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좋은 친구로 지내자는 식으로 괜히 멋진 척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앞으로 서로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 가서 또 언젠가 어디에서 소중한 친구로 재회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

하루카는 시게유키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은 말고 병을 고치는 데 전념하면 좋겠어"라고 응해왔는데 왜 그런지 더 이상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게유키의 진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루카의 머릿속에는 내내 사실은 시게유키가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더 기댔던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칠 년 동안 타이완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시게유키라는 존재가 일본에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p.491)

















'하루카'에게는 오랜 연인 '시게유키'가 있다. 타이베이로 발령받아 일 때문에 오게 됐지만, 휴가를 내서 간혹 시게유키가 있는 도쿄로 가 그를 만나고 오곤 했다. 메일을 가끔 쓰고 전화를 가끔 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는데, 시게유키가 언제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멀리 있어서 바로 알아채진 못했지만,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간을 내 그를 찾아간다. 그녀에겐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오래전 타이베이 여행중에 만난 남자 '렌하오(에릭)'이 있지만, 그에게도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만큼, 그래서 그와는 연인관계로 발전하지 않을만큼, 그만큼 오래된 연인 사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들 사이에 뜨거운 사랑이라든가 설레임이라든가 하는 것은 없어진 것 같았다. 게다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시게유키는 기분이 순식간이 바뀌곤 했던 터라, 자신의 연인이 힘들것 같아 '헤어지자'는 뜻을 밝히지만, '하루카'는 '이렇게 시게유키가 힘든 상황에 나마저 그와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의 헤어지자는 말들을 그냥 넘겨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그에게 부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게유키의 건강이 어느 정도 좋아졌을 때, 그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는 그녀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제야 스스로를 인정한다. 그가 자신에게 기댄 게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기대고 있었음을.



'애인' 혹은 '연인'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때로 그 사람의 성격이나 그 사람을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런 포지션에 누군가 '있다'는 것 때문에, 그러니까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 때문에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딱히 이제는 더이상 사랑한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애인이 있다, 하는 것이 단단하게 스스로를 받쳐주고 있을 때가 있는 것이다. 하루카가 일본에 있는 연인과 7년간이나 떨어져 있으면서 다른 남자들을 만난다거나 외롭다거나 하지 않고 일에 열중할 수 있었던 건, 분명 '아 매일매일 더 사랑해' 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아니어도, '내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휴가 때마다 자신의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 중에 얼마간의 시간은 애인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자주 연락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어쨌든, 사귀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 '존재'의 고마움 때문에 그녀는 헤어짐을 미루고 또 미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걸 깨닫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분명 필요할 거라고 생각을 했을 거고. 칠 년을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연애를 했고 그 전에도 같은 나라에 살면서 연애를 했다. 그 시간은 분명 긴 시간이었으나, 그들은 이제 이별을 했다. 죽을것처럼 좋아했던 사이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 오랜 관계가 돌아서버린 지금,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왔던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마음이 휑할것이다.





'하루카'는 아주 오래전 타이베이에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그 나라의 대학생 '에릭'으로부터 길 안내를 받게 되고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된다. 바로 다음날이 일본으로 출국하는 날이라 아쉬운 마음을 안고 헤어져야 했는데, 그때 에릭은 연락하라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그녀에게 건넨다. 자신이 공항으로 타고 가야 할 버스까지 배웅을 나온 그에게 버스안에서 꼭 전화하겠다고 한 뒤에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일본으로 돌아와 가방을 샅샅이 다 뒤지고 또 뒤져고 그로부터 건네받은 종이는 없다. 그녀는 전화번호를 주지 않은 상황에서 그에게 연락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녀는 그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연락할 수 없다. 이듬해에 다시 타이베이로 가, 그와 함께 갔었던 그의 아파트를 찾아보려고 하지만 아무리 그 근처인 듯한 곳을 서성여봐도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채로 내내 그를 그리워만 한다. 그렇게 그리워하며 그녀는 직장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일하다 타이베이로 발령을 받게 된다. 타이베이에 가서 일해볼텐가? 라는 상사의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곳에 애인이 있지만, 5년예정을 '1~2년쯤' 이라고 속인 후에 그녀는 타이베이에 간다. 그곳 직장에서 사귄 직장 동료에게도 나는 사실 그 때 만난 에릭이란 남자를 찾고 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라며 자신의 안타까움을 들려준다. 


