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모르게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다. '로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로라'를 지키는 데 온 힘과 에너지를 쏟게 된다. 물론, 이미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로라 역시 로건을 지키고자 한다. 게다가 로건은 로라가 '대디' 라고 부르는 순간에, '아, 이런 것이구나' 하고 그간 존재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감정에 대해 느끼게 되기도 한다. '찰스'가 잠깐 단란한 가족들 사이에서 '여기서 하룻밤 쉬어가자' 라고 말하는 것은, 본인이 그 평범함과 안락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울버린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건 내게도 통해서, 그 장면에서 나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저게 사실은 가장 행복한 게 아닐까. 특별하지 않은 사람과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사는 일. 한 공간에서 함께 밥을 먹고 별 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것들. 이거 말고 인생에 굳이 뭐가 필요할까?
조카1은 이제 여덟살이고 이번 해에 학교에 입학했다. 이 아이는 뭘 만들고 조립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아주 어릴 때부터 볼펜을 분해하기도 했고 몰펀을 아주 잘 다뤘다. 그러나 이 아이는 내 기대와는 달리 책 읽는 것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글자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조카의 엄마와 아빠는 아이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독해 능력이 좀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을 해서 논술 선생님과 책읽기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내게 알렸다. 나는 여동생에게 그랬다. '아니야, 내 조카는 절대, 절대로 독해 능력이 떨어지지 않아. 지금은 글자를 잘 모르니까 읽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 글자를 읽어나가는 데 에너지를 쏟아서 그렇지, 일단 걔는 내용을 알기만 하면 누구보다 그걸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아이야. 걘 진짜로, 파악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니까?' 라고. 나름 열변을 토했는데, 조카의 논술 선생님이 조카랑 수업을 해본 뒤에 여동생에게 나랑 똑같이 말했다고 했다. 글자 읽고서 내용 파악은 힘들어하는데 그건 글자 읽느라 그런거지 다른 사람이 읽어주면 누구보다 해석을 잘하고 자기 의견 표현도 잘한다고. 아니, 내가 내 조카를 아는데 진짜 그렇다니까? 글자는 다른 아이보다 좀 늦게 알 수도 있는데, 얘가 상황 파악이나 감정 표현 능력이 진짜 탁월하다니까? 이런 조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시쓰기 시간이라고 한다. 선생님이 말하기를, 시 쓸 때 이 아이는 너무 신난다면서 알고 있는 표현을 죄다 끌어오면서 시쓰는 걸 즐겨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동생은 시쓰기 노트를 따로 한 권 사줬다는데 거기다 신나서 시를 쓰고 있단다. 아아, 조카야, 이모는 책은 즐겨 읽지만 시를 잘 몰라... 역시 너는 나랑 너무나 다르구나... 나는 일전에 조카랑 놀면서 몰펀이나 레고 맞출 때 완전 멘붕오고 스트레스 받아서 손이 꼼짝도 안하는데, 조카가 깔깔 웃더니 머릿속에 생각하는 걸 그냥 다 만드는 게 아닌가! 아아, 아이야, 너는 나랑 다르구나! 어쨌든.
이 논술 시간에 주제가 '여행'이어서 어디에 다녀와봤냐, 라는 식의 문답이 있었는가 보다. 나의 조카1은 '저는 제주도밖에 안가봤어요' 라고 했다는데,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단다.
그런데 우리 이모는 많이 가봤어요. 미국도 가고 프랑스도 가고(포르투갈과 헷갈린 것 같다) 홍콩도 가고 남자친구도 호주에 있어요(이것은 반만 사실이다).
그래서 여동생이 아, 이모의 삶이 이렇게 조카에게 영향을 주는구나 생각했다는 거다. 지난 주말에 우리집에 왔던 조카는 자고 일어나서는 내 방으로 들어와 나를 깨웠다. 내가 팔을 벌리자 내 품에 쏙 안겨서 내 옆에 누웠는데, 그러면서 내게 이모는 어디어디 여행가봤어? 하고 묻더라.
응. 이모는, 미국, 포르투갈, 괌, 홍콩, 마카오, 싱가폴, 베트남, 러시아 가봤어.
이모 프랑스는 안가봤어?
응 이모 프랑스는 안가봤어.
이모 타미는 홍콩 가보고 싶어.
아 그래? 그러면 이모랑 같이 홍콩 갈까?
응 이모랑 같이 홍콩 가고 싶어.
응 그러면 타미 지금보다 더 크면 이모랑 둘이 홍콩가자.
이모. 우리 태권도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태권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대. 근데 자꾸자꾸 생각하니까 정말 태권도 선생님이 됐대.
응 맞아, 타미야. 이모도 열다섯살 때부터 미국 가고 싶었거든. 그래서 자꾸자꾸 생각하니까 나중에 진짜 미국에 가게 됐어. 타미도 하고 싶은 거 자꾸자꾸 생각하면 하게 될거야.
진짜?
응. 사람은 하고 싶은 거 자꾸자꾸 생각하다보면 매순간 거기에 가까운 선택을 하게 되거든. 그 선택이 결국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줘.
이런 대화를 내 침대 위에서 둘이 알콩달콩 나누었는데, 내 조카가 얼마만큼을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어제는 조카랑 영상통화를 하는데 이모 어디냐 물어서 '이모방이야' 했더니 진짜인지 보여줘봐! 하는 거다. 그래서 웃으면서 책장 앞에 가 섰다. 그리고 책들을 좌악- 보여주니, '이모방 맞네' 하더라. 아하하하하.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다니는데, 내 조카에게는 이런 나의 모습이 계속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나는 조카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최소한 '다른 어른의 모습' 같은 거라도 주게 되는 것 같다. 아빠 어른, 엄마 어른, 할머니 어른, 선생님 어른을 주변에서 아주 자주 보겠지만, 그들과는 또 다른 '이모 어른'을 보게 되는 거다.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어른을 보게 되는것처럼, 자주 여행을 가는 이모를 또 보게 되는 거다. 다양한 어른을 알게 된다는 건 좋은 거 아닐까? 알게 모르게 나는 조카에게 다른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아, 그리고 연대! 하하하하하.
