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뇌]는 다음과 같은 참으로 드라마틱한 사건과 함께 시작된다: 사뮈엘 핀처라는 한 저명한 정신 의학자는 체스에 입문한지 단 석 달여만에 체스 세계챔피언 딥블루 IV(사람이 아닌 컴퓨터이다)와의 대국을 벌여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바로 그날밤, 그는 톱모델인 아내와 정사 중에 사망을 하고 만다. 사뮈엘 핀처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전직 기자 이지도르는 미모의 여기자 뤼크레스를 겨우 설득해 사건의 진상을 함께 조사해나가기 시작한다.

으레 예상할 수 있듯, 조사가 진행될수록 숨겨진 '엄청난'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며 따라서 그 조사과정은 위험천만한 것이기에 독자에게 있어서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함을 유발시킨다. 통상적인 의미로서의 남/녀 성역할이 서로 전도된 이지도르와 뤼크레스 콤비의 활약상을, 베르베르는 그 특유의 재치를 이용해 잘 그려내고 있다. 베르베르의 위트는 구성방식에 있어서도 돋보인다. 2개의 관련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들이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며 접점에 이르게 되는 구성방식은, 이제는 그리 낯설 것도 없는게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베르베르는 이 교차되는 에피소드들의 길이를 매우 유동적으로(때로는 롱테이크, 때로는 숏테이크) 배치함으로써 마치 교차편집으로 속도감을 잘 살린 한 편의 액션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게 한다. 그리고 한 에피소드의 끝문장과 (당연히 시공간적으로 다른 차원에 속한) 다음 에피소드의 시작문장이 묘하게 아귀가 맞아들게 한 것 역시 재미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p.424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 골이다.](이외에도 무척 많다)와 같은 대목이 그러하다.

[뇌]는 이렇게 흥미롭고 또 재미있는 소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보며 재미와 (때로는) 경탄을 느끼다가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 (갑자기 바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급하게) 자리를 일어서며 "재미있네" 한 마디로 영화를 가볍게 정리해버리곤 한다. [뇌]는, 헐리웃식(어찌되었든간에 주인공이 언제나 이기는) 액션신들의 불필요한 출몰에서부터 업무상 파트너로 만난 두 남녀는 결국 연인이 된다는 공식, 주인공들의 싸움은 언제나 '전인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는 공식 등 헐리웃 공식들에 너무 충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제이자 이 작품의 핵심적인 키워드인 [최후 비밀]이라는 단어가 응당 함축했으리라 기대되었던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줄만한 임팩트가 실린 '무엇인가'가 [뇌]에는 부재한다. 쉽게 말해, 깨는 맛이 없다. 베르베르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뇌] 정도의 소설은, 민감한 소재들로 인해 한때 반짝했던 로빈 쿡의 메디컬 스릴러들과 별다를게 없다. 베르베르의 작품세계가 아우르는 상상력의 부피는 동시대의 작가들에 비하면 큰 편이긴 하나 혁신적이기까지는 못한 것 같다.(Just remember 보르헤스.)

물론 블록버스터도 가끔씩 한 편 봐주면 그리 나쁘진 않다. [뇌]를 가득채우고 있는 뇌에 관한 과학적 지식들과 뇌를 둘러싼 모험들은, 뇌에 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는 오늘날 많은 독자들에게 큰 지적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뇌]는 번역이 매우 잘 되어있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다. 특히 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 단어로 번역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띠던데(의학용어 제외), 역자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베르베르씨도 화이팅.(2004.5.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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