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작품이니 뭐 그런 이유 때문에 본 건 아니었다. 원래 영문학에는 큰 관심이 없기도 했고. 단지 실비나 오캄포 소설의 인물들이 언급했던 작품이 이 소설이었고, 그래서 무작정 사버렸다. 소설의 출발은 굉장히 그럴싸하다. 왠지 고딕스러운 분위기도 좀 흐르고. 문제는 중후반부를 넘어가면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원래 문체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이럴 때 욕하게 되는 대상은 결국 번역자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다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꽤 여러 권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는 (기존 번역서에 비해) 번역이 훌륭한 책도 많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번역이 나쁜 축에 속한다고밖에 볼 수 없다. 가령 소설의 마지막 부분. "선생님이 여기 계신가요?" 마일스는 감긴 눈으로 내 말이 들리는 방향을 감지하며 숨을 헐떡였다. '선생님'이라는 마일스의 이상한 말에 내가 비틀거리고 숨을 헐떡이며 '제셀 양! 제셀 양!' 하고 말을 되풀이하자, 그가 갑작스러운 분노로 나를 밀쳤다. 나는 놀라서 아이의 추측을 간파했다. 그것은 우리가 플로라에게 했던 일련의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제셀 양보다 오히려 낫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제셀 양이 아니야! 하지만 그게 창문에 있어. 바로 우리 앞에. 저기 있잖아. 비겁한 괴물 같으니. 저기 마지막으로 나타난 거야!" 이 말을 듣자 마일스는 순식간에 마치 미친개가 냄새를 맡고 머리를 흔들다 몸을 치떨며 돌파구를 찾듯 - 내 느낌에 지금도 유령이 독기처럼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 흐릿하게 창문 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우리를 엄습한 거대한 존재를 도무지 찾지 못한 채 당황하여 새파랗게 질려 나를 쏘아보았다. "그분이 오셨나요?" 이게 도대체 뭔 소리인지... 물론 비문은 없다. 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텍스트로 복사하려다가 서식 고치기 귀찮아서 이미지로 땄다. 출처는 우리의 구세주인 ibiblio). 어떻게 생각하는가, she와 he의 차이를. 사실 번역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리뷰들을 봐도 독서에 지장이 줄 정도로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단지 나와 번역자의 코드가 맞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리뷰랍시고 쓴 글인데 번역에 대해 꼬투리만 잡은 셈이지만, 별 수 없다. 안 맞는 건 안 맞는 거다. 앞으로 이 번역자의 번역서를 피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