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달에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이현재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을 때, 선생님은 그동안 '온건파' 페미니스트였다 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오면서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었고 바뀌지도 않았다며, 이제 래디컬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하신 거다. 아주 격하게 말을 해야 그제야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한다면서.
지난주 금요일에 민우특강을 들었을 때, 김현미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다. 스물 다섯살 때부터 삼십년간 여성학을 공부하고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지만 단 한 순간도 남자들에게 그게 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메갈리아가 나타나서 미러링을 하자 남자들이 격분하기 시작했다고. 본인이 30년간 공부하면서 하지 못했던 걸 메갈리아(기술력을 갖춘 입이 거친 신세대 여성들!!) 가 했다 하셨다. 그것은 '미러링'이었고 격한 발언들이었는데, 단순히 그 말이 너무 심했다고 욕한다는 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미러링의 발언들이 너무 심해서 나쁘다, 그래서는 안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판단의 주체는 과연 누가 될 수 있느냐는 거였다.
'이것은 선과 악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판단할 수 있죠? 누가 대체 메갈리아 미러링의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거죠? 그걸 자기들이 왜 판단하죠? 이들에게 정제된 언어를 강요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메갈리아는 익명이라 온라인에서만 유효하다, 이들이 바깥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소송을 당하고, 협박을 당하고, 신상털기를 당한다는 거다. 하아- 남자들을 '말로써' 격분시킨 대가가 진짜 너무 지랄맞다.
지금의 넷페미들은 생활형 페미니스트 이다, 이론으로 공부해서 차츰 페미니스트가 된 게 아니라, 살다가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걸 목격하고 생활속에서 싸워나가는 페미니스트. 그런 페미니스트들이 '이건 잘못됐다' 부르짖기 시작하고, 그렇게 실천을 먼저하고 생활속에서 싸워나가면서, 그러면서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김현미 쌤은 연세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고 계신다는데, 단톡방의 성희롱부터 SNS의 페미니즘까지 모든 걸 다 파악하고 계셨다. 게다가 분석도 정확하셨고. 나야말로 쌤이 말한 바로 그 생활형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싶었다.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로 이론적 공부를 시작하며 알아나간 게 아니라 '이건 아니잖아?' 부터 시작해서 소리지르기 시작한, 바로 그런 페미니스트. 그러면서 공부하기 시작하지 않았나. 여자로 살아오면서, 여학생, 여직원부터 지금은 여자 상사까지, 또 누군가의 '여자사람 친구'이면서 '여자 애인'을 거치면서, 길에 지나다니는 '여자 손님', '여자 승객'이면서, 나는 불공평과 부조리함을 숱하게 느꼈고, 그러면서 페미니즘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체감하고 느낀 것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과 이론이 더해지니, 나의 페미니즘 감수성은 더 진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감수성을 가지지 않은 채로, '그것은 올바른 페미니즘이 아니야, 페미니즘이란~ ' 하며 이론 이천 개로 무장한, 체감하지 못한 사람들의 발언은 정말 엿이나 먹어야 할 것이다. 아니, 엿도 아깝군.
이번 민우회 강의는 '정치와 페미니즘'이 주제였다. 국가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도 당연히 나왔는데, 진보적인 여성주의 관료가 현재 나온다 해도, 그러니까 이를테면 비례대표라든가 해서 국회의원이 된다고 해도, 법안 발의가 실효성을 갖기가 너무 어렵고, 지금같은 대선 상황에서 대선 주자들이 여성주의적인 관점을 전혀 갖지 않는다 해도, 이, '어딘가에 속한', '진보적 여성주의 의원'도 결국은 이 시점에서 '이성애자 엘리트 중산층 남성'중 누군가에게로 편입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게 현실인 거다. 진보적 여성주의 관료가 나온다 해도, 국가가 실현할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매우 어렵다는 거다.
나, 잘 정리하고 있나, 지금?
대선만 해도 그렇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을 장착한 정치인들을 뽑고 싶지만 그런 후보가 없고, 그런 후보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누군가에게 표를 주어야 하는 상황. 이런 현실 속에 우리는 놓여있다는 거다.
