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전쟁 - 잔혹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여성을 기록하다
수 로이드 로버츠 지음, 심수미 옮김 / 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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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다 힘든 내용이었지만 특히 마지막에 계속 강간에 대해 다룰 때는 더했다. 평화유지군이 미성년자 성매수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너무 충격이었는데, 이런 걸로 충격받는 나는 아직도 남성이란 성별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가, 라고 스스로 되묻게 만들었다. 순진하게도, 평화유지군이라면 평화에 더 힘쓸 줄 알았지 뭐야. 고통에 가담할 줄은 몰랐어. 아, 나는 아직도 너무 순진했구나.


그간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를 통해 다뤄온 도서들, 특히 《페미사이드》,《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와 연결되는 내용이 많다. 이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저 책에서 나오는 내용과 겹치는데,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겹친다. 페미사이드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에서는 사례들이 다 나온 후에 마지막 결론으로 희망에 찬 부분을 얘기했다면, 《여자, 전쟁》은 매 꼭지마다 이 모든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수 로이드 로버츠는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취재하고 거기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과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옳지 않다고 말하며 고통받는 편의 서려는 여자들의 노력이 그러나 언제나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고통을 주고자 하는 남성 세력이 워낙에 강했으므로. 소위 알탕 카르텔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저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고 했지만, 미성년 강간을 비롯하여 전쟁 강간까지 봐주기에 힘을 쏟는다. 



'문화'라는 것이 대체 뭘까에 대해서도 한참 생각해야 했다. 내가 생각한다고 결론 내려진 건 아니지만, 문화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성기를 잘라내는 일들, 어린 아이를 신부로 팔아버리는 일들이, 그러나 그 나라를 벗어나 다른 나라에 가도 여전히 그들 사이에 단단한 중심이 되어 유지되어 왔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학대라면, 그것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인해야 하는걸까? 여성의 성기를 잘라내는데? 어린 아이를 신부로 팔아치우는데? 수 로이드 로버츠는, "우리는 문화적 차이를 받아들이고 관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닫힌 문 뒤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학대를 허용하기도 한다" 고 자신의 책을 빌어 말한다.




어제 SNS 를 통해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아동 구조 연합> 관련 연설을 보게됐다.






영상을 보면 알게되겠지만,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아동 포르노에 관련된 괴로운 일들을, 말하기도 듣기도 고통스러운 그것을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해야 그 다음 과정을 밟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내가 저 연설을 듣는 자리에 있었어도 그러했겠지만, 영상을 보면서도 '그 사실을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듣고 싶지 않다고. 아동 포르노라는 말만 들어도 괴로운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을 듣는 것은 또 얼마나 괴로울까. 그러나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미안하지만 여러분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여성주의 책을 읽는 것, 페미사이드와 강간에 관한 이 고통스러운 일들에 대해 읽는 것으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읽는 것은 물론 괴롭지만, 아는 것 역시 괴롭지만, 알아야 한다. 알아야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벌어지는 문제들에 대해 알고 또 거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것.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하기보다 두 눈 부릅뜨고 알고자 하는 것. 그것이 그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이며 또 더 강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읽을 것이다. 계속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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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4-24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화유지군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 도우러 갔던 NGO 직원들 일부도 돕는 일은 하지 않고 ‘나쁜‘ 일만 하고 있다는 뉴스도 최근에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 단체들 이름에 ‘children‘ 들어가 있고, 그런 거 보면 정말 피가 거꾸로 솟구치죠.
인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신들이 하는 일의 정당성 또는 의미와 자신의 욕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을 구별해버리는 그런 ‘뇌 구조‘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락방님의 ˝괴롭지만, 알아야 한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습니다.
맞아요.
괴롭지만 우리는, 알아야 해요......

다락방 2019-04-24 11:07   좋아요 1 | URL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알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죠.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이 연설에서 잔인한 현실에 대해 말을 하고 그 후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 단체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것 같아요. 이런걸 보면 여자들은 계속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거기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저는 평화유지군의 행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나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제 자신의 순진함에 너무 놀라고요. 그런 한편, 내가 아무리 나쁘게 상상해도 세상 남자들은 내 상상보다 더한 나쁜 짓을 저지르는구나 싶어요. 세상이 너무 절망적이에요, 단발머리님...

