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좋은 친구로 지내자는 식으로 괜히 멋진 척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앞으로 서로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 가서 또 언젠가 어디에서 소중한 친구로 재회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
하루카는 시게유키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은 말고 병을 고치는 데 전념하면 좋겠어"라고 응해왔는데 왜 그런지 더 이상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게유키의 진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루카의 머릿속에는 내내 사실은 시게유키가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더 기댔던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칠 년 동안 타이완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시게유키라는 존재가 일본에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p.491)
'하루카'에게는 오랜 연인 '시게유키'가 있다. 타이베이로 발령받아 일 때문에 오게 됐지만, 휴가를 내서 간혹 시게유키가 있는 도쿄로 가 그를 만나고 오곤 했다. 메일을 가끔 쓰고 전화를 가끔 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는데, 시게유키가 언제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멀리 있어서 바로 알아채진 못했지만,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간을 내 그를 찾아간다. 그녀에겐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오래전 타이베이 여행중에 만난 남자 '렌하오(에릭)'이 있지만, 그에게도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만큼, 그래서 그와는 연인관계로 발전하지 않을만큼, 그만큼 오래된 연인 사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들 사이에 뜨거운 사랑이라든가 설레임이라든가 하는 것은 없어진 것 같았다. 게다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시게유키는 기분이 순식간이 바뀌곤 했던 터라, 자신의 연인이 힘들것 같아 '헤어지자'는 뜻을 밝히지만, '하루카'는 '이렇게 시게유키가 힘든 상황에 나마저 그와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의 헤어지자는 말들을 그냥 넘겨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그에게 부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게유키의 건강이 어느 정도 좋아졌을 때, 그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는 그녀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제야 스스로를 인정한다. 그가 자신에게 기댄 게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기대고 있었음을.
'애인' 혹은 '연인'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때로 그 사람의 성격이나 그 사람을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런 포지션에 누군가 '있다'는 것 때문에, 그러니까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 때문에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딱히 이제는 더이상 사랑한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애인이 있다, 하는 것이 단단하게 스스로를 받쳐주고 있을 때가 있는 것이다. 하루카가 일본에 있는 연인과 7년간이나 떨어져 있으면서 다른 남자들을 만난다거나 외롭다거나 하지 않고 일에 열중할 수 있었던 건, 분명 '아 매일매일 더 사랑해' 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아니어도, '내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휴가 때마다 자신의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 중에 얼마간의 시간은 애인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자주 연락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어쨌든, 사귀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 '존재'의 고마움 때문에 그녀는 헤어짐을 미루고 또 미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걸 깨닫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분명 필요할 거라고 생각을 했을 거고. 칠 년을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연애를 했고 그 전에도 같은 나라에 살면서 연애를 했다. 그 시간은 분명 긴 시간이었으나, 그들은 이제 이별을 했다. 죽을것처럼 좋아했던 사이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 오랜 관계가 돌아서버린 지금,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왔던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마음이 휑할것이다.
'하루카'는 아주 오래전 타이베이에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그 나라의 대학생 '에릭'으로부터 길 안내를 받게 되고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된다. 바로 다음날이 일본으로 출국하는 날이라 아쉬운 마음을 안고 헤어져야 했는데, 그때 에릭은 연락하라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그녀에게 건넨다. 자신이 공항으로 타고 가야 할 버스까지 배웅을 나온 그에게 버스안에서 꼭 전화하겠다고 한 뒤에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일본으로 돌아와 가방을 샅샅이 다 뒤지고 또 뒤져고 그로부터 건네받은 종이는 없다. 그녀는 전화번호를 주지 않은 상황에서 그에게 연락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녀는 그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연락할 수 없다. 이듬해에 다시 타이베이로 가, 그와 함께 갔었던 그의 아파트를 찾아보려고 하지만 아무리 그 근처인 듯한 곳을 서성여봐도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채로 내내 그를 그리워만 한다. 그렇게 그리워하며 그녀는 직장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일하다 타이베이로 발령을 받게 된다. 타이베이에 가서 일해볼텐가? 라는 상사의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곳에 애인이 있지만, 5년예정을 '1~2년쯤' 이라고 속인 후에 그녀는 타이베이에 간다. 그곳 직장에서 사귄 직장 동료에게도 나는 사실 그 때 만난 에릭이란 남자를 찾고 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라며 자신의 안타까움을 들려준다.