에릭은 에릭대로 그녀의 전화를 기다린다. 내일은 오겠지, 내일은 올거야, 분명히 전화한다고 했는데, 그 눈빛은 그 말이 진심이라 말했는데, 왜... 그래서 그는 그녀가 탄 비행기의 무사도착을 확인해보고 도서관에 가 일본 신문을 뒤적여보며 그녀의 이름을 찾고자 한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그러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되고 무작정 일본으로 간다.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면서, 연락처도 모르면서, 무작정 지진이 일어난 곳으로 가 혹시 '하루카'라는 이름의 여성을 아느냐고 물으며 그곳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그도 그 하루의 추억이 몹시 소중하고 가슴에 남아 늘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채로 그들은 9년이나 만나지 못하게 된다.



















내가 어마어마하게 사랑하는 영화 『브로큰 잉글리쉬』에도 이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좀처럼 안정적인 연애를 하지 못했던 여자는 어느 파티에서 프랑스 청년을 알게된다. 이 젊고 키가 크고 잘생긴 청년은 잠깐 미국에 여행중이었는데, 그녀와 며칠을 함께하고는 이제 프랑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 그녀에게 함께 가지 않겠느냐 말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남자는 떠나면서 자신의 프랑스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간다.


여자는 자신의 삶의 터전이 미국이었으므로, 또 그 남자와는 며칠간을 함께 보냈던 것이므로 선뜻 그를 따라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가 그립다. 그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간다. 친구는 다른 볼 일이 있었고, 여자는 가서 그 남자를 만나리라!! 결심했던 것. 그러나 파리의 호텔에 도착해 그에게 연락하려던 그녀는 멘붕에 빠진다. 그가 적어준 전화번호가 쓰여진 쪽지를 잃어버린 것. 짐을 다 뒤져도 그의 전화번호가 나오질 않는다. 결국 그녀는 그가 프랑스 파리에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그를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파리의 며칠간을 오롯이 혼자 여행하며 보낸다.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거리도 걸어보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돌아갈 시간이 되어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향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항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그를 마주친다. 와우-



남자도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를 데리고 지하철에서 내린다. 그리고는 까페로 들어가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만나러 여기에 왔고, 그런데 나를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 돌아가려는 거에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랑 조금 더 있어요, 당신은 비행기를 놓치겠지만.





(아아 이 남자 진짜 너무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기꺼이 비행기를 놓치겠어!!)





아니, 그러니까 나는 답답한 거다. 소중하잖아, 소중한 번호잖아. 이 사람 꼭 다시 만나고 싶잖아. 그런데 내가 아는 게 그가 적어준 전화번호 뿐이라면, 그걸 좀 더 잘 다뤄야 하는 거잖아. 쪽지라면 잃어버리기 쉽잖아,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것을 쪽지로 가지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라도 잘 적어두어야 하는 거잖아. 왜 그 당연한 걸 안하는거지? 쪽지는 잃어버리기 쉬우니까 내 수첩에, 혹은 가지고 있던 책에, 일기장에... 어디든 적어 둬야 하는 거잖아. 어쩌면 그렇게 그 쪽지 하나만 달랑 믿고 있을 수가 있는걸까? 그러니까 9년간을 만나지 못하고, 파리에 가도 만나지를 못하잖아?



참 사람들 신중하지도 못하고 꼼꼼하지도 못하네...




내 경우엔 소중한 사람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도 저장해두지만 다이어리에도 따로 적어둔다. 사실 이렇게 해놓고서 번호를 외워버린다. 내가 외우는 전화번호는 한두개가 아니다. 필요한 번호는 외워버리는 거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사람일 진짜 모르는건데, 내가 아무리 꼼꼼하게 폰에 저장해두고 다이어리에 적어두어도, 폰도 다이어리도 없는 상황에서 급하게 전화를 해야 될 수도 있잖아? 그럴 때를 대비해 외워버리는 거다,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공중전화 밖에 없는 상황이라거나, 낯선 곳에서 나만 홀로 핸드폰이 없을 때, 누군가에게 빌려서라도 전화를 할 수 있도록 나는 전화번호를 외워버린다고! 아니, 그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왜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아? 내 경우엔 주소까지 외워버린다. 아니, 대체 왜 외우지 않는거야????????????????

이 사람이 소중하다, 이 사람에게 반드시 연락할 것이다, 싶으면 외워버리라고!!!!!!!!! 위워, 외워, 외우라고!!!!!!!!!!!





