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엔 이유없이 기분이 좋았다.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좋았는데, 인연이란 것은 아주 작은 우연들이 겹쳐서 만들어낸 것이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 출근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강동역에 내렸는데,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역까지 걷는 그 순간,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노래가 나오고 있고, 작은 눈이 내리고 있고, 아직 어둡고, 바람이 부는데, 혼자 걷는 그 순간이 진짜 너무 좋은 거다. 그래서 혼자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는, 좋네, 했다. 좋다. 지금의 기온과 지금의 어둠 지금의 노래 지금의 분위기, 좋네. 좋아라, 하면서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출근길이 이렇게 좋을 수 있다니, 그것도 누가 뭔가를 해준 게 아니라 그냥 스스로 이렇게 좋다고 느끼다니, 진짜 좋네, 하면서 정말 좋은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듣고 있던 노래는 슬픈 노래였지만!!












어제는 유럽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거였는데, 우리가 본 지 한 일 년 됐던가...  친구와 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중에는 시차에 관한 것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시차가 많이 나는 곳에 떨어져 지내고 있다면 그 관계가 유지되기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얘기.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네, 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래. 사랑하는 마음으로 잠을 덜자고 연락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그렇게 자기 생활패턴을 깨면서 상대를 챙길 순 없는 노릇일거야, 같은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자, 김행숙의 시도 생각 났고.


 















당신이 지진이라면



여보세요, 떠나겠다는 나의 결정이 나는 두려워요. 당신으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당신이 지진이라면 먼 곳에서 지진이란 무엇일까요? 호숫가의 오리들도 놀라지 않아요. 나는 낮잠을 깨지 않아요.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가요. 나의 낮잠은 비뚤어진 입을 틀어막고 한량없이 귀가 커져요. 펄럭이는 귀는 검은 밤에 젖어요. 귀가 커다래지니까 이곳이 얼마나 조용한 곳인지 알겠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가 옛날 전화기를 들고 있다면 검은 전화선을 따라 수억 개의 지붕 위를 건너 텔레파시의 화신처럼 나타날 수 있을까요. 옛날 연인들은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거나 목에 감았어요. 주술 같은 것이었어요. 허공을 만지는 일도 그런 걸까요? 허공에 대해 공부했다는 한의사는 내게 생활 습관을 고치라고 말했어요.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밥을 먹고 그리고 허공을 자꾸 만지지 말라고 했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귀를 막은 채 비명을 지르지 말라고 했어요. 침을 맞으라고 했어요.



나의 아침에 당신은 저녁 8시예요. 당신의 새벽에 나는 오후 2시예요. 먼 곳, 먼 곳, 먼 곳을 향해서 당신이라고 부르는 오후 2시에 나는 또 손이 저려요. 오후 3시에 침을 맞아요. 식전 30분에 나는 한약을 먹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먼 곳의 지진을 느끼지 못해요. 먼 곳에서 당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요. 당신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나는 슬퍼하지도 못했을까 봐 진짜 두려워요.




시차가 있는 곳에 있던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시차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아서, 나의 저녁이 그의 저녁이었고 그의 아침이 나의 아침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에게 밤이 찾아오면 내게도 밤이 찾아온다는 사실은, 그때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자고 당신은 고작 시차가 한 시간인 곳에 있었을까, 그랬으므로 내가 부를 때 응답이 가능하지 않았나,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은 작은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이 세상 모두가, 누구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에 있어서, 작은 우연들이 겹쳐져 생겨난 것이겠지만, 어제 먼 데서 온 친구를 만나고는 이 생각을 오늘 아침에 눈뜨자마자 하게 된 거다. 그리고, 정말이지 '왜 하필, 여기서, 너였을까' 라는 문장을 담아낸, 산드라 브라운의 소설이 생각났다.



"행방불명 장병의 아내와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운명의 장난이었다면, 왜 그게 꼭 당신 같은 모습의 여자여야 했을까? 왜 당신이어야 했을까?" (p.118)

















아, 진짜 너무 좋다. 뭐가 좋은지 모르겠는데 그냥 막 좋다. 오늘이 너무 좋다. 금요일이라서 좋은건지, 아침에 가볍게 내리는 눈이 좋았던건지, 볼에 닿는 바람이 좋았던건지, 아침 출근길의 그 완벽함, 그 좋음이, 계속 내게 남아있다. 좋다. 




