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맥주를 마시고싶은 날씨였다. 평소에 맥주를 즐겨 마시지 않고 앞으로도 즐겨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어제는 맥주가 간절했다. 많이도 필요없고 딱 한 잔만 마셔도 좋을 것 같았다. 광화문에서 종로3가역까지 걸으면서, 중간에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러 책들을 훑어보면서, 중간중간 혹시라도 맥주를 마실만한 밥집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싶었고, 밥을 먹으면서 맥주를 한 잔 시켜두고 싶었던 터다. 그러나 역에 다다를때까지도 마땅한 밥집이 보이질 않아, 아아 그냥 집에 가자, 하고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김이설의 『오늘처럼 고요히』.
그제부터였나,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의 단편 「미끼」한 편만 읽고 책장을 덮었다. 아, 세다. 그간 읽었던 김이설의 다른 책들보다 세다. 이 센 걸 내처 읽어야 하나 아니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한 편 씩 읽어야 할까... 고민하며 사흘을 이 책을 들고 다니며 읽었다.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고 냉장고에 있는 호박을 꺼내 썰고 계란 푼 것에 퐁당 담갔다 꺼내서 호박전을 부쳤다. 그리고는 얼른 냉장고에서 500미리 맥주를 꺼내와 유빅컵에 따랐다. 그리고 티브이 앞에 앉아서 채널을 돌렸다. 가만있자, 이 시간엔 뭐가 하지? 안그래도 트윗의 타임라인이 내내 참담했던 터라 잠깐이나마 다른 걸 보고 싶었는데, 돌리다보니 손석희의 뉴스룸이 하고 있었고, 오랜만에 뉴스를 보자, 했다가, 또다시 참담해졌다. 그리고 지쳤다.
김이설의 책을 읽으면서도 지쳤었다. 남자들이 죄다 하나같이 한심해서. 이건 작가가 부러 의도한 것인지 , 아니면 이야기를 구상하다보니 남자들이 이런 식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이 마냥 허구만은 아니다. 충분히 있을법한, 있었을, 그런 일들이었으며 그런 삶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런 남자들은 수두룩했다. 이 한심하고 찌질한 남자들은 도처에 널려있었고, 그런 남자들의 모습을, 여자라면, 가족으로부터 보기도 했을 터다. 아주 많이. 일단 남자인이상 자신의 성적 욕망을 풀어내는 것에 고민도 없고 자신 안에 쌓인 불만이나 분노를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에 있어서 제약도 없다. 가장 큰소리를 내고 가장 센 주먹질을 하는 사람은, 가장 병신같은 사람일 확률이 크다. 집안에서 한 남자가 휘두르는 폭력은 그 안에서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내지만, 그안에서 또다른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폭력은 폭력을 물려준다. 혐오는 혐오를 물려준다.
여자를 힘들게 만드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여자를 죽이는 남자가 나오는 뉴스를 접하니, 하아, 멘탈이 찢어질 것 같았다. 급격하게 지쳤다. 둘중 어느 하나만 접했어도 지쳤을텐데 둘다 한꺼번에 접하노라니 영혼이 너덜너덜해지더라.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 데 사방이 막혀버린 것 같았달까. 책을 읽다가 티브이로 도망갈 수도, 티브이를 보다가 책으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나는 김이설이 소설에서 써낸 내용들이 현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읽으면서 내내, 아, 공부 많이 했구나, 공부 많이 해서 정말 '열심히' 써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공부 많이 해서 열심히, 김이설은 더럽고 아프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냈다. 그런 소설을 읽다가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봤을 때, 거기에 희망이 있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거기에도 역시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지금 이 시기에 좋지 않아, 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다보니 '그렇다면 이 책을 읽기에 적절한 때가 올까?'라는 생각도 들더라.
트윗의 타임라인을 보면 똑똑한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나는 희망을 갖는다. 똑똑하기만한 게 아니라, 연대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위로하고 기운을 주고 방법을 제시하는 그 모든 사람들이,
여자였다.
불쑥불쑥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그건, 현실이 아파서이기도 하고, 이렇듯 목소리를 내는 여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감사해서이기도 하다. 이것은 안된다, 옳지 않다, 고 말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옳지 않다는 걸 알리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문득, 김이설의 소설 『환영』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정확한 워딩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시작이었다' 였던가.
다시 시작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식구들이 모두 만신창이가 된 게 안 보여요?" (한파 특보, p.170)
"사람들이 나더러 다 아버지 닮았대요." 아버지가 뒷걸음질쳤다. 나는 천천히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리고 아버지를 때리기 시작했다. 내 다리를 못 쓰게 만든 아버지의 팔을 분지르고 싶었다. 지치도록 아버지를 짓이기고 나서야, 나는 허리를 폈다. (미끼, p.45)
"야, 너도 밥 같은 건 이제 네 손으로도 해 먹을 줄 알아야지! 귀하게 컸다고 언제까지 받기만 하냐. 아비가 됐으면 식구부터 챙기고. 어떻게 너 혼자 오냐. 너도 참 모질다." (비밀들,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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