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악마 (구) 문지 스펙트럼 12
레이몽 라디게 지음, 김예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중고로 구했던 듯하다. 누구의 추천이었는지는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문지스펙트럼에 대해서는 좋은 이미지가 있어 구매에 망설임이 없었던 듯싶다.

사전 정보 없이 펼친 책의 첫인상은 지루함이었다. 제목에서 풍기는 인상은 '관능'이지만(그리고 조숙한 주인공은 뒤라스의 [연인]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앞부분을 읽는 동안 느낀 건 '고리타분함'에 가까웠다.

그러다 화자와 마르트와의 사랑이 '성사'될락 말락 하는 시점에서 소설은 급격히 흥미로워진다. 사랑이란 건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니까. 그 전후의 어떤 것도 그 순간만큼 빛나지는 못하기 마련이니까. 그 단 한 순간의 바로 직전까지의 드라마야말로 모든 '통속적인' 이야기들의 핵심이니까.

그래서 거기까지 읽은 나는 책을 더 읽기가 아까웠다. 이야기의 끝을 아는 것이 두려웠다.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심리 묘사 속에서도 나는 화자에게 감정이입하고 있었다. 가령 다음과 같이 한심하면서도 빼어난 관찰은 어떤가.

그녀는 얇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자리에 앉은 이후로 구겨져 있었다. 나는 의자 밑판이 그 살갗에 새겨놓았을 자국들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47쪽)

게다가 이들의 사랑 혹은 관계는 애초에 파멸이 정해져 있다. '운명 지어진' 파국으로의 여정. 독자는 그것을 낱낱이 목도할 의무(그리고 권리)가 있다.

종종 모호한 곳이 있어 썩 매끄럽게 읽히지는 않는 번역이었지만, 역자 후기는 의외로 상당히 읽을 만했다. 특히 화자가 마르트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화자가 자신의 이기심을 이지적으로 서술하려 하기 때문이란 지적이라든가. 솔직히 일견 그렇게 보이지 않거든. 그냥 나쁜 새끼지.

'육체'의 사랑을 '이성'적으로 그리려 한 '고전주의' (성장)소설이나, 아무래도 내게 가장 인상을 남긴 건 '러브 스토리' 요소인 듯싶다. 찾아보니까 다른 번역판이 있던데 구해볼까 생각 중이다. 또 작가의 대표작(이자 유작)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모양인데, 이것도 기약 없는 위시리스트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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