비연 2019-04-2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 정말 힘들고 괴롭네요. 선듯 읽겠다고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생각하고 이해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 괴롭지만 알아야 할 일들이 많아서 마음이 참 심란해요...ㅜ

다락방 2019-04-24 11:15   좋아요 0 | URL
매 장마다 맞서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도 함께 실려있어서 좋긴한데, 고통에 대한 얘기는 정말이지 무뎌지지 않네요. 이 세상은 전체적으로 다 여성을 혐오하고 성적대상화 하고 있어요. 게다가 거기에 미성년자까지 동원되니.. 세상을 다 갈아엎어야 하는데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어요.ㅜㅜ

2019-04-24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4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4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4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만해 거짓말
필립 베송 지음, 김유빈 옮김 / 니케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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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마 앙드리외(1966-2016)를 기억하며




이 책은 위의 헌사로 시작한다. 책을 읽노라면 이내 토마 앙드리외는 십대 시절 필립 베송이 사랑했던 소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의 헌사는 곧바로 스포일러인 셈이다. 그렇게 토마 앙드리외가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이 책을 읽게 되는 것이다. 헌사가 곧 스포일러네, 하면서도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뱃속에 바위라도 든 것마냥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건 아마도 토마가 거짓말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국내에 번역된 '필립 베송'의 모든 책을 읽어본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책 [포기의 순간]을 가장 많이 떠올렸는데, 포기의 순간에서 주인공도 계속 자신을 속인 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포기의 순간에서는 오랜 시간 속이며 살다가 솔직해지기로 결심하지만. 그건 그대로 문장과 여백 모두가 스며들었다면, 이 책은 또 이 책대로 끝까지 유지된 거짓말 때문에 스며든다. 그러지말지 그랬냐고 내내 원망하면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일찍이 깨달았던 필립은 같은 학교의 과묵한 소년 토마에게 호감을 품게 된다. 그를 향해 연정을 품었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텐데, 그들에게는 접점이 없었고 자신은 친구도 별로 없는 외톨이였던 터라 그가 자신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역시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고 어떻게든 필립과 단둘이 있게 되는 순간을 바라왔다. 그렇게 그들은 연인이 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밝혀서는 안된다. 그들은 학교에서 만나도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지만, 둘만 있게 되는 순간에는 서로에 대한 욕망에 시달린다.


사실 이 관계에서 나는 좀 의문스럽긴 했다. 어떻게 서로를 연모하는 마음이 일단 육체적 욕망으로 해소가 되는지,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뜨겁게 서로를 품에 안는 걸로 끝날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 사랑하는건가 싶을 정도로 이 사랑은 내게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었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들은 서로 대화를 하긴 하지만, 지난번 김봉곤의 국내 소설을 읽었을 때도 그렇고, 왜 그렇게 육체적 욕망이 강한 것이 사랑이 큰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거지? 내가 사랑에 대해 그들과 다른 관점을 갖기 때문인가? 



나는 결핍에서 오는 고통을 경험했다. 그의 피부, 성기, 한때 나의 것이었는데 내게서 앗아간 것, 그래서 다시 주어지지 않으면 나를 광기로 몰아넣을 그런 것들의 결핍에서 오는 고통을 경험했다. (p.59)




나 역시 결핍에서 오는 고통을 경험했지만, 그리고 경험하고 있지만, 그 결핍이 그의 피부나 성기를 의미하진 않는다. 그 결핍은 다른 것이다. 나는 그의 존재의 결핍에서 오는 고통을 느끼고, 일상의 매순간에서 어떤 것들을 같이 하지 못한다는 것, 거기에서 오는 결핍이 내게 크다. 그러니까 '그의 성기가 내가 없어서 고통스럽다' 같은 것과는 다르단 말이야. 그의 피부, 라는 것은 은유일까. 내 옆에 누워 있는 그의 존재를 필립은 '그의 피부' 라고 은유한걸까? 내가 느끼는 결핍은 그의 '존재'인데 필립이 느끼는 결핍은 뭐랄까, 피부와 성기인 것 같아, 이 점에 있어서는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말장난 같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육체적 욕망을 느끼는 게 아니라, 육체적 욕망을 느끼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거다. 상대의 내면보다 육체에 더 중점을 두는 느낌.




어쨌든 필립과 토마는 이 사랑이 동성애인 만큼 그들의 비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토마는 항상 언젠가 필립이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들이 살아온 삶도 달랐고 살아가는 삶도 다르며 앞으로 살아갈 방향 역시 다를 것이라는 걸, 토마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토마가 알고 있던 그대로 그들의 삶은 진행된다. 그들은 헤어지고, 서로 다른 삶을 산다.



