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동안 흥미로운 경험을 해왔는데, 내가 의견을 내놓으면 세상 사람들 중 일부가, 특히 남자들이, 내 의견은 틀렸고 자신들의 의견은 옳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내게 반응하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의견은 망상이지만 자신들의 의견은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가끔 자신들이 사실뿐 아니라 나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의 의견을 사실로 착각하는 사람이 심지어 스스로를 신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진리는 아니다.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건 그가 세상에는 자신과 다른 경험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역시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 의식이라는 더없이 흥미롭고 심란한 현상은 남들의 머릿속에서도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p.240-241)


















'리베카 솔닛'의 s《The Mother Of All Questions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새해 읽기 시작한 첫 책이었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시작한 책. 이 당시에 내 기분은 좋지 않았었는데, 리베카 솔닛의 지적인 문장들을 읽노라니 마음이 가만, 고요해지는 것이었다. 차분해지게 되었달까.


흥분에 대해 생각했다. 기쁨과 슬픔 혹은 분노, 그 한가운데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떠한 말을 하는지 혹은 어떠한 글을 쓰는지 하는 것들을. 그럴 경우에 나는 후회할 말을 하거나 글을 쓴 적이 있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아,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말자, 거기에서 비켜나게 됐을 때, 그 때 하자'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다'라는 말을 진짜 졸라 많이 들어가지고, 나 역시 그런줄로만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날까지 살아보고 숱한 남자들과 숱한 여자들을 만나보니까, 감정적인게 여자의 특징이 아니란 걸 확실히 알겠더라. 감정적인 건 모두 그랬고 이성적인것 역시 모두 그랬다. 다만, 타인의 일이냐 내 일이냐로 판가름나는 것이었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에는 '냉정해져라, 객관적이 되어라' 하고 한 발 물러서서 선비인 척 졸 조언(같은 잔소리)할 수 있지만, 자기 일이 되었을 때는 물어뜯어버리고 발악을 하는 거다. 특히나 페미니즘에 대해서라면 아주 남자들이 난리가 났다. '야, 논리 가져와서 대응해' 라고 말하는 그 말들과 글들에는, 논리나 이성이 있는게 아니라 '나 기분 나빠'만이 가득했다. 자기가 기분 나빠 빡치고 화나 가서 주절거리고서는, 자기들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자기들이 논리로 무장한 줄 알더라. 논리 가져와는 개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화가 난다는 것, 그래서 분노의 글을 쓴다는 것, 거기에는 가장 앞서 '감정'이 존재했다. 감정이 있는 게 나쁜 게 아니고, 그것이 틀린 게 아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감정이 작용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 감정적이란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한다는 데 있었다. 인간에겐 감정이 있으니 그 감정이 작용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어쨌든, 나로 놓고보면, 나 역시 감정에 많이 영향을 받는 사람이고, 감정의 소용돌이에 있을 때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가만 기다린다. 가만 기다리는 게 씅에 안찰때는, 그 시간이 지나가도록 도와줄 다른 것들을 찾는다. 그럴 때, 책이 도움이 된다. 특히나 지적인 사람의 글. 리베카 솔닛이 도움이 됐다. 나는 가만, 차분해질 수 있었다. 내 감정을 조금 가라앉혀야 했을 때, 리베카 솔닛의 지적인 글은 정말 큰 도움이 된거다. 새삼, 아, 똑똑한 여자들의 글은 얼마나 좋은가! 감탄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도.



나는 피임을 아주 잘한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모나 고모가 되는 걸 좋아하지만 또한 고독을 사랑한다. 불행하고 불친절한 사람들 손에서 자랐기에, 그들의 양육방식을 되풀이하고 싶은 생각도, 내가 이따금 나를 낳은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나에게 느낄지도 모르는 인간을 탄생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지구는 제1세계 인구를 지금보다 더 많이 부양할 수 없는 형편이고 미래는 몹시 불확실하다. 그리고 나는 책을 쓰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내가 작업하는 방식대로라면 이것은 퍽 버거운 작업이다. 내가 아이를 절대로 갖지 말아야지 하고 원칙을 세운 건 아니었다. 상황이 달랐더라면 아이를 가졌을 수도 있고 만일 그랬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지금 좋은 것처럼. (p.17)