안타깝게 전화번호를 잃어버렸지만 그들은 정말 간절히 상대를 생각했다. 너무나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상대가 있는 곳으로, 실은 정확히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면서, 그 먼 거리를 움직인다. 그랬더니, 어떻게든 상대에게 닿았다. 닿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으면, 결국엔 가야할 곳으로 가게 되는 법. 전화번호를 잃어버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상대에게 닿는다. 그리고 그런 날이 오게될까, 라고 기대했으나 차마 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날이, 



온다.




9년전 헤어졌던 그 호텔의 로비에서 그들은 재회한다.





드넓은 대리석 로비에 에릭이 오도카니 서 있었다. 로비에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하루카는 한눈에 그의 모습을 알아봤다. 에릭도 똑바로 하루카를 보고 있었다. 말을 건네면 들리는 거리였지만, 왠지 두 사람 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역시나 둘 다 뜻대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p.242)



에릭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구 년의 세월이 좁혀지면 좋겠다고 하루카는 생각했다. 나, 변했지? 늙었지? 자조하듯 질문이라도 할 수 있다면 마음이라도 후련해질지 모르지만, 물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이라며 하루카가 생각을 고쳤다. 에릭이 여기까지 와줬다고. 눈앞에 서 있는 에릭도 나와 마찬가지로 구 년 만의 재회를 기대해줬다고. 그 순간, 뭔가가 툭 끊어진 것처럼 긴장했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p.243)




무엇보다 좋은 건, 나만 상대를 그리워했던 게 아니라는 것. 나중에야 알게되지만, 에릭이 하루카를 걱정해서 고베로 갔듯이, 하루카도 에릭이 걱정돼 타이베이에 또 왔었다는 것. 상대방이 사는 나라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결국 흐르고 흘러 에릭이 일본에 살게 되고 하루카가 타이베이에 살고 있는 건, 서로가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 상대를 만났었으므로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마주 섰다는 것. 나의 간절함이 당신의 간절함이기도 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잖아,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타이완 신칸센 일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하루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렌하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도쿄에서 일하지는 않았을 거야."

설령 똑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그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단수이 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아파트를 찾던 내가 지금 여기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렌하오가 찾았던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찾았던 그가 여기로 와줬으면 좋을 텐데 하고.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은 역시 내가 찾아내지 못한 그였고, 그가 찾아내지 못한 나일 뿐이다. (p.404)




일상은 힘이 세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그리워한들,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하노라면 오늘은 내일이 되고 한달 뒤가 되고 또 일 년 뒤가 된다. 서로를 그리워하고 찾고 싶은 마음이 있었도, 둘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만의 다른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지금이 되었다. 이 책에서 하루카와 에릭의 이야기가 조금 더 비중이 많았으면 좋았겠다고, 조금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들에게 더 많이 차지하는 비중은 당연히 일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틈틈이 혹은 가끔, 어쩌면 '오랜만에' 연락할 수 있는 사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은 재회후에 일 년이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래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다. 이것도 나쁘지 않겠어, 어쩌면 이게 더 좋을 수도 있겠어. 이들이 구 년이나 지내고서야 만나게 된 건, 그게 더 나았기 때문일 수 있었을 거다. 그 편이 서로에게 더 좋아서. 이런식으로 상대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책을 읽는 내내 타이베이에 가고 싶어졌다. 하루카와 렌하오의 사연이 있는 타이베이에 가서, 하루카처럼 혼자 어슬렁 돌아다니다가 쑥- 음식점에 들어가 혼자 밥도 시켜 먹어보고 그렇게 지내보고 싶어졌다. 개인의 사연은 내밀한 것이라, 사실 그 사연이 아름답다한들 타인에게는 그다지 영향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 '익스트림'의 <when i first kissed you>를 듣고, 엠파이어에 가보고 싶었었다. 그 때부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나의 로망이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게이지'의 [스타킹 훔쳐보기] 시리즈를 읽고는, '할'과 '로라'가 재회했던 센트럴 파크의 벤치에도 꼭 가보고 싶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이 '겨울에 오리는 어디로 가지?' 궁금해했던, 그 센트럴 파크에 꼭 가보고 싶었었다. 그러나 내가 뉴욕에 갔을 때, 센트럴 파크에 가보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가 봤을 때, 거기에서 내가 아름다운 사연을 만나지도 못했고 아름다운 사연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이화동>에 꽂혀서 이화동에도 가봤지만, 그곳은 그저 작은 동네, 그 뿐이었다. 그들의 사연이 오로지 그들만의 사연인 까닭이다.  