필립은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고 동성의 애인과 함께 산다. 그러나 토마는 이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는다. 그들은 십대에 사랑하고 헤어져서 서로의 존재를 깊이 서로에게 각인시켰지만, 잊지 못하고 내내 그리워하지만, 그 시절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찾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서로 상대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을 때조차도 그들은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나는 평생 토마에게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p.171)



그리고.



토마도 평생 연락하지 않았다. (p.173)




나는 필립이 토마의 아들을 통해 토마의 전화번호를 받아든 순간, 그리고 토마의 아들이 필립의 전화번호를 가져간 순간, 그들에게 무지개가 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평생을 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결국은 닿아야 하는 게 아닌가. 어째서 나도 당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당신도 내게 연락하지 않는가.


나는 평생 토마에게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토마도 평생 연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단 말인가. 안돼, 무지개가 떠야해, 올리브 키터리지가 그랬던 것처럼, 무지개가 떠야 한다고!




고약한 날들이었다. 잭 케니슨은 전화하지 않았고, 올리브도 전화하지 않았다.

.

.

.

.

그리고 그 때, 마치 무지개처럼 잭 케니슨이 전화를 했다. "내일이면 날이 갠대요. 강변 산책로에서 만날까요?"

"안 될 거 없죠." 올리브가 말했다. "난 여섯지면 집을 나서는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p.469-471)



그러나 '평생 연락하지 않았다'고 하면, 무지개가 뜨지 않았음을 의미하잖아.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러냐고!!! 



연락하지 않음음 무엇을 의미할까. 그들이 서로를 그리워하지 않았음을 의미할까? 아니, 토마는 필립을 그리워했다. 필립의 존재는 찾을 수 있었던 만큼, 공개되어 있던 만큼, 토마는 할 수 있는 최대한 필립을 찾았고, 보았다.




"여러 번 봤어요. 선생님이 어느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예고 방송이 나오면 그 프로그램을 보곤 했어요."

방송이 시작되면 아버지는 조용히 하라고 명령했고, 어머니는 부엌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일을 하러 갔다. 그녀는 소설가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자기를 만나기 전에 남편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아이만 아버지 곁에 남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가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도 그는 남았다. 그는 텔레비전 화면보다 화면을 주시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더 많이 보았다. (p.166-167)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상대의 행방을 좇으면서,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을 감추고 속이며 아내와 아들과 살았다. 그러다 결국 그 역시 폭발하는 순간이 온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이 지점에서 화가 난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는 내내 그는 괴로웠을 것이다. 자신을 속이고 살아오는 동안 그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살고 싶은 삶은 따로 있는데 이렇게 살아야 하는 데서 오는 불행함,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음이 그에게 있었을테니. 그러나 그가 그렇게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삶으로 자신의 삶을 불행으로 모는 동안, 불행속에 살아야 했던 사람은 또 있었다. 그의 아내. 그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동성애자인줄 모르고, 사랑하는 존재가 따로 있는 줄 모르고 남편의 껍데기를 끌어 안고 살아야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을 때 그녀의 허탈함은, 그녀의 절망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보상 받아야 하는가. 젊은 시절을 내도록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살았는데, 그걸 대체 어쩌면 좋은가.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 스스로를 불행으로 끌고가지만, 다른 사람을 같이 엮어서 끌고 가버린다. 그의 아내는 무엇이 잘못인가. 그의 아내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평생을 거짓된 존재와 살아야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로 둔 사람과 살아야 하는 일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대체 그녀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나. 그건 자신을 속인 한 남자가 한 일이다.



토마가 세상을 향해 당당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토마 개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받게될 눈총이 두려웠던 걸 잘못이라고 볼 순 없으니까. 그러나 그가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계속 감춰왔기 때문에 불행해져버린 사람이 그 외에 또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잘못한 게 아닌가. 나는 그의 아내가 살아온 그 부부의 삶이 과연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남게될 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다시 필립과 토마의 사랑으로 돌아와서,

토마는 내내 자신을 속이며 그러나 필립과 살았다. 필립이 나온다는 방송을 다 챙겨보고 관심을 갖고 있는데, 그는 과연 누구랑 살고 있었단 말인가. 책을 전혀 안읽는 사람이지만 필립의 책은 전부 읽으면서, 그렇다면 토마는 과연 누구랑 살았던 건가. 그러나 평생 전화하지 않으면서 이 사랑은 아픔이 되고 비극이 되고 그리고 '기억'이 된다. 기억. 상대를 기억하고, 그 시절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러나 사랑한다면 그것이 기억에서 끝나서는 안되는 게 아닌가. 