나 역시 내가 이모인 것에 큰 행복을 느낀다. 이모인 게 너무 좋아서, 내가 내 여동생을 이모로 만들어주지 못한 게 미안할 정도다. 조카를 가진다는 게 이렇게 큰 기쁨인데, 내가 이 기쁨을 동생아, 너에게 주지 못했네, 하고 나 스스로 미안해하는 거다. 그런 한편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육아에 따른 그 모든것들을 어떻게 해나갈 수 있을지 암담하다. 물론, 그일이 내게 실제로 닥친다면, 나는 어쩌면 최선을 다해 또 그 일을 잘해낼지도 모른다. 나처럼 좋은 날씨, 겨울의 냄새, 따뜻한 햇볕 같은 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이유를 찾는 사람이라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그 과정에서 수만개의 기쁨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도 행복할 이유를 잘도 찾아내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나는 현재 지금은 지금으로 좋다. 지금의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리베카 솔닛이 말한대로,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아마 거기에서는 또 거기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이민을 가고 싶다고 말한 나에게 엄마는 '식구들 두고 어딜가냐'고 말하는 대신, '너 가고 싶은대로 가서 살아라, 너라면 어디서든 잘 살거다' 라고 해주셨더랬다. 엄마 말이 맞을 것이다.



행복에 대한 질문은 보통 우리가 행복한 삶이 어떤 모양인지를 안다고 가정한다. 행복은 종종 멋지고 사랑스러운 것들이-배우자, 자식, 사유재산, 에로틱한 경험-줄줄이 늘어선 결과로 묘사되지만, 잠깐만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저것들을 다 갖고도 여전히 비참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오른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행복의 프리 사이즈 공식을 제공하지만, 그런 공식은 자주 그리고 철저히 실패한다. 그래도 세상은 우리에게 다시 그것을 떠안긴다. 그러고도 다시, 또다시. 그런 공식은 감옥이자 처벌이다. 그 상상력의 감옥은 세상이 제공한 처방을 정확하게 따랐는데도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처지에 많은 사람을 잡아 가둔다.
이 문제는 문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해 단 하나의 줄거리만을 들려준다. 그 줄거리를 좇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적잖은 수는 결국 나쁜 삶을 살게 되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행복한 결말을 가진 하나의 좋은 플롯만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삶이란 사실 우리 주변 사방에서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꽃을 피울 수-그리고 시들 수- 있다.
설령 그 익숙한 줄거리를 최선으로 살아내는 사람이라도 그 결과로 얻는 것이 행복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애정 어린 결혼 생활을 70년 동안 해왔다. 그녀는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의미 있고 긴 삶을 살았고, 자손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말하진 못할 것 같다. 그녀는 약자들에 대한 연민과 미래에 대한 근심이 워낙 깊은 나머지 울적한 세계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행복 대신 얻은 게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면, 우리에게는 더 나은 언어가 필요하다. 좋은 삶의 기준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더 중요하게 느겨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혹은 만족, 명예, 의미, 깊이, 몰입, 희망을 얻는 것. (p.20-21)



