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부의 여성학 수업 시간, 피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여자였고, 유학생이었다.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 분통을 터뜨리며 이렇게 질문했다. "대체 왜 한국 남자들은 콘돔을 쓰지 않는 거죠?" 그 이야기를 들은 미국, 일본, 영국 등지에서 살다 온 학생들이 입을 모아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한국 남자들의 문제가 유학생들 사이에서 종종 화제가 된다고 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 남자들이 하도 사정하고 회유하고 설득하기에 한두 번 콘돔 없이 섹스를 했는데 임신이 되어서 고통을 겪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며 분개했다. 만약 자국의 남성이 그러자고 했으면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텐데, 한국 남자들이 너무 자신만만한 태도로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뭔가 신비한 아시아적 '비기(秘器)'라도 있나 싶어서 넘어가버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 남자에 대한 성토장처럼 되어버린 수업 시간에서는 뒤이어 한국의 '어메이징'한 성 산업에 대한 증언들이 속출했고, 소수를 제외하고는 한국 남자는 대체로 매너가 없다는 불평도 이어졌다. 한국 남성은 자신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으면서도 고압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으며, 한국 드라마와 방송에서 보여지는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며 분개했다. 원하는 것(주로 섹스다)을 얻기 위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집요하게 굴다가, 끝내 얻지 못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며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사례는 너무 많아서 학생들을 잠시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권김현영,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 p.68-69)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남자에 대한 불만은 나 역시 주변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데, 아주 구질구질해 미치겠다. 그래놓고 낙태수술 하러 산부인과에 갈 때는 마치 여자 혼자의 문제인것처럼 나몰라라 하는 놈들도 여럿 봤다. 어릴 적에 친구가 낙태수술 하는 산부인과에 같이간 적이 있었는데, 임신시킨 남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때는 어려서 '남자들은 임신 시켜놓고 낙태수술 할 때 안나타나는 것들, 돈이나 주면 다행이다' 라고 생각이 자연스레 박혀있었는데, 그게 얼마만큼 치졸한 짓인지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십대 중반에 나도 콘돔 없는 섹스를 했었으니까. 시간이 지나 그때를 돌이켜보면 진짜 등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겁도 없이 어떻게 콘돔 없는 섹스를 했을까. 임신이라도 했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나는 왜 그때 남자친구에게 콘돔을 사용하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그때의 내가 너무 수치스러워서 땅을 파고 숨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삼십대 이후의 연애부터는 달랐다. 그 후의 남자친구들은 당연하다는 듯 콘돔을 준비했다. 내가 먼저 콘돔 착용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저들이 먼저 알아서 착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게도 당연한 일이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연한 일인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다는 걸 주변의 많은 여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알게됐다. 아직도, 여전히,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남자, 콘돔 사용을 하려하지 않는 남자들이 섹스를 하자고 덤벼든다고 했다. 여자가 몇 번이나 요구해야만 마지 못해 착용하려고 한다는 것. 역시 임신은 남녀 랜덤이어야 해.... 지들이 임신과 출산을 맞닥뜨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지들이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 진짜 콘돔 없이 하겠다고 빽빽거리지는 못할텐데...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남자들을 만났음에도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는 걸 알게 됐다. 얼마전에 만난 친구는 매너 좋은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매너와 예의가 기본적으로 장착되어야만 사귈 수 있는 사람인데, 그래서 그런 남자들만 만났었는데, 이게... 그렇게나 드문거였구나. 어떤 여자들은 매너 좋은 남자를 만나본 적 없는 상태로 살고 있었어.... 그러고보면 위의 인용문에서 다른 나라 여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소수를 제외하고는 한국남자들은 대체로 매너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나는 그 소수들만 만나서 사귄것이었어... 매일매일 새롭게 깨닫는다. 알면알수록 싫어지고..... 대체로 매너가 없는 새끼들.....
영화 블루 발렌타인에서 여자는 대학생이고, 같은 학교의 남학생과 사귀고 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남학생이 충동적으로 여자와 학교 내에서 섹스를 하려고 하는 거다. 갑작스레 이루어진 섹스라 콘돔이 없었고, 이에 여자는 '안에다 하지마'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이새끼는, 남자친구란 새끼가, 그냥 안에다 해버린다. 자신이 분명 안에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안에다 해버린 남자친구 때문에 여자는 너무 황당하고, 남자는 옷을 추스리고 밖으로 나가버리고, 여자는 뒷수습을 하기 위해 애쓰지만, 임신하게 된다.
하아- 세상 천지 어디에도 써글놈들이 많아...안에다 하지 말라는데 왜 안에다 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그러니까 임신이 랜덤이었어야 해.
위의 인용문 읽는데 이 영화 《블루 발렌타인》의 그장면이 바로 생각났다. 그 장면을 내가 몹시 싫어한 까닭이다. 너무 싫어서 머리에 박혀버린 장면이다. 이 싫은 장면 떠올리다보니 또 싫은 장면 생각나는데, 한국 영화 《연애의 목적》이다.
남자와 여자 둘다 교사인데 수련회인가 극기훈련인가 뭐 여하튼 그런걸 가서 둘만 한 공간에 있게 됐을때, 남자가 여자에게 섹스를 조른다. 여자는 싫다고 몇 번이나 거절하고 몸부림치는데, 남자는 '잠깐만 넣을게 잠깐만' 이러면서 억지로 넣는거다. 아.... 쓰다보니 딥빡이 와서 돌아버리겠구먼........이게 나중에 끝까지 보면 둘이 앞으로 잘될것처럼 결말이 났던 걸로 기억나는데(버스정류장인가 에서 재회하지 않나??), 저렇게 억지로 자기 고추 밀어넣은 새끼를....사귈 수 있을까? 토할것 같다 진짜. 이게 그냥 영화에서 보여진, 극중인물의 특이함이 아니라, 이때 당시의 보편적 한국남자의 태도 아니었을까.... 실제로 이 영화를 본 나의 남자사람친구들은 이 영화를 꽤 좋아하기도 했다. 내게는 불쾌한 기억만 남아있는데.....
얼마전에 짤로 본건데, [까칠남녀]인가의 남자 패널이 콘돔 없이 섹스하는 걸 즐겨하면서 낙태수술 합법화는 반대한다고 했던 장면도 떠올랐다. 사방천지 탁현민 같은 놈들만 깔린건가... 그러니까 탁현민도 거리낌없이 그걸 책으로 냈겠지.
오늘 출근길 지하철안에서 콘돔 없이 섹스한다는 한국남자들 얘기를 책으로 읽고 기분이 너무 나빠져서 이렇게 기분 나쁜 페이퍼를 쓰고 말았네. 아아, 밝고 맑은 글을 읽고 싶다.
아 기분이 너무 나뻐...
커피 사러 다녀와야겠다.
초콜렛도 하나 먹고.
어떻게 해야 기분이 좋아질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콘돔을 잘 만드는 나라입니다. 콘돔을 쓰면 느낌이 안 좋다고 하는 애들이 있는데, 꼭 잘 하지도 못하는 애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p.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