시간은 또 흘렀고 그리고 토마의 아들은 비극을 전하기 위해 필립을 찾는다. 



"사실 언젠가 선생님이 한 해의 반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낸다고 한 인터뷰를 봤어요. 그래서 가끔 선생님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LA는 끝이 없어 보일 만큼 엄청나게 큰 도시죠. 선생님이 저보다 더 잘아시겠지만요. 그래도 가끔 우연이라는 게.... 결국 그런 일은 없었지만.....게다가 선생님의 연락처를 몰라서 연락할 수도 없었어요." (p.179-180)



위의 문장은 꽤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때로는 이렇게 무모하게 우연을 기대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몇 해전에 그런 우연을 아주 많이 기대하고 살았더랬다.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그 나라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가면 언젠가는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를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거다. 언젠가 기필코 가리라, 그를 마주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를테야, 나도 그랬던 거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의 무모한 우연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걸까, 그것이 어딘가에 가고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걸까. 




처음, 그만해 거짓말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상상하는 필립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에게 들려주어야 할 말이다. 그만해 거짓말.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고, 사랑을 결국 비극으로 만드는 일이며, 그 비극을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엉뚱하게 전염시키는 일이다. 

이 사람과 있을 때 즐겁다, 행복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의지로 그것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속이면서 죽는 순간까지 후회만 하다 살고가서는 안된다. 그러면 정말 안되는 거다.




필립 베송은 여전히 좋지만, 이제는 예전만큼 좋지는 않다. 그만큼 좋아할 순 없을 것 같다.



나는 자신이 지닌 힘을 휘두르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 P33

그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다고, 절대로, 자기가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엄두를 냈는지 모르겠다고,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어떻게 자기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거기까지 오면서 그가 품었던 모든 의문, 망설임, 부정,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 이견, 그가 벌여야 했던 지극히 내적이고 은밀하며 조용한 갈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 일이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되어버렸으며, 거기에 맞서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P40

그는 더 이상 이 감정을 홀로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너무나 상처가 된다고 했다. - P41

나는 최근 ‘방을 새로 꾸미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옛날 물건을 버리기‘로 작정한 엄마의 뜻에 따라 내 방 책상에 남아 있던 물건을 정리하던 중, 두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하나는 중학교 일학년 때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칼로레아를 치르던 해 여름에 찍은 것이었다. 차이가 엄청났다. 결코 같은 소년이 아니었다. 첫 번재 사진에서는 위축되어 있었고 축 처진 어깨에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두 번째 사진에서는 웃고 있었으며 피부는 햇빛을 머금고 잇었다. 물론 각기 다른 상황이 미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변신의 이유가 비밀스러운 사랑에 있다고 믿는다. - P96

그동안 함께 있는 모습을 남들 앞에서 드러낼 수 없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남들 앞에서 서로 모르는 사이인 척 해야 하는 이 상황으로 인해 나는 더욱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의 행복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미칠 듯함. 참 가엾게 들리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은 그럴 권리가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절제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더 행복해졌고, 더 의기양양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금지 때문에 더욱 위축되고 억눌렸다. - P114

내 경우, 마침내 이별을 실감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괴로움, 고통 그 자체였다. 나는 늘 내가 더 고통스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괴로워할 것이라고.
우리는 가끔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있다. - P130

"우리, 그러니까 네 아버지와 나는 그때 연락이 끊겼지."
나는 아무 감정도 싣지 않고 마지막 단어들을 강조했다.
마치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단순히 그런 것이라고 말하듯이. 삶이란 함께 어울려 지내다가 멀어지고 그렇게 계속 사는 것이라고.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힘겨운 이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괴로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결별도 없다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자신을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후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 P148

나는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표현할 단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 말들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말(馬)이 장애물을 거부하듯, 우리는 상처 주는 말(言)을 거부할 수 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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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04-2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콜미바이유어네임 원작 소설 그해 여름 손님 읽는 중인데 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ㅋㅋㅋ 뭔가 제 머릿속(?)으로만 야하지 이입(?)이 안되더라고요ㅋㅋㅋ (앍 이게 뭔말이얔ㅋㅋㅋ) 뭐 등장인물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거지만ㅋㅋㅋ 요즘은 이입이 되는(?) 아름다운 야한 소설 읽고 싶어요!! ㅋㅋㅋ

