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비시선 121
최영미 지음 / 창비 / 199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담배에 대하여

그날 밤 첫사랑 은하수, 눈이 시리도록 매운
스무살의 서투른 연정, 아무래도 감출 수 없는
더 서투른 입술로, 떨리는 손으로
필락말락 망설이는
쉽게 태워지지 않는 뻑뻑한 고뇌로
이빨자욱 선명한 초조와 기대로
파름한 연기에 속아 대책없는 밤들을 보내고, 어언

내 입술은 순결을 잃은 지 오래
한 해 두 해 넘을 때마다 그것도 연륜이라고
이제는 기침도 않고 저절로 입에 붙는데
웬만한 일에는 웃지도 울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슬슬 비벼 끄는데
성냥곽 속에 갇힌 성냥개비처럼
가지런히 남은 세월을 차례로 꺾으면
여유가 훈장처럼 이마빡에 반짝일
그런 날도 있으련만, 그대여
육백원만큼 순하고 부드러워진 그대여
그날까지 내 속을 부지런히 태워주렴
어차피 답은 저기 저 조금 젖힌 창문 너머 있을 터
미처 불어 날리지 못한 기억에로 깊이 닿아
마침내 가물한 한줄기 연기로 쉴 때까지
그대여, 부지런히 이 몸을 없애주렴
-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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