에릭은 에릭대로 그녀의 전화를 기다린다. 내일은 오겠지, 내일은 올거야, 분명히 전화한다고 했는데, 그 눈빛은 그 말이 진심이라 말했는데, 왜... 그래서 그는 그녀가 탄 비행기의 무사도착을 확인해보고 도서관에 가 일본 신문을 뒤적여보며 그녀의 이름을 찾고자 한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그러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되고 무작정 일본으로 간다.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면서, 연락처도 모르면서, 무작정 지진이 일어난 곳으로 가 혹시 '하루카'라는 이름의 여성을 아느냐고 물으며 그곳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그도 그 하루의 추억이 몹시 소중하고 가슴에 남아 늘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채로 그들은 9년이나 만나지 못하게 된다.
내가 어마어마하게 사랑하는 영화 『브로큰 잉글리쉬』에도 이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좀처럼 안정적인 연애를 하지 못했던 여자는 어느 파티에서 프랑스 청년을 알게된다. 이 젊고 키가 크고 잘생긴 청년은 잠깐 미국에 여행중이었는데, 그녀와 며칠을 함께하고는 이제 프랑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 그녀에게 함께 가지 않겠느냐 말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남자는 떠나면서 자신의 프랑스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간다.
여자는 자신의 삶의 터전이 미국이었으므로, 또 그 남자와는 며칠간을 함께 보냈던 것이므로 선뜻 그를 따라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가 그립다. 그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간다. 친구는 다른 볼 일이 있었고, 여자는 가서 그 남자를 만나리라!! 결심했던 것. 그러나 파리의 호텔에 도착해 그에게 연락하려던 그녀는 멘붕에 빠진다. 그가 적어준 전화번호가 쓰여진 쪽지를 잃어버린 것. 짐을 다 뒤져도 그의 전화번호가 나오질 않는다. 결국 그녀는 그가 프랑스 파리에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그를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파리의 며칠간을 오롯이 혼자 여행하며 보낸다.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거리도 걸어보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돌아갈 시간이 되어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향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항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그를 마주친다. 와우-
남자도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를 데리고 지하철에서 내린다. 그리고는 까페로 들어가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만나러 여기에 왔고, 그런데 나를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 돌아가려는 거에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랑 조금 더 있어요, 당신은 비행기를 놓치겠지만.
(아아 이 남자 진짜 너무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기꺼이 비행기를 놓치겠어!!)
아니, 그러니까 나는 답답한 거다. 소중하잖아, 소중한 번호잖아. 이 사람 꼭 다시 만나고 싶잖아. 그런데 내가 아는 게 그가 적어준 전화번호 뿐이라면, 그걸 좀 더 잘 다뤄야 하는 거잖아. 쪽지라면 잃어버리기 쉽잖아,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것을 쪽지로 가지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라도 잘 적어두어야 하는 거잖아. 왜 그 당연한 걸 안하는거지? 쪽지는 잃어버리기 쉬우니까 내 수첩에, 혹은 가지고 있던 책에, 일기장에... 어디든 적어 둬야 하는 거잖아. 어쩌면 그렇게 그 쪽지 하나만 달랑 믿고 있을 수가 있는걸까? 그러니까 9년간을 만나지 못하고, 파리에 가도 만나지를 못하잖아?
참 사람들 신중하지도 못하고 꼼꼼하지도 못하네...
내 경우엔 소중한 사람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도 저장해두지만 다이어리에도 따로 적어둔다. 사실 이렇게 해놓고서 번호를 외워버린다. 내가 외우는 전화번호는 한두개가 아니다. 필요한 번호는 외워버리는 거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사람일 진짜 모르는건데, 내가 아무리 꼼꼼하게 폰에 저장해두고 다이어리에 적어두어도, 폰도 다이어리도 없는 상황에서 급하게 전화를 해야 될 수도 있잖아? 그럴 때를 대비해 외워버리는 거다,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공중전화 밖에 없는 상황이라거나, 낯선 곳에서 나만 홀로 핸드폰이 없을 때, 누군가에게 빌려서라도 전화를 할 수 있도록 나는 전화번호를 외워버린다고! 아니, 그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왜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아? 내 경우엔 주소까지 외워버린다. 아니, 대체 왜 외우지 않는거야????????????????