다락방 2019-04-22 16:25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책 읽으려고 샀는데 사고나서 영화를 봤거든요. 그랬더니 책을 안읽게 돼요. 전 그 영화가 썩 마음에 들질 않아서.. 하하.
이입이 되는 아름다운 야한 소설... 이라. 저는 ‘아름다운‘ 이란 수식어를 뺀다면 [낯선 살냄새] 나 [잘생긴 개자식]을 추천합니다. 자꾸 여자주인공 팬티 찢는 남자주인공이 나와요. 쿨럭.

clavis 2019-04-2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너무나 기쁘고 고맙습니다. 저의 부탁을 들어주셔서요..저도 불편해지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고 삽니다. 진솔한 인간이 되는 것을 고민하게 되네요. 책은 정말 좋지 않나요?락방님♥리뷰도 책도 사랑도 만세입니다

다락방 2019-04-22 16:26   좋아요 1 | URL
불편해지기 싫어 하는 거짓말이 결국은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것이 궁극적으로 가장 행복해지는 길인 것 같습니다.

책 정말 좋지요, 클래비스님. 책도 좋고 글 쓰는 것도 좋고 이렇게 책으로 엮이는 인연도 좋습니다! 만세!

얼룩말 2019-04-22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다락방 2019-04-22 16:27   좋아요 0 | URL
네, 이 책 괜찮아요. 저는 필립 베송이라 믿고 봤습니다. 이제는 예전만큼 좋진 않지만 말이지요...

clavis 2019-04-2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에게 솔직해지자고, 오늘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언제나 품위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렇게 하는 데에 락방님의 글은 참 많은 도움을 줍니다. 려성동지로서도요♡♡

clavis 2019-04-2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농심 멸치 칼국수 먹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 마지막 방학이라 학교가 쉬어서 하루 종일 문 닫아 걸고 연습 중이어서 출출했다는 말을 길게 변명은 아니고, 국물은 너무나 시원하고, 강추를 해 드리면서...락방님 음식 얘기도 너무나 맛깔지고 좋아하는데 제가 블로그 주소를 잃어버려서ㅠㅠ혹시 다시 한 번 알 수는 없을까요? 팬심을 잃은 건 아닙니다. 아니구요..ㅠㅠ)

2019-04-22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19-04-22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웅꺄웅 완전 사뢍합니다 락방님♡♡
 
큰 가슴의 발레리나
베로니크 셀 지음, 김정란 옮김 / 문학세계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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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젖가슴을 가지기로 선택한 적이 없다. 그것은 유전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그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p.275)



요가를 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나는 여전히 요가를 못하는 사람이다. 동작들이 안될 때면 나는 그 동작이 왜 안되는지 알고 싶어 생각하고 분석하려하고 또 질문한다. 선생님, 저 이 동작 왜 안될까요, 근육이 짧은 걸까요, 살이 많아서일까요? 어깨가 굽어서일까요? 계속 시도하면 나아질까요? 나는 끊임없이 묻고 들여다보며 문제점을 찾아내고 싶다. 개선하고 싶다면 원인을 분석하는 게 먼저이니까. 어쩌면 이런 나의 성격 때문인지 한 요가선생님은 내게 좀 더 깊은 수련인 지도자교육을 받아보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다. 이렇게나 요가를 못하는데 그런 제안이라니, 선생님 왜 그러세요.. 나는 당연히 거절을 하고 돌아섰다.


