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소녀 환상의 숲
쥘 쉬페르비엘 지음, 정지현 옮김 / 이모션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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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어딘가 페이지에서 표지를 보고 놀랐던 책이다. 단도에 기발하고도 대담하게 무려 한글 타이포그래피로 디자인된 표지였다. 이 책을 보고 시리즈도 찾아봤는데, 모두 이 책 만만치 않게 기발한 타이포그래피였다. 한글로 타이포그래피를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렵고 ‘각’이 안 나오는 일인지는, 유관 업계 종사자라면 다들 알 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환상의 숲’이라는 시리즈명에 맞게 환상문학들을 골라 시리즈를 만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더 대담한 표지의 다른 시리즈 도서까지 사지는 않았다. ‘바다 위의 소녀’라는 왠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제목을 이길 책은 없었다. 다만 이 시리즈 외에도 이 출판사의 몇 권 되지 않는 책들 표지는 미니멀리즘, 추상미술,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이 많았다. 


대담한 건 내지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단행본이 세로 장평을 작게 쓰고 거의 표준처럼 양끝 맞춤을 강제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교정도 대담하다면 대담한데 “어떻게 경찰이 알고 왔을까?...”(144쪽) 이런 식으로 물음표와 점 세 개(말줄임표도 아니다!)를 막 그냥 붙여서 쓴다. 비꼬는 건 아니다. 오탈자나 문장부호 가지고 목숨 걸지 말자. 이렇게 마이너한 책들을 매니악한 형식으로 내고 있으니 이유도 없이 응원하고 싶어지는 출판사다.


전체 분량이 길진 않지만 단편집이다 보니 시차를 두고 나눠서 읽었다. 제목에 걸맞게 표제작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부조리한 세계 속에 홀로 던져진 존재의 고독을 꿈 혹은 몽상에 가까운 시각적 이미지로 묘사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 ‘바다 위의 소녀’는 마리 르도네의 [로즈 멜리 로즈]의 로즈와 닮았다. 둘 다 12세이고, 후자에 대한 평론가들의 표현을 빌리면 ‘전망 부재의 암울한 세계’에 다소간 속해 있다. 다행히도 {바다 위의 소녀}는 20세기 초의 엽편으로서 ‘암울’이라는 단어에 닿기에는 분량도, 문장에 실린 감정선의 길이도 너무 짧았다.


{구유 옆의 소와 당나귀}와 {노아의 방주}는 구약에 기초를 둔 이야기다. 둘 다 의인화를 사용해 우화의 형태를 띠는데, 전자는 어딘가 감동스러운 면이 있었고(주인공 소) 후자는 노아의 방주에 대한 작가만의 해석 정도로 보면 될 듯싶다. {세느 강의 이름 없는 처녀}, {하늘 위의 다리를 저는 두 사람}, {아내를 다시 만나다}는 사후 세계(?)가 소재로 등장하는데 딱히 내 흥미를 자극하지는 않았다. {우유 사발}과 {밀랍 인형들} 역시 인상적이지 않았다.


{라니}는 뭐랄까, 선사시대의 인류를 다룬다는 점에서 최근 읽고 있는 훌리오 꼬르따사르의 {드러누운 밤}과 닮은 점이 있었다. 재미있게도 {경주의 계속} 역시 꼬르따사르의 {아숄로뜰}과 유사하게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전도를 다룬다. 끝으로 {발자국과 늪}은 보르헤스식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환상문학에 가깝다. 


수록작 모두 분량이 짧은 편이고, 작가가 원래 시가 주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문장이 특출나게 간명하다거나 혹은 반대로 비유로 점철되었다거나 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번역이나 윤문의 문제라기보다는 20세기 초중반 시인의 소설이라는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독특한 디자인과 표제작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 책을 가지고 있음을 한동안 자랑스럽게 생각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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