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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ㅣ 밀레니엄 북스 60
프란츠 카프카 지음, 곽복록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1월
평점 :
[아메리카]는 카프카의 첫 소설이자 미완성 작품으로 사후 출간된 원제 ‘Der Verschollene’를 따라 영제 ‘The man who disappeared’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어로는 주로 ‘실종자’로 번역되며 ‘아메리카’는 초판본에만 사용된 제목이다. 과연 어느 제목이 더 작가의 의도에 부합할까?
먼저 [아메리카]의 배경은 반드시 미국이어야만 했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미국은 메타포에 불과하다. 이 메타포란 게 참 편리해서 문제지. 괴테를 즐겨 읽었다는 카프카는 괴테가 그리던 미국상을 접하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미국을 재인식했을 터다. 그러나 괴테가 이상향으로 바라보던 미국은, 카프카의 시대에 오면서 이상향으로서의 달콤함은 퇴색되고 오히려 산업 기술의 발달로 인간 소외 등 부정적 측면들이 부각되고 있었다. 카프카가 주로 다룬 소재인 인간 소외, 의사소통의 부재, 권위적(가부장적) 억압 등은 모두 20세기의 시대상과 관련이 깊다.
그럼 ‘실종자’라는 제목은 어떤가. 카를은 실제로는, 그러니까 명시적으로 혹은 법적으로는 실종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텍스트 아래에서는 실종의 정의와 반대되는 해석마저 가능해진다.
먼저 비극적인 해석. 카를은 들라마르슈 패거리에게 뼛속까지 착취당하다가 소리소문없이 세상을 사직하고, 애초에 존재하기라도 했느냐는 듯이 보기 좋게 잊힐 것이다. 카를이 소설 내내 현실에 시달리기만 한다는 점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해석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클라호마 극장 에피소드 전체가 빈사 상태에 빠진 카를이 떠올리는 환각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지만, 사실 이는 너무 안이한 관점이다. 카를이 자신의 이름을 ‘니그로’라고 대답하는 부분 등에서 ‘환각치곤 아직도 너무 리얼하다’라는 비판도 피할 수 없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환각이 아니라고 양보한다면, 이를 카를이 직면하게 될 더 커다란 (기업적) 착취의 서곡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다음으로, 덜 비극적인 해석. 카를이 어찌어찌 들라마르슈로부터 탈출한 후 삶에 찌들지언정 자립해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어떨까. 카를의 작중 성격에 비춰보면 이쪽이 그럴싸해 보인다. 카를은 정말이지 불합리한 상황 앞에서도 현실 도피에 빠지지 않고 상황을 타파하려 애쓰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들라마르슈를 벗어나는 상황도 충분히 그려봄 직하다(‘니그로’는 자기 비하가 아닌 겸손함의 표출로 읽으면 된다). 이렇게 보면 소설 말미의 골짜기 그리고 비말(飛沫)의 이미지도 뭔가 희망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짧은 분량이나마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러한 자연과 물의 이미지는 새로운 국면을 암시하는 장치로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설 전반에 걸쳐 배경을 이루는 삭막한 도시와 기계 문명과 대비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를 삶에 대한 부정 대 긍정의 명확한 이분법적 구도로 바라보지 않고 ‘비극적인’ 대 ‘덜 비극적인’으로 모호하게 구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후자의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부합한다 한들 그것이 그다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전반에 걸쳐 카를이 내던져져(被投) 겪는 일들 속에서 그 자신이 모종의 각성[企投]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카를은 어떤 의미로든 실종된다. 소설은 끝나버리고, 독자는 카를의 종적도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관점에 따라 실종의 성격이 달라질 뿐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카프카가 의도한 카를의 실종이 어떤 실종이었을까,로 회귀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가차 없이 뻔하다. 카를이 직면하는 상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조리하지만 오늘날에도 없음 직한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카를처럼. 그래, 이렇게 쓰면 이 치열한 실존주의마저 얼마나 흔하고 김빠진 이야기가 되고 마는가. 그야말로 21세기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