이만큼 살아오며 굳어버린 몸, 굳어버린 근육이 내가 요가를 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나는 틈틈이 내 두꺼운 허벅지가, 배가, 그리고 큰 가슴이 요가를 잘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가슴은 내 몸을 굳게 만들고 휘어지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고, 그리고 요가를 못하게 만든다. 인스타그램에서 요가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다보면 힘있게 가벼운 몸짓에 늘 감탄하곤 하는데, 그들은 아무도 큰 가슴을 가지지 않았다. 어쩌면 큰 가슴을 가지고서는 요가를 잘 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어차피 나는 여기까지구나, 절망하다가 어떤 날에는 큰 가슴으로 요가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보이겠다!고 의욕이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의 나는 이렇게 가슴이 크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요가를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엊그제 요가를 하면서 선생님이 말하는 동작이 되지 않아 꽤 스트레스를 받았다. 돌아보니 다른 회원들은 다 하고 있는데 또 나만 안돼. 분명 이들중에는 나보다 요가를 늦게 시작하고 요가를 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텐데, 왜 그보다 더 오랜시간 요가하는 나는 이 동작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가...절망하다가, 수업이 끝난 후 주저앉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가진 큰 덩치가, 무엇보다 큰 가슴이 요가를 잘하고자 하는 나를 막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가슴이 큰 건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데, 그걸 요가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건 가지고 태어난거잖아요. 큰 가슴으로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그래서 몸도 굳었을텐데, 오히려 그런 몸을 더 잘 보살펴줘야죠. 이만큼 고생했을 내 몸에 감사하며 더 보살펴주세요. 그리고 내가 가진 몸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는 게 중요해요. 요가를 잘한다는 건 아사나(자세)를 잘 취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최선을 다한다는 걸 의미해요."



그러고보니 최근에 그동안 사용해온 몸에 감사하라는 말을 여동생에게도 들었었는데, 이렇게 요가 선생님으로부터 듣는다. 그러고보니 내가 이렇게 태어난 내 몸에 대해서 나는 감사하기는 커녕 '요가하는데 방해가 되네' 라고 생각했네. 아, 나 너무 나쁘다. 선생님의 조언은 적절했고 또 감사했다. 그래, 내가 뭘 더 얼마나 하겠다고 이런 내 가슴을 원망했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지.




이 책의 주인공 바르브린은 발레에 천재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일류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이미 유명해진 천재적인 발레리노와 섹스도 한다. 재능도 전염이 될테니까.



우리는 얼이 빠져서 비틀거리며 파티장을 나왔다. 여주인은 우리가 취했다는 사실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가 온전히 그녀에게 속해 있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런던 시티 발레단의 무용수인 카티아의 오빠와 그것을 했다. 그녀는 재능이란 전염성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p.103)



바르브린 역시 자신의 큰 가슴이 발레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남자들은 바르브린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바르브린의 가슴을 사랑한다. 바르브린의 큰 가슴은 발레를 하는데도 방해가 되지만, 온전히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데도 방해가 된다.




이별은 깔끔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러 차례 화해했다. 그러나 짧은 이별이 이어지면서, 나는 올리비에의 나에 대한 사랑이 허약하고, 부실하고, 불안하고 불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뿐, 재능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가 나의 가슴을 바라볼 때마다, 그것들을 수첩에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는 분홍색 살로 이루어진 두 개의 포장 팩으로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그럴 때마다 그의 뺨을 갈기고 싶다. 나는 어느 날 그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는 테이블에서 내 가슴에 대해 말하게 될까 봐 두렵다. (p.125)



이 방해가 되는 큰 가슴을 그녀는 없애버리기로 한다. 그녀는 그렇게 가슴 절제수술을 받지만, 결국 그녀가 더이상 발레를 할 수 없게된 건, 임신과 출산이었다. 그녀가 임신하는 동안 그녀의 파트너는 춤으로 계속 캐스팅되고 있었고, 그녀가 출산하고나자 출산 동안 그녀의 옆에 '없었던' 아이의 아빠는 '사실은 남자를 좋아해' 라고 고백한다.


네? 



그러면 바르브린을 왜... 임신시켰어 이 개놈아.




잘라낸 가슴은 '다시' 자란다. 게다가 이제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남자를 좋아한다. 자, 그러면 그녀가 이제 무너지는 길만 남았을까? 아니.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안고 그리고 그간 자신이 읽어왔던 발레리나의 생애들을 통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녀는 그 다른 방법으로 인생을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게 될 것이다. 그녀야말로 다시 자라나는 가슴을 방해물로 생각하는걸 그만두고, 순전히 자신이 가진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다.




여성의 가슴은 마치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성적 대상화된 여자들은 항상 큰 가슴을 가진 이미지로 그려지고 다뤄진다. 큰 가슴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에게 그저 가슴 하나만으로 희롱의 대상이 된 적도 여러번이었다. 내가 내 가슴을 요가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건, 사실 그보다 앞서 내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게 컸기 때문이겠구나, 이 책을 다시 훑어보다 생각했다. 어떻게든 가슴이 작아보였으면 좋겠다고 움츠렸던 삶은, 큰 가슴이 드러나서 희롱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원햇던 거였다. '나'보다 '가슴'이 먼저 보이는 걸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여자들 조차도 가슴이 커서 남자들이 좋아하겠다는 말들을 하곤 했다. 내 가슴은 그렇게 남자들이 좋아하라고 만들어진 걸까, 그래서 행운인걸까?