나는 매번 선거에서 소신껏 투표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뽑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어차피 당선 될 것도 아닌데 표를 분산하느니, 다른 사람에게 몰아주자, 라는 생각으로 '될 법한 인물'에게 표를 주곤 했던 거다. 이게 너무나 당연한 고민이며 선택이라 생각했던 거다. 그렇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 부터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가 뽑은 사람이 물론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지지율이 너무 낮아 그럴 리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주기로 했다. 설사 대통령이 되지 않더라도 그 후보의 정책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여기에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이번 강의가 너무 좋아서 잊고 싶지 않아, 중요 키워드들을 부지런히 종이에 받아 적었는데, 아아, 시간이 지나니까 내가 제대로 표현해내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너무 신나는, 즐거운 강의였는데! 질문 시간에 사람들이 질문하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너무 좋았다. 또 강의가 끝난 후에 강의실을 나서며 나와 함께 들었던 여자1, 여자2, 여자3과 짧게나마 후기를 나눈 것도 좋았고.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감수성을 진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할까, 사회가 더 나아지는 데 일조하는 방법이 될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쌤은 지금처럼 부지런히 SNS 에서 활동하고, 광장에 나가고, 그러자고 해서 너무 좋았다. 강의 하나씩 들을 때마다 더 알게 되지만 또 더 알고 싶어지는 것도 많아서, 내 안에 욕심만 무럭무럭 자라난다. 이것도 알고 싶고 저것도 알고 싶고 이것도 궁금하고 저것도 궁금한데, 내가 그걸 언제 다 공부하냐.. 직장 때려치고 나도 공부만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나 공부만 하고 먹고살 수 있는, 그런 방법 어디 없나.... 왜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할까, 돈 버는 데 너무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뺏기고 있어...내가 하고 싶은 건 공부인데, 일에 너무 치중하고 있어..... 슬픔......
선생님은 강의 마지막에 '좌절하지 말고 실종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실종되지 말라'니, 아, 너무 좋다!!
다음에는 이런 책들을 읽어야지, 준비해두고 있다.
그나저나 아이폰이 저장 공간 안남았다고 부르짖고 있는데, 내가 영화를 많이 받아놓긴 했지만, 역시 아이폰 레드로 바꿀 때가 된건가..싶다. 인생...
주말엔 조카들이 왔다. 여덟살 나의 큰 조카는 아침 일찍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는 당연히 지난 밤의 알콜 흡수로(응?) 더 잠이 필요한데, 조카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누워서 두 팔을 벌려 조카를 맞는다. 그러면 조카는 내 품에 쏙 들어와 안기고는 내 옆에 눕고, 그렇게 누워서는 나랑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 이모는 내일 회사가겠네?
- 응.
- 이모, 타미 숨겨가. 가방에 넣고 가.
아아, 너무 예뻐서 볼에 막 뽀뽀해줬다.
- 이모는 혼자 자도 안무섭겠다. 이모 방에 책이 엄청엄청 많아서.
- 응, 이모는 혼자 자도 안 무서워. 책이 엄청엄청 많아서.
- 내가 친구한테 우리 이모방은 도서관이라고 말했어.
- 아 그래? 그랬더니 친구가 뭐래?
- 헐, 이라고 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너네들, 초등학교 1학년인데, 헐이란 말을 쓰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배고파서 밥을 먹어야겠다는 내 말에 다섯살 남자 조카는 이렇게 말했다.
- 이모, 할머니가 한 시래기 반찬이랑 먹어. 맛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휴, 다섯살 짜리가 시래기 나물을 엄청 잘먹는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엄청 맛있다면서 먹어 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조카는 '시래기' 라고 발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쓰레기' 라고 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양재천에 벚꽃이 진짜 흐드러지게 피었다. 절정이고 절경이다. 점심 먹고 살짝 산책을 해야겟다.
산책 하고 와서 사진 추가. 양재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