지난 번에 조카네 집에 갔다가 술을 마셨는데, 조카2가 공룡 인형을 가지고 놀자고 하는 거다. 그래서 함께 노는데, 가장 무서운 공룡이 작은 공룡을 잡아먹는 놀이를 하더라. 그래서 내가 작은 공룡을 죄다 세워놓고 그랬다.
봐 조카야. 이렇게 큰 게 작은 거 공격하면 작은 건 이길 수가 없지만, 이렇게 작은 공룡 여러마리가 함께 힘을 합쳐서 큰 공룡한테 덤비면 큰 공룡이 져. 하면서 작은 공룡 여러명이 큰 공룡에게 덤비는 장면을 연출했다. 결국 자기 혼자 서있던 큰 공룡은 쓰러졌는데,
조카야 봤지?
하니까, 조카2가 응. 같이 공격하면 큰 공룡이 져. 이러더라.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이게 연대야. 우리는 연대해야 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제기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섯살 짜리한테 내가 지금 술취해서 뭐하는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말하고 내가 빵터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친하게 지내는 망고남은 지난 주말 대화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라고 자기를 정의했다. 이 친구에게 페미니즘이 장착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페미니즘 감수성도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페미니스트로 살고자 하는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기도 해서, 이 친구가 지향하는 것이 페미니스트라고 내가 생각해오긴 했지만, 이렇게 본인 입으로 직접 '나는 페미니스트다' 라고 발화한 적은 처음이라, 막 너무 좋았다. 이 친구가 애초에 성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걸 내가 알지만, 나를 알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또 나의 글을 읽고 나와 대화를 많이 많이 하면서, 나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장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지금 열심히 페미니즘 공부하는 나를 만난 게 아니었다면, 이런 나랑 대화하는 시간이 길었던 게 아니라면, 스스로 '나는 페미니스트다' 라고 말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본인이 어쩌면 인지하지도 못하는 순간에 이런 나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감개무량 ㅠㅠ
이로써 내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남자사람 둘 모두가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정의했다. 내 남동생쪽은 사실 갈 길이 아주 멀지만... 얘는 페미니즘 감수성이 썩 높질 않아... -_-
어제는 매일 걷는 퇴근길이었는데, 이십년 가까이 해오는 퇴근길이었는데, 다른 날보다 유독 지쳤다. 지겨웠고 지긋지긋했다. 가도가도 지하철 역이 나오질 않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지하철 역에 도착했는데, 사무실에서 나온 시간으로부터 20분이 지나 있었다. 아, 싫다 진짜. 그리고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오는 게 또 수서행이야...나는 오금행을 타야 하는데...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 지하철로도 한참을 가고나서 내려 집까지 걷는데도 또 오만년 걸리는 느낌... 너무 지겨워서 주저앉고 싶은 거다. 아 진짜 미치겠네, 너무 힘들고 짜증나네 ㅜㅜㅜㅜㅜㅜㅜㅜ 이러다가 퍼뜩 아?? 하고 생리앱을 켜봤고 그리고서 아..... 했다.
너무 지쳐서 엄마한테 김치전을 부쳐달라고 했다.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가서는, 엄마와 남동생과 내가 셋이 식탁에 앉아 김치전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진짜 맛있었다. 엄마, 김치전 해줘서 너무 고마워, 너무 맛있어, 먹고 싶었는데 엄마 없었으면 나는 귀찮아서 안해먹었을거야, 이러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는 퇴근길이 너무 지치고 짜증났다고 했는데, 엄마가 그랬다.
야, 그럴 때는 집에 오지말고 근처 모텔 잡아서 자.
아???????????????? 내가 왜 이생각을 못했지?????????????????????? 그러면 되겠네????????????
뭐하러 힘든데 집에 와서 자냐, 그냥 회사 근처에 가서 자고 다음날 출근해.
이러시는 거다.
우왓. 좋은 방법인데? 마침 회사 근처에 내가 아는 호텔도 있겠다, 다음에 지치고 지겨우면 그냥 호텔 가서 널브러져야겠다, 라고 생각하다가,
그런데 엄마 돈은???
하고 물으니 엄마는 '그게 문제지, 그러다 빚생기지' 이러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참나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는 이내, 야 근데 회사 근처에 호텔 잡으면 엄마한테 전화해, 하셨다. 너 혼자 자기 무서우니까 엄마가 가서 같이 자줄게, 라고. 아니 엄마...그러면 엄마가 오며가며 힘든데 뭘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돈이 많다면 회사 근처에 방 하나 얻어두고 싶다 진짜.
아 그러니까 생각나는 한 십오년 전쯤의 기억... 그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매일 회사 출근하는 길이 멀고 지쳐. 회사 근처에 방얻어줘' 라고 했더니, 반나절 후쯤에 '그 근처 사는 친구한테 방 하나 알아보라고 했어' 라고 답이 오더라. 내가 진짜냐고 물으니, '응 좋은 생각 같아, 나도 가끔 들를 수 있고' 이러는 거다. 그래서 내가 '안돼 알아보지마, 그러다 애생겨' 라고 했더랬지...............
아, 돈 벌어서 강남에 빨리 집사가지고 망고남한테 청혼해야겠다. 강남에 집 없으면 청혼할 생각도 하지 말라 그랬는데.....힝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