고미숙 쌤의 책,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를 몇 장 읽었다. 쌤의 사주에는 아이나 재물이 없고 공부만이 있다고 했다. 평생 공부하고 살거라고. 다른 사람이 공부하고 살 운명이라는데, 내가 왜 신나는지 모르겠다. 으앗, 공부하는 삶을 사는 여자사람이 여기에 있다! 하고 혼자 그 부분 읽는데 씐났다. 그러자 갑자기 사주를 보고 싶어졌다. 나도 사주보러 갔는데 쌤이 '락방 씨는 공부만 할 팔자예요' 라고 말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거다. 아하하하하. 나도 그렇게 공부만 하는 삶을 살고 싶어...그렇지만 그러기엔 내가 세상의 모든 속된 것들을 사랑하지. 돈, 술, 그리고 '어떤' 남자들... 내가 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본주의에 얼마나 철저히 물들어있는지를 깨달을 때마다 '아 나는 너무나 속되고 속되도다' 하고 자책하지만, 그래봤자 또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출근하는 직딩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난 금요일에는 엄마랑 남동생과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랑 와인을 먹었어. 엄마는 연신 '여기 비싸다 다신 오지 말자, 너무 비싸다' 하셨지만, '엄마, 내가 아니면 엄마가 여길 누구랑 와?' 했더니, 엄마가 '그건 그래' 라고 하셨다. 내가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사주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나. 그것이 인생 최대 가치나 목표 같은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엄마에게 스테이크를 사주는 건, 내가 매일 아침 비루한 육신을 이끌고 출근하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지난 토요일에 친구를 만나서 영화를 보기 위해 외출을 하는데, 지하철 표 끊는 곳에서 한 젊은 여자사람이 5-6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랑 함께 지하철을 타려고 표를 대고 개찰구를 지나고 있었다. 유모차도 끌고 있었다. 어휴, 저 외출 힘들겠구나, 했는데, 어린이대공원 가는 방향을 찾고 있더라. 혼자 서서 궁금해하고 있는데 내가 가서 그냥 이쪽이에요, 하고 방향을 알려줬다. 그랬더니 고맙다며 아이랑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데, 혼자서 유모차랑 아이를 다 케어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제가 아이손 잡고 갈까요' 물었더니, '아니예요, 얘는 무서워해서 제가 안고 가야해요' 하고는 아이를 번쩍 안아드는 거다. 에스컬레이터는 한 명만 서서 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고, 그냥 보기에도 아이를 안고 유모차까지 끌고 갈 순 없을 것 같아, '그러면 유모차를 제가 가져갈게요' 하고는 유모차를 내가 끌고 에스컬레이터에 먼저 탔다. 그 분은 연신 뒤에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시면서, 자신의 아이에게 '우릴 도와주시는 거야' 하고 말씀하셨다. 유모차가 좀 커서..  밑에 있던 내가...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몰라 약간 당황했는데, 유모차에 깔리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이렇게이렇게 해가지고 어쨌든 무사히 내려왔는데, 뒤에서 아이 어머님이 괜찮으시냐고 물으셨어 ㅋㅋㅋㅋㅋㅋ죄송해요 제가 경험이 미천하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다 내려오면서, '아니 혼자서 어떻게 여길 가려고 하셨어요' 물으니, '아이 내려놓고 다시 올라가서 가져오려고 했어요' 하시는 거다. 아이고 벅차기도 하지 ㅠㅠ 아이 엄마들 다니시기 넘나 힘들겠구먼 ㅠㅠ. 다 내려와서도 계속 "선생님 감사합니다" 인사하셨어. 힝 ㅠㅠ


그래도 여긴 에스컬레이터였지, 지난번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이었나, 거기서는 앞에 계단만 있는데 한 어머니가 아이손 붙잡고 유모차 한 손에 들고 올라가려 하시더라 ㅠㅠ. 유모차 제가 들어드릴게요, 하고 그 유모차 내가 들고 계단 올랐다. 아니, 이놈의 지하철역은 이렇게 계단 겁나 많으면 어떡하라는거야. 노인은 노인대로 힘들고 아이 엄마는 아이 엄마대로 힘들잖아 ㅠㅠ 이건 무슨 방법이 없나?



아무튼 나는 공부하는 삶을 살아야겠어...

리베카 솔닛을 읽고 또 고미숙을 읽으면서, 아, 나는 계속,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 그 안에서 말을 내뱉기 보다는, 거기에서 비껴나있을 때, 그럴 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또한, 내 감정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리베카 솔닛을 읽으며 차분해지는 나를 보는 건, 정말 좋았어. 지적인 글을 읽는 건 정말 큰 기쁨이고요 ㅠㅠ






사랑은 끊임없는 타협, 끊임없는 대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절당하고 버려질 위험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사랑은 얻을 순 있지만 강탈할 순 없다. 사랑은 내가 모조리 통제할 수는 없는 영역이다. 상대에게도 권리와 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협동하는 과정이고, 최선의 경우에 그 타협들이 즐거운 놀이가 되는 과정이다.(p.58)



위에 인용한 58쪽의 저 부분을 읽다가, 내가 그간 얼마나 사랑을 '잘'해왔었는지를 알게됐다. 나는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거절당하고 버려질 위험에 나를 열었다. 그랬었다.