요즘에 베트남에 가야겠다고 자꾸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빌려주었던 베트남 국수여행 책을 다시 돌려달라 말했다. 그 책에서 국수가게가 밀집된 어느 지역이 있었는데, 거기가 어딘지 보고 짧게 거기로 갈 생각이었던 거다. 국수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베트남에 가서 국수를 먹으면 어쩐지 뭔가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거다. 그래서 베트남에 가야지 생각했다. 혼자서 멀리 나가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일단 가까운데부터 시작해서 먼 데로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계속 어딘가를 가고 싶어하고, 어딘가에 가서 다른 이의 사연을 만나고 싶어하고, 어딘가로 가서 그 곳의 음식과 술을 먹고 싶어하니, 혼자 가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 같았다. 내게는 좋은 여행 친구가 있지만, 언제나 타이밍을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을 맞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언제든 원하는 때에 원하는 시간만큼 원하는 곳으로 다녀오려면 혼자가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 가까운데부터, 그 시작은 베트남 국수여행으로!!!


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요시다 슈이치'의 책에서 타이베이에서 재회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니, 아아, 국수고 뭐고 그냥 타이베이에 가고 싶다..... 싶어지는 거다.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먹을 거 생각하면 베트남 가고 싶고 뭔가 마음이 애잔한 건 타이베이이니, 아아, 나는 어쩌란 말인가.



그러다 문득 역마운 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막 돌아다니게 됐을까. 어쩌다 나의 친구들은 막 지방에 있고 그렇게 됐을까? 친구 만나러 비행기 타고 부산 가고 기차 타고 대전 가고 ktx 타고 대구 가고 막...아아,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왜 자꾸 어딘가로 가고 싶어할까, 여행을 싫어하는 내가 아니었나.. 며칠전에 사주까페에 가서 사주를 봤는데, 사주 봐주시는 분이(이런 분을 도사님이라고 부르는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건가...) 내게 역마운이 있다고 하셨다. 사주에 원숭이랑 쥐가 있다고, 얘네들이 한 순간이라도 가만 있는 걸 봤냐고, 이 두마리가 함께 있으면 역마운이 있는 거라고.... 아...... 역마운... 이라고? 그런 게 나한테 있어? 


어쨌든 베트남에 먹으러 갈 것이냐 타이베이에 사연을 만나러 갈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좀전에 다른 부서의 남자과장과 복도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나는 남자들 향수 뿌리는 거 너무 좋다. 향수 냄새도 좋다. 아, 향수 냄새 좋다, 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뭔가, 나랑 별 관계도 아닌 남자 향수 냄새 좋다고 생각하는 내가 갑자기 너무 짜증나서, 콧구멍을 확 틀어막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콧구멍은 제 역할을 너무나 잘해낸다. 콧구멍아, 관계도 없는 남자의 향수 냄새 같은 거 맡고 그러지마!!!!


이루지 못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미화되게 마련인지 이렇게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때 뻥 뚫린 구멍이 메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p.95)

곰곰이 회상하듯 중얼거리는 민스에게 "그래. 길지, 팔 년은"이라며 렌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스스로도 바보스러운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타이베이에서 고작 하루를 같이 보낸 일본 아가씨에게서는 그 후 연락이 없었다. 따져보면 그런 이야기는 쓸어버릴 정도로 많다. 그런데도 자기들의 만남만은 다르다고 굳게 믿었다. (p.262)


댓글(13) 먼댓글(1)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비행기를 놓치지 않아도 돼.
    from 마지막 키스 2022-07-22 15:36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일단 한숨 한 번 쉬고 시작하자.나는 비포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비포 선셋>을 가장 좋아한다. 여자와 남자 주인공 둘만 나오는 영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둘이서 수다 떨면서 걷기만 하는 영화인데 이게 어찌나 좋은지. 아마도 서로에게 가장 충실하고 서로가 서로만 관심있어하고 서로가 서로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편에서는 낯선 너와 내가 만났고 2편에서는 너와 내가 9년만에 너와 나
 
 
건조기후 2016-04-2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을 건네면 들리는 거리였지만, 왠지 두 사람 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역시나 둘 다 뜻대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눈물 나려고 하네요. 제 목이 다 막히고 얼굴이 굳는 느낌...