이 사람이 소중하다, 이 사람에게 반드시 연락할 것이다, 싶으면 외워버리라고!!!!!!!!! 위워, 외워, 외우라고!!!!!!!!!!!
안타깝게 전화번호를 잃어버렸지만 그들은 정말 간절히 상대를 생각했다. 너무나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상대가 있는 곳으로, 실은 정확히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면서, 그 먼 거리를 움직인다. 그랬더니, 어떻게든 상대에게 닿았다. 닿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으면, 결국엔 가야할 곳으로 가게 되는 법. 전화번호를 잃어버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상대에게 닿는다. 그리고 그런 날이 오게될까, 라고 기대했으나 차마 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날이,
온다.
9년전 헤어졌던 그 호텔의 로비에서 그들은 재회한다.
드넓은 대리석 로비에 에릭이 오도카니 서 있었다. 로비에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하루카는 한눈에 그의 모습을 알아봤다. 에릭도 똑바로 하루카를 보고 있었다. 말을 건네면 들리는 거리였지만, 왠지 두 사람 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역시나 둘 다 뜻대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p.242)
에릭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구 년의 세월이 좁혀지면 좋겠다고 하루카는 생각했다. 나, 변했지? 늙었지? 자조하듯 질문이라도 할 수 있다면 마음이라도 후련해질지 모르지만, 물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이라며 하루카가 생각을 고쳤다. 에릭이 여기까지 와줬다고. 눈앞에 서 있는 에릭도 나와 마찬가지로 구 년 만의 재회를 기대해줬다고. 그 순간, 뭔가가 툭 끊어진 것처럼 긴장했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p.243)
무엇보다 좋은 건, 나만 상대를 그리워했던 게 아니라는 것. 나중에야 알게되지만, 에릭이 하루카를 걱정해서 고베로 갔듯이, 하루카도 에릭이 걱정돼 타이베이에 또 왔었다는 것. 상대방이 사는 나라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결국 흐르고 흘러 에릭이 일본에 살게 되고 하루카가 타이베이에 살고 있는 건, 서로가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 상대를 만났었으므로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마주 섰다는 것. 나의 간절함이 당신의 간절함이기도 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잖아,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타이완 신칸센 일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하루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렌하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도쿄에서 일하지는 않았을 거야."
설령 똑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그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단수이 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아파트를 찾던 내가 지금 여기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렌하오가 찾았던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찾았던 그가 여기로 와줬으면 좋을 텐데 하고.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은 역시 내가 찾아내지 못한 그였고, 그가 찾아내지 못한 나일 뿐이다. (p.404)
일상은 힘이 세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그리워한들,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하노라면 오늘은 내일이 되고 한달 뒤가 되고 또 일 년 뒤가 된다. 서로를 그리워하고 찾고 싶은 마음이 있었도, 둘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만의 다른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지금이 되었다. 이 책에서 하루카와 에릭의 이야기가 조금 더 비중이 많았으면 좋았겠다고, 조금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들에게 더 많이 차지하는 비중은 당연히 일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틈틈이 혹은 가끔, 어쩌면 '오랜만에' 연락할 수 있는 사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은 재회후에 일 년이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래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다. 이것도 나쁘지 않겠어, 어쩌면 이게 더 좋을 수도 있겠어. 이들이 구 년이나 지내고서야 만나게 된 건, 그게 더 나았기 때문일 수 있었을 거다. 그 편이 서로에게 더 좋아서. 이런식으로 상대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책을 읽는 내내 타이베이에 가고 싶어졌다. 하루카와 렌하오의 사연이 있는 타이베이에 가서, 하루카처럼 혼자 어슬렁 돌아다니다가 쑥- 음식점에 들어가 혼자 밥도 시켜 먹어보고 그렇게 지내보고 싶어졌다. 개인의 사연은 내밀한 것이라, 사실 그 사연이 아름답다한들 타인에게는 그다지 영향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 '익스트림'의 <when i first kissed you>를 듣고, 엠파이어에 가보고 싶었었다. 그 때부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나의 로망이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게이지'의 [스타킹 훔쳐보기] 시리즈를 읽고는, '할'과 '로라'가 재회했던 센트럴 파크의 벤치에도 꼭 가보고 싶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이 '겨울에 오리는 어디로 가지?' 궁금해했던, 그 센트럴 파크에 꼭 가보고 싶었었다. 그러나 내가 뉴욕에 갔을 때, 센트럴 파크에 가보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가 봤을 때, 거기에서 내가 아름다운 사연을 만나지도 못했고 아름다운 사연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이화동>에 꽂혀서 이화동에도 가봤지만, 그곳은 그저 작은 동네, 그 뿐이었다. 그들의 사연이 오로지 그들만의 사연인 까닭이다.
