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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이야기 사슬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꿈을 글로 옮기는 건 신나지 않는 일이다. 문자화되는 순간 인식이 생동감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혹은 기의와 기표. 분절화된 언어는 사상이 담길 적당한 그릇이 아니다. 아니 '그릇'이라는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의 한계다. 그걸 극복하면 인간이 아니라 뉴타입이지.
이 한계 속에서 꿈을 가장 잘 활자화하는 방법은 자동기술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의 외연을 조금 더 넓게 본다면, 읽기 괴롭지 않은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러니까, 십중팔구 독백이나 낙서로 전락하는 그런 끄적임을 넘어서, '꿈-소설'을 쓸 수도 있다. 나는 정영문의 이 소설집을 그런 작품들의 예로 봤다.
내게 그 작법은 명상과도 같다. 위빠사나의 기본은 마음챙김이다. 마음을 챙기듯, 꿈을 복기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식을 인정하고, 보고, 알아차린 상태에서 꿈을 사건 위주로 드라이하게 기록한다. 인과관계도 심리묘사도 없다. 있으면 안 된다. 대부분 서로 무관한 그 문장들이 모이면서, 기묘한 정서의 구름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정말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대개 '검은' 색체를 띠며, 그래서 더 읽는 이의 마음에 파고든다. 게다가,
계산에서 나오지 않은 그 에크리튀르는 무작위의 미학에도 닿아 있다.
마침내 사자는 내 목까지 먹어치웠다. 전문의로서의 관심을 갖고,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의사는 사자를 칭찬했고, (...) 그런데 그때 갑자기 사자는 먹은 것 모두를 게워냈다. 목구멍에 내 뼈가 걸린 것일까? (...) 사자가 씹은 나의 살점이 오물처럼 바닥에 쌓였다. (76쪽)
모퉁이를 돌자 아무것도 싣지 않은 빈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는데, 시동이 걸려 있지만 운전사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트럭 옆에 잠시 서 있는데, 만약 내가 팔을 들었다가 내리며, 출발, 하고 외치기만 해도 트럭은 혼자서 저절로 굴러갈 것처럼 여겨진다. (78쪽)
쓸데없이 길게 썼지만, 그저 꿈을 기록하려 시도해온 나 자신의 경험에 정영문을 끼워 맞춰본 것뿐이다. 실제로 정영문의 이 이질적 서사의 주 원천이 꿈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가 철저한 계산 아래 이 책을 쓴 건 아니라고 확신한다. 원천이 꿈이 아니라 쳐도 책에 등장하는 아버지, 곱사등이, 죽음 등은 '꿈의 대부' 프로이트의 해석을 갖다 붙이기 좋은 이미지들이다. 이것이 정영문의 계산인지 아닌지 역시 나로선 판단할 수 없다.
여기에, 쓰고자 하는 것이 소설임을 감안하면, 쓰는 이의 의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을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이 책의 소설들에서, 정영문은 때로는 의도를 감추는 데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수록작 대부분의 제목부터가 그렇다.
처음 이 책을 읽고 내가 흥분했던 건, 그도 (나처럼) 꿈을 쓰려 노력했고, 그 노력 끝에 작법과 작품 세계를 성취해냈다고 내 맘대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 끼워진 장보고마트(신림점) 영수증이 2013년 1월 7일자였으니, 3년 전의 일이다. 오늘 나는 그 환상에서 깨어나기 위해 이 재미없고 불완전한 정리 글을 쓰고 별 다섯 개를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