그랬었고, 어쨌든,

자, 나는 지적인 글들을 읽는 사람이 될게.



우리는 스타크의 관점을 더 확장하여, 여성이 겪는 다양한 형태의 공격을-친밀한 파트너뿐 아니라 낯선 사람이나 아는 사람이, 정치인이나 국가가 가하는 공격까지-모두 강압적 통제로 봐도 좋을 것이다. 생식권에 대한 쉼 없는 공격은-낙태뿐 아니라 피임, 가족계획, 성교육에 대한 접근성까지 겨냥한다- 강압적 통제를 제도로 수행하려는 시도다. 폭력도 가끔 관여하지만, 강아브이 수단은 그밖에도 많다. 징벌적이고 여성의 권리를 부정하는 법률을 만드는 것도 한 수단이다. 쉽게 눈치챌 수 있듯이, 태아를 품은 여성의 권리보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권리에 집중하는 척하는 버률은 사실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과 국가의 권리에 집중하는 법률이다. 역시 쉽게 눈치챌 수 있듯이, 피임과 낙태를 금지하려는 시도는 사실 여성의 자율성, 주체성, 섹스의 의미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 자기 몸을 통제할 권리, 어머니됨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짊어지지 않은 채 쾌락과 유대를 추구할 권리, 달리 말해 자기 방식대로 어머니됨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공격이다. (p,63)

이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에 따르면, 성폭행을 신고하는 여자들은 이타적 이유에서 그러는 경우가 많다. 즉, 딴 사람에게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을 지지하기 위해 뒤이어 나설 때도 있다. 요컨대, 입을 여는 것은 종종 감정이입 행위다.
모리스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강간이 트라우마의 가장 흔하고 심각한 형태인데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연구는 대부분 전쟁 트라우마와 퇴역 군인을 대상으로 수행된다. PTST 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남자들을 연구해서 얻은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고통을 겪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한 침묵도 존재하고, 그 치묵이 여성을 더욱 침묵 시킨다는 것이다. 침묵은 침묵 위에 건설되고, 침묵의 도시는 이야기들과 전쟁을 벌인다. (P.69-70)

학대와 괴롭힘에 관한 한가지 심란한 특징은 사람들이 그런 범죄가 아니라 범죄에 대한 증언을 배신 행위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런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학대자는 종종 피학대자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특권, 보호가 상호적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특권을 누린다. 제3자들은 종종 피해자를 가해자의 경력과 가정을 망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묘사함으로써 그런 상황을 강제한다. 폭행범이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라는 듯이. (p.74)

많은 공동체에는 그런 여자들이 갈 곳, 비밀 피난처, 여성 쉼터가 있다. 파트너의 폭력 때문에 제 집을 잃고 말 그대로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은 여자들이 그 속으로 사라진다. 많은 여자가 제 나라에서 난민으로 산다. 제 집과 삶에서 사라져서 비밀스런 장소에서 비밀스런 삶을 새로 얻는다. "매 맞는 여성 쉼터"라고 불렸던 은신처들은 1970년대부터 생겨났다. 지금은 북미와 영국에 수천곳이 있지만, 모든 가정폭력 피해자를 수용하지는 못한다. (p.78)

헤밍웨이가 F.스콧 피츠제럴드의 성기 크기에 대해서 했던 쓰레기 같은 소리는 딱할 뿐 아니라 그의 내면을 너무 투명하게 보여준다.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보다 훨신 성공한 작가였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보다 훨씬 낫다. 레고 블럭 같은 헤밍웨이의 문장에 비해 피츠제럴드의 문장은 실크처럼 나긋하며, 피츠제럴드는 남성 인물뿐 아니라 데이지 뷰캐넌이나 니콜 드라이버 같은 여성인물에게도 자유자재로 감정이입할 줄 안다(『밤은 부드러워』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근친상간과 아동학대가 미치는 장지걱 영향을 탐구한 작품으로도 읽을 수 있다). (p.234-235)