요즘에 베트남에 가야겠다고 자꾸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빌려주었던 베트남 국수여행 책을 다시 돌려달라 말했다. 그 책에서 국수가게가 밀집된 어느 지역이 있었는데, 거기가 어딘지 보고 짧게 거기로 갈 생각이었던 거다. 국수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베트남에 가서 국수를 먹으면 어쩐지 뭔가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거다. 그래서 베트남에 가야지 생각했다. 혼자서 멀리 나가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일단 가까운데부터 시작해서 먼 데로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계속 어딘가를 가고 싶어하고, 어딘가에 가서 다른 이의 사연을 만나고 싶어하고, 어딘가로 가서 그 곳의 음식과 술을 먹고 싶어하니, 혼자 가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 같았다. 내게는 좋은 여행 친구가 있지만, 언제나 타이밍을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을 맞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언제든 원하는 때에 원하는 시간만큼 원하는 곳으로 다녀오려면 혼자가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 가까운데부터, 그 시작은 베트남 국수여행으로!!!
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요시다 슈이치'의 책에서 타이베이에서 재회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니, 아아, 국수고 뭐고 그냥 타이베이에 가고 싶다..... 싶어지는 거다.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먹을 거 생각하면 베트남 가고 싶고 뭔가 마음이 애잔한 건 타이베이이니, 아아, 나는 어쩌란 말인가.
그러다 문득 역마운 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막 돌아다니게 됐을까. 어쩌다 나의 친구들은 막 지방에 있고 그렇게 됐을까? 친구 만나러 비행기 타고 부산 가고 기차 타고 대전 가고 ktx 타고 대구 가고 막...아아,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왜 자꾸 어딘가로 가고 싶어할까, 여행을 싫어하는 내가 아니었나.. 며칠전에 사주까페에 가서 사주를 봤는데, 사주 봐주시는 분이(이런 분을 도사님이라고 부르는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건가...) 내게 역마운이 있다고 하셨다. 사주에 원숭이랑 쥐가 있다고, 얘네들이 한 순간이라도 가만 있는 걸 봤냐고, 이 두마리가 함께 있으면 역마운이 있는 거라고.... 아...... 역마운... 이라고? 그런 게 나한테 있어?
어쨌든 베트남에 먹으러 갈 것이냐 타이베이에 사연을 만나러 갈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좀전에 다른 부서의 남자과장과 복도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나는 남자들 향수 뿌리는 거 너무 좋다. 향수 냄새도 좋다. 아, 향수 냄새 좋다, 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뭔가, 나랑 별 관계도 아닌 남자 향수 냄새 좋다고 생각하는 내가 갑자기 너무 짜증나서, 콧구멍을 확 틀어막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콧구멍은 제 역할을 너무나 잘해낸다. 콧구멍아, 관계도 없는 남자의 향수 냄새 같은 거 맡고 그러지마!!!!
이루지 못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미화되게 마련인지 이렇게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때 뻥 뚫린 구멍이 메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p.95)
곰곰이 회상하듯 중얼거리는 민스에게 "그래. 길지, 팔 년은"이라며 렌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스스로도 바보스러운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타이베이에서 고작 하루를 같이 보낸 일본 아가씨에게서는 그 후 연락이 없었다. 따져보면 그런 이야기는 쓸어버릴 정도로 많다. 그런데도 자기들의 만남만은 다르다고 굳게 믿었다.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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