전화번호 쪽지는 이해가 돼요 ㅎㅎ 간직하고 싶잖아요. 직접 적어준 필체도 손자국이 묻은 종이도. 내가 외우거나 옮겨적은 번호 말고 적어준 번호를 보고 그 번호대로 연락을 해서 만나고 싶은... 더 완벽한 인연을 위한 고집이랄까요 ㅎㅎㅎ

다락방 2016-04-25 17:55   좋아요 0 | URL
처음 읽으면서는 별 거 아닌 것 같은 소설이었는데 읽다보니 마음을 움직이더라고요. 이들이 어서 만났으면, 만나고나니 어서 빨리 뭔가 특별한 관계가 되었으면, 싶어지는 거에요. 휴... 건조기후님은 인용문 만으로도 움직이셨네요. 건조기후님 조으다.. ♡

당연히 그의 손글씨 하나라도 간직하고 싶죠. 그리고 그거 보고 전화하고 싶고요. 더 완벽한 인연을 위한 고집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여요. 그렇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니까...그거 보고 전화하겠지만, 일단 써두고 외워뒀으면..그랬으면..

그런데 이게 다 운명의 흐름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러니까 9년전에 이 남자를 나한테 딱 던져주고 잠깐 만나게 한 뒤에, 너는 오랜 시간 후에 이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될거야, 일단 얼굴이나 미리 봐둬, 하는 그런 흐름이요. 그리고 그 때 그들이 금세 연락하고 만났다면, 그 마음이 커지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저 위에 95쪽의 인용문 보면 나오잖아요. `이루지 못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미화되게 마련`이라고요. 그들은, 그 타이밍에 만났어야 했을 거에요. 사실은, 전화번호를 잃어버렸으므로 거기서 끝날 운명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 사연속의 주인공들은 서로를 강하게 원해서 원하는 방향 쪽으로 움직인거죠. 저는 운명과 운명의 흐름을 어느정도 믿지만, 거기에는 자신의 의지로 바뀌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음..댓글이 왜 이지경까지 됐죠??

꿈꾸는섬 2016-04-25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곤한 오후였는데 다락방님 글 읽으며 엄청 웃었어요.
그렇게 소중한데 외웠어야죠. 다른데라도 메모해뒀어야죠.ㅎㅎ

베트남 쌀국수 먹고싶어요.

별관계 아닌 남자의 향수 냄새 ㅎㅎㅎ맡아도 되는거잖아요. 주변 사람들 좋으라고 뿌리는거 아닌가요? 향수ㅎㅎ 전 남자들 은은한 스킨향이 좋더라구요. 강한향말고 은은한향요.

다락방 2016-04-25 17:5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사람들이 왜이렇게 꼼꼼하지 못하고 소중한 인연을 그냥 쉽게 얻으려고 할까요? 노력을 해야죠. 수첩에 적고 머릿속에 기억하는 노력!! ㅎㅎㅎㅎㅎ

맞아요, 꿈섬님. 누구나의 향수냄새를 맡아도 되죠. 맡으라고 뿌리는 거니까요. 게다가 전 향수냄새 진한 것도 좋아해요. 전 땀냄새보다는 진한 향수냄새를 선호합니다. 향수냄새 맡는 거 좋아해요. 그런데 아까는 순간적으로, `이남자 향수냄새 따위 맡고싶지 않아, 콧구멍을 틀어막아버리고 싶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들어서요 ㅜㅜ

2016-04-27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27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28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28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4-29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소중한 건 외워둬야 하는데 인생이란게 맘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다락방님은 일상은 힘이 세다고 하셨지만 추억도 힘이 세요. 말씀하신대로 미화되니까요. 어쩌면 그런 가능성, 있었을 법한 가능성에 대해 자꾸 생각하고 되뇌게 되는 것은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뜻도 되겠죠? 마음이라는게 뜻대로 되지 않지만요. 브로큰 잉글리시 저도 무척 좋아해요. 포지 파커의 섬세한 연기도 좋았지만 멜빌 푸포를 미국 영화에서 봐서 더 놀란 것도 있어요. 저는 이 배우를 프랑수아 오종의 타임 투 리브에서 처음 봤는데 십년이 지나 브로큰 잉글리쉬에서 봤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미모가 예전같진 않았지만 ㅜㅜ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는 두사람이 거리를 걷다가 남자가 i`m hungry라고 하는데, 여자는 i`m angry로 듣고 깜짝 놀라는 거예요. 불어에서 h가 묵음이거든요. 두 사람이 분명 호감을 느끼는 중인데 약간 쭈뼛쭈뼛한 분위기, 어색한 와중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오랜만에 느끼는 로맨틱한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서툴러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좋았어요.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건 여자가 친구를 먼저 보냈던가요? 파리에 남아서 이젠 할 만큼 했다! 하고 맘편히 관광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자를 만나게 되잖아요. 남자가 반가우면서도 약간 황당한 얼굴을 하는데, 여자가 미국에 돌아갈 거라고 하니까 조금 화냈던가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만났는데 넌 지금 집에 간단 말이야? 그 복잡한 감정이 드러난 얼굴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오종 영화에서 시한부 인생을 연기한 멜빌 푸포의 미모 감상하세요 ㅜㅜ https://youtu.be/qW7AdifqU2g
찾아냈어요! 마지막 장면... 다시봐도 좋네요ㅜㅜ https://youtu.be/rN8DOKphMDc