만화 『딜버트』의 작가 스콧 애덤스Scott Adams 는 최근 우리가 가모장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섹스에 대한 접근성을 여자가 엄격히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상대가 당신과 섹스하기를 원하지 않는한 당신은 그와 섹스할 수 없다는 뜻인데, 여기서 젠더 대명사를 빼고 말해보면 완벽하게 합리적인 소리로 들린다. 상대가 당신과 자기 샌드위치를 나눠 먹기를 원하지 않는한 당신은 그의 샌드위치를 먹을 수 없다. 이건 당연한 소리고, 억압이 아니다. 이런 건 다들 유치원에서 배우지 않았던가. (p.251)

(영화 《자이언트》에서)허드슨이 관계의 충격을 감당하는 모습을-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 것 같고,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사랑하는 사람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닫는 모습을-지켜보노라면 절로 숙연해진다. 그리고 그는 그 연기를 잘해낸다. 크고 매끄러운 석판 같은 그 얼굴에 복잡한 감정들이 스치는 모습은 구름과 비바람이 초원을 스치는 모습 같다. "내가 당신과 결혼할 때 거만하고 불쾌한 여자였다는 건 당신도 알았죠." 레슬리는 또 한번 규칙을 깨고 남편과 그 동무들, 즉 텍사스 평원의 유력 브로커들과 선거 해결사들의 정치 토론에 참견한 다음 날 아침에 이렇게 말한다. 관계를 맺는 것, 결혼,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는 많고많으며, 사랑에서 빠져 나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도 얼마간 있지만, 사랑을 오랜 세월 지속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들은 다투고, 화해하고, 참고, 적응하고, 자식을 낳는다. (p.28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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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8-01-08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이고 다정하며 친절하신 다락방님 사랑합니다 ^^ 다락방님의 공부하는 삶을 응원해요!

다락방 2018-01-08 14:52   좋아요 0 | URL
아웅 넘나 좋으네요.
사랑해주셔서, 사랑한다고 표현해주셔서 넘나 감사해요.
jsshin님 진짜 넘나 좋은분이십니다. ㅋㅋㅋㅋㅋ
우리 함께 열심히 공부하는 삶을 살아요! >.<

비연 2018-01-08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끊임없는 타협, 끊임없는 대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절당하고 버려질 위험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사랑은 얻을 순 있지만 강탈할 순 없다. 사랑은 내가 모조리 통제할 수는 없는 영역이다. 상대에게도 권리와 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협동하는 과정이고, 최선의 경우에 그 타협들이 즐거운 놀이가 되는 과정이다.(p.58) ... 이 부분 저도 밑줄 쫘악... 그어 놓았네요 ^^

다락방 2018-01-08 14:53   좋아요 0 | URL
네, 사랑은 그저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지속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이 들면서 그걸 알게 됐죠. 사랑은 용기이며 실천인거예요. 우리가 이 책을 같이 읽고 또 같은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니, 좋으네요, 비연님!
:)

나와같다면 2018-01-08 2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은 참 따뜻한 분인것 같아요

다락방 2018-01-08 23:44   좋아요 1 | URL
저는 쿨싴한 여자입니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18-01-0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모차 끄는 여성분 도와주신 다락방님께 저도 감사하네요~ 인도는 울퉁불퉁하고 좁지(자전거도로로 다니고 싶은데 위험하죠..), 어디 좀 들어가보려 하면 턱이 걸리고 문은 무겁지, 엘레베이터 찾기는 힘들지, 백화점 유모차전용 엘레베이터에는 유모차 없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어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 유모차 끌고 화장실 가려면 장애인화장실 찾아가야 하지.. 휴.. 그렇습니다.

다락방 2018-01-10 08:11   좋아요 0 | URL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려면 아이를 낳아 기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요? 대중교통 타고 다니는 아이엄마들 볼 때마다 너무 힘들어 보여요. 아이들이 진짜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데리고 걷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잖아요. 제가 조카들이 있고 또 조카들과 외출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언제부턴가 너무 잘 보이더라고요. 아기 데리고 외출하는 엄마들이 말예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