어제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데 집 현관문이 안열린다. 안에서 아예 잠가버린 것. 얼라리여? 그래서 나는 이걸 잠갔을 남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화장실도 급한데 제기랄...그런데 남동생이 전화를 안받는다. 아이쿠야..나는 이제 어쩌나... 그래서 망설이다 이미 잠들어있을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아빠는 전날 밤을 새셔 일하셨고, 또 다음날 새벽에 일을 나가시므로 일찍 주무시는데, 이렇게 한참 주무실 시간에 깨우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집에 들어가야 하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추측하기론, 남동생이 내가 들어온 줄 알고 문을 잠그고 술취해 기절했나보다.. 했더랬다. 벨이 여러번 울려 아빠가 전화를 받았고, 아빠 문 좀 열어줘... 라고 해서 아빠가 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들어가서는 너무 다행이다 싶어, 아빠 문 열어줘서 고마워, 라고 했다. 그러자 아빠가 말했다.



야, 그러면 내 딸인데 문을 왜 안열어주냐, 당연히 열어줘야지.



아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이쉐키는 뭐해!! 하고 버럭대자, 샤워중이라고 한다. 곧 남동생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 멀쩡한 남동생이 나와서는, 아 잠근 줄 몰랐다 진짜 미안해, 라고 하더라. 이쉐키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화장실 가고 싶어서 미칠뻔 했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ㅋㅋㅋㅋㅋㅋㅋ사실 저거보다 더 노골적이고 극한 표현을 했지만, 이미지 관리라는 게 있으니까 이정도로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샤워 후에 텔레비젼 보는 남동생 옆에 앉았다가 잠깐 남동생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남동생은 술주정 하지말고 들어가서 자라고 나를 구박했지만,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 사랑하는 존재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게 너무 좋았다. 또 좋네... 했다. 

어제도 친구에게 얘기했지만, 이런 강한 사랑과 신뢰를 가진 존재가 있다는 건 무척 행복한 일이다. 완전한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면 헤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 곁에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은,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있다. 평소에 나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살진 않지만, '언제나 내 편일거다' 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든든하게 한다. 



오늘과 내일의 약속이 다 취소되어버려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잉? 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 집에 혼자 가서 보낼 시간을 생각하니 막 씐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란 인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고보면 내가 신나는 건, 누가 나를 신나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혼자 알아서 신나는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금요일이다.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자정엔 키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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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양배추 2016-12-2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오늘은 정말 저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것 같네요 ㅋㅋ

1시간의 시차가 나는 곳에 소중한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원래 홈타운은 훨씬 더 먼 곳이지만, 감사하게도 저와 1시간 차이만 나는 곳에 있네요.

그의 밤이 나의 밤이고, 그의 아침이 나의 아침이라는 말이 절절히 감사했습니다.

저의 바로 옆에 있는 것이 물론 제일 좋겠지만, 이렇게 함께 일어나고 잠드는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오늘 싸리눈도 오고 몹시 춥던데ㅜ 좋은하루 보내세요!

다락방 2016-12-23 09:41   좋아요 0 | URL
아, 사각양배추님!! 그러시군요. 한 시간 시차가 나는 곳에 소중한 사람이 살고 있다니. 아, 정말 남 얘기가 아니네요. 그의 밤이 나의 밤이라는 거, 정말 좋지요?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좋겠지만, 그 먼 데 있어도 같은 밤을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다행한 일인 것 같아요. 그 자체로 좋고요. 멀리 있지만 또 같이 있는 느낌.

사각양배추님,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리고 지금의 그 소중한 마음을 뜨겁게 유지하시길 바랄게요. 응원합니다!
:)

Forgettable. 2016-12-2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수다로 이런 저런 책을 생각해내는 것도 참 능력이네 능력 ㅋㅋ 나는 치매라 ㅠㅠ

다락방 2016-12-23 13:5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ㅋㅋㅋㅋ 나도 참 능력자인듯? ㅋㅋㅋㅋㅋ

Forgettable. 2016-12-2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유없이 기분 좋은게 아님 ㅋㅋㅋㅋㅋㅋㅋ 이유가 왜 없어요? 좋은 사람 많나서 에너지 팡팡 받아서 그런 것 같은데 딱 보니깐..

다락방 2016-12-23 14:33   좋아요 0 | URL
아 이게 그런거구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사람 만나서 에너지 팡팡 받아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몸은 좀 어때요? 아 유 오케이?

서니데이 2016-12-23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2016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다락방 2016-12-26 07:5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크리스마스 끝나고 출근했습니다 ㅠㅠ
서니데이님, 남은 올 한 해도 잘 마무리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재는재로 2016-12-23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크리스마스되세요 서재의달인 축하해요

다락방 2016-12-26 07:5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미 지났지만, 재는재로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6-12-24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6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