다락방 2016-04-29 12:03   좋아요 0 | URL
아아 에이바님 ㅠㅠ 에이바님 사랑합니다 ㅠㅠㅠ 에이바님도 이 영화를 좋아하시는군요! 아아 반가워요 진짜 ㅠㅠ 전 이 영화 진짜 너무 좋아해요. 처음에 극장에서 보고 친구랑 바로 레스토랑으로 직행해서 와인 마셨었어요. 이 영화 보면 와인이 너무 마시고 싶더라고요. 저 남자 배우는 저 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엄청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올려주신 동영상보니 오오 꽃미모 청년이로군요. 근데 전 짧은 머리가 더 좋아요. 저는 어른이 되고나서는 남자들 짧은 머리가 좋더라고요. ㅎㅎ

저도 앵그리 헝그리 기억해요! ㅎㅎ 그러고 같이 까페엔가 갔을 때 여자가 전남친 맞닥뜨리잖아요. 그리고나서 막 기분 안좋아서 집에 와서 혼자 우울해하고 우니까 이 멋진남이 `옆에 있어줄까요 나가있을까요` 물어보는게 그때도 너무 좋았어요.

마지막 장면 진짜 압권이죠, 저 완전 사랑해요. 저는 이 영화 너무 좋다고 노래를 불러가지고 친구가 dvd 도 선물해줬어요. 그래서 가지고 있어요. 누구 빌려주지 않았다면 여전히 집에 있을 거에요. 힛.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아 저 이 영화 너무 좋아요. 굿 다운로더 있나 보고 다운도 받아놔야겠어요. 왜냐하면 너무 좋은 영화니까요. 아하하하하.

에이바님 사랑합니다. 에이바님은 진짜 짱멋진 것 같아요 ㅠㅠ

잠자냥 2022-07-22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까지 와서 , ˝콧구멍을 확 틀어막아버리고 싶다˝에서 빵터짐요.....
아, 저 <브로큰 잉글리시> 남 배우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멜빌 푸포네요?
전 저 남자 나온 영화 <타임 투 리브>랑 <여름 이야기> 봤던 기억이 나요
참 느낌도 좋고 잘 생겨서 ㅋㅋㅋㅋ <브로큰 잉글리시>도 분명히 본 거 같은데.... 와, 이 영화는 1도 기억이 안나네요;;

공쟝쟝 2022-07-24 20:2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여기까지 왔어요 ㅋㅋㅋㅋㅋㅋ 멀리서 오셨네요ㅋㅋㅋㅋ 전 2016년의 다락방님이 남자 향수 좋아하는 이야기가 너무 놀랍네요.... ㅋㅋㅋㅋ 무슨 사상적 전환(?)이 생겨서 이렇게(?)되신겁니까.. 저 브로큰 잉글리쉬 보고 싶은데.... 와샤에도 넷플에도 없고... 어디서 봐야할지 알 수가 없네요.... ㅋㅋㅋ
참... 잊지 않고 소중한 건 외우도록 하겠습니다. 010....

다락방 2022-07-25 08:05   좋아요 1 | URL
잠자냥 님/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위의 에이바 님도 그렇고 이미 멜빌 푸포를 아시더라고요. 저는 이 영화로 처음 봤어요. 물론 그게 오만년 전이지만... ㅋㅋㅋㅋㅋㅋㅋ코엑스 에 메가 박스 있었을 때..(지금도 있나?) 아무튼 이 영화 저는 너무 좋아해서 디비디도 있답니다? 껄껄.

공쟝쟝 님/저 진짜 남자의 단단한 육체(‘단단한‘에 밑줄 그어주세요)와 향기(냄새 아닙니다)에 대환장하는 여자였어요. 사실 그건 지금도 변치 않아..단단한 육체에 환장하는 편. 흑흑.
브로큰 잉글리시 둘다 없나요? 힝 ㅜㅜ 검색해보니 네이버로도 볼 수 없네요.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