나는 힘들었다. 나는 내 큰 가슴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깨를 움츠리며 살아온 삶도 힘들었고, 이 무거운 걸 이고 살아가는 삶도 힘겨웠다. 길을 걷다가 감추는 기색도 없이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소름끼치게 싫었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내 앞에서 내 가슴만 보지? 그렇게 내 큰 가슴은 차곡차곡 내 인생의 방해물이란 존재로 내게 쌓여갔다. 그러다가 요가를 만나 이 마음이 폭발한 것 같다. 이건 좋은게 하나도 없어, 이렇게도 저렇게도 방해가 되더니, 요가할 때도 이모양이야!



그러나 이건 내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다. 게다가 남자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결국 바르브린에게 두 가슴이 지워지듯이, 나도 내 가슴을 지워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거기에 있으되, 그것이 내게 방해요인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 내가 지금의 나로서 살아가는 데, 큰 영향력으로 나를 휘두르지 않을 수 있을 것. 그러고보면 너무 많이 가슴에 휘둘려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바르브린에게 다시 가슴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이제 그 전의 의미와 달라졌으니, 나 역시 휘둘리지 않고 요가 선생님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젖가슴이 나의 비극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돈 때문에 쪼들리는 형편이었으므로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나는 바디페인팅 화가인 알리시아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기로 한다. 당시의 나에게는 엄청나 보이는 금액을 받기로 한다. 알리시아는 예술과 돈과 여성 육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예술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빌리지 미술가들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누드는 질문을 던진다. 어떤 미술가들은 알리시아처럼 플라워 파워 시대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주장되는 육체는 여성들을 종속시키고 그녀들의 신체 구조에 투기하는 우회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현대미술가들 중에서 여성 미술가의 비율은 4%에 불과하다. 그런데 전시되어 있는 누드 작품의 85%가 여성이다. 여성들은 벌거벗고 포즈를 취하기에는 충분히 훌륭하지만, 큐레이터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히 화가가 아니기라도 하단 말인가? - P190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꼼짝도 못하고 서 있다. 한 남자가 아기를 DHL 상자처럼 들고 서 있다. 그녀는 그가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통계에 따라, 아버지 둘 중 하나는 신통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여성들이 무능력한 아버지의 불확실한 도움에 기대느니 차라리 혼자서 해나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간호사의 눈에서 읽을 수 있다. 그녀는 공유된 무책임함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 P248

여성의 육체적 조건을 상징하는 젖가슴은 여성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 한 쌍의 젖가슴은 그들의 주인인 바르브린이 자기들 때문에 겪게 되는 비극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그들은 자기 발현만 사납게 추구한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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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해 거짓말
필립 베송 지음, 김유빈 옮김 / 니케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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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필립_베송, 당신은 정말!
이사람이다, 이 사람과 있을 때 나는 행복하다, 라고 생각한다면, 숨지도 말고 감추지도 말고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의 남은 시간을 후회로 보내다 죽을 수는 없잖아.
이 책의 헌사는 스포일러. 그렇다고 감정이 덜해지지 않는다.
이 책의 리뷰를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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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9-04-2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 주세요ㅠㅠ흙흙

다락방 2019-04-21 15:06   좋아요 1 | URL
썼습니다! ㅋㅋㅋㅋㅋ

clavis 2019-04-21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ㄲ ㅑ♡락방님 쵝오!!!
 
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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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불안한 나날들.
나는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걸까, 그 시간들을 다 거쳐온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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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
    from 마지막 키스 2019-04-18 09:33 
    그때 내가 몇 살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이십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잘 따져보면 몇 살이었는지 나오겠지만 어쨌든 대략 이십대 후반쯤. 그 때 혼자 좋아하던 남자가 있었다. 나보다 몇 살 많았는데(기억이 안나네 젠장 ㅋㅋㅋㅋㅋ 세살이었나 네살이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꽤 친했고 매일 연락했고 자주 만났다. 추운 겨울에는 내 손을 자기 주머니에 가져가 넣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 남자가 너무 좋아서 가슴속에 막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