 법정에서는 그녀를 무자비한 살인자로 몰고 가는 증언들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온다. 굳이 미국의 사법기관에 대한 비판을 끄집어내려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무산, 소외 계층 - 혹은 이국민에 대한 권력의 가혹한 면모가 드러난다.

또한 아버지가 없는 셀마와 셀마의 아들이 겪는 고난이나 가장으로서의 책임에 시달리는 빌의 모습 등에는 가부장적 사회관이 베어있다. 셀마가 무자비한 살인마로 인식되는 것은 그녀가 장애인이기도 하지만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셀마를 이해해주는 것은 캐시(aka 크왈다. 까뜨린느 드뇌브가 맡았다!) 혹은 여간수뿐이다. 물론 제프도 있지만, 제프의 역할은 이 영화 속에서 조금 애매모호하다. 셀마를 체포해가는 경찰관이나, 검사나 판사 그리고 대부분의 배심원도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셀마에게는 부조리한 권력으로 군림한다. 이것이 트리에가 일부러 꼬집고자 한 건지 아니면 트리에 자신의 무의식의 발로인지는 잘 모르겠다.

 

4. 결론

아마 뮤지컬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파로 나갔다면 이 영화에 대해서 그다지 엇갈리는 평가는 없었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잘도 또다른 논란거리가 될 실험을 한 것이다. 이 형식적 실험은 뮤지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비욕 한 사람에게 떠넘겨져 버린다.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뮤지션으로서도, 라스 폰 트리에는 비욕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비욕은 훌륭하게 두 가지 역을 소화한다. 셀마라는 비루한 배역의 인물에게서 터져나오는 신비스러운 목소리. 라스 폰 트리에의 실험은 비욕을 만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고 싶다. 어느 정도는 대중적으로도 말이다.(01-3-4 / 02-4-29 / 05-9-19, 필유)

 

 

덧1: 지나님 때문에 생각난 영화로, 시사회로 봤을 때의 첫 감상과 숙제로 썼던 두 번째 글을 짬뽕해봤다. 길긴 한데, 영양가는 없다 -_-

 

덧2: 재판정에서 셀마의 상상 속에 나타나 현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탭댄서 올드리치 노비는 조엘 그레이라는 배우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72년작 [카바레]에서 리자 미넬리와 함께 열연을 보여준 바 있다. 이 영화는 수많은 뮤지컬 영화 가운데 개인적으로 베스트로 꼽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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