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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벨 리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3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정규웅 옮김 / 민음사 / 197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대여섯 권 샀는데 그중 가장 가슴에 와닿은게 바로 이 작품 <애너벨 리>였다. 일단 영어라서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닌 시의 경우 번역의 어려움이 크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소설 전집을 살 정도로 개인적으로 포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시집이 더 깊이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문을 여는 동명의 시 '애너벨 리'에서부터 나는 푹 빠져버렸다. 현학적이지도 않고 감상적이지도 않게 포는 담담하게 아름다움을 끌어내고 있다. 정두수 씨의 포크 음악 같은 느낌이랄까. 이 아름다움은 형식적으로는 각운(脚韻)의 사용에서 오며, 내적으로는 죽은 아내를 향한 애도에서 비롯된다. 책의 뒤에 실린 해설에 더 자세히 나오지만 이러한 내/외적 미의 조화는 포가 시에 있어서 추구한 궁극의 목적이다.
여기에 이른바 괴기소설가로 알려진 포의 독특한 정신세계와 환상문학적 요소가 결합되어 주된 시상을 이루며 시집 전반을 이끌어 간다. 그리고 압권이라 할 수 있는게 맨 마지막 시 '갈가마귀'다. 시집 전체의 1/4 내지 1/3을 차지하고 있는 이 長詩는 그 길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흡인력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애너벨 리'에서 보이던 담담함은 '갈가마귀'에 와서는 절규와 절망으로 마침내 폭발한다. 음악으로 치면 고딕이나 둠 싸이키델릭에 가까운 분위기다. 음울하고, 몽환적인.
역시 해설에 나오는 말이지만, 포는 '갈가마귀'에서 각운으로 반복되는 Nevermore라는 한 단어를 주조하는데 매우 신중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포의 말 그대로, 이 시에서 과연 저 Nevermore라는 단어를 대체할 그 어떤 단어가 세상에 존재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외적으로 불우한 삶을 영위하던 포였지만 그의 詩作은 치밀할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시는 차갑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뜨거운 아름다움을 띄게 되었다. 시의 자세한 내용 언급은 일부러 피했는데, 포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소설가로서의 포가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포를 재조명할 소중한 기회이리라.(2003.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