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산문집 -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지음 / 살림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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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처럼 단순히 기형도의 시에 끌려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독자에게 이 책은 그리 친절한 책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완성도도 그다지 높다고 할 수 없다. '짧은 여행의 기록'까지는 예의 흡인력을 보여주지만 그 뒤로 몇 소설을 제외한 서간문이나 기사, 서평의 모음은 일반 독자에게는 거의 아무런 감흥이나 의미를 주지 못한다. 그의 전집 쪽이 메리트를 가지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그럼에도, 작가의 향기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너무나도 아니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인 그의 편지들 속에서 아스라이 향수를 느낀다. 나는 과연 이런 장문의 편지를 쓴 적이 있었던가. 관념으로 가득차 있는, 나쁘게 말하면 혼자만의 중얼거림에 불과한 그의 서간들은, 그러나 그 진실성 때문에 적어도 나에게는 많은 것을 시사했다.

'짧은 여행의 기록'은 그만의 기행문이다. 광주에 경도할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한편으로 등 돌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세대의 한 단편상이다. 비겁함이 느껴지지만 이내 관념 속으로 묻혀버린다. 아니 그 자체로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형도답다. 그는 아도르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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