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중한 사람의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아요?
거기에서 여기까지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일단 한숨 한 번 쉬고 시작하자.


나는 비포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비포 선셋>을 가장 좋아한다. 여자와 남자 주인공 둘만 나오는 영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둘이서 수다 떨면서 걷기만 하는 영화인데 이게 어찌나 좋은지. 아마도 서로에게 가장 충실하고 서로가 서로만 관심있어하고 서로가 서로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편에서는 낯선 너와 내가 만났고 2편에서는 너와 내가 9년만에 너와 나의 간절한 바람으로 재회했고 3편에서는 그런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세상을 함께 만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나는 이 시리즈가 그대로 사람을 그리고 인간 관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면에서는 3편도 참 좋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서 같이 여행하고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같이 얘기하고 같은 풍경을 나란히 앉아 보는 현재를.


후아. 

이 영화는 언제고 다시 보아야지 하다가 이번에 보게 된건데, 아니 좋아서 다시 보려고 했고 내가 좋아했던 것도 아는데, 다시 보는데 왜이렇게 좋은건지. 여자와 남자가 9년만에 만난건 우연이지만, 그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그러나 만나기를 원한 것도 사실이다. 첫 만남에서 9년이 흐르는동안 그들은 서로를 잊지 못했고 그래서 남자는 그것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썼다. 파리로 저자와의 만남을 하러 가면서 내심 어쩌면 그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기적처럼, 아니 그의 바람이 간절한 덕에, 그녀가 거기, 서점에 와 있었다. 남자는 이제 곧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공항에 가는 시간이 임박하기까지 내내 그녀와 이야기한다. 그들은 9년 만에 만났는데, 9년 전에도 고작 하루를 같이 있었을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다가 멈출 줄을 모른다. 9년 전의 일과, 6개월후 빈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 그 때 왜 그들은 재회하지 못했는가 부터, 어린시절의 이야기 현재 하는 일들, 미국의 총기 소지와 전지구적으로 환경에 관한 것들, 동유럽에서 잠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까지 대화는 여기에서 저기로 또 저기에서 저어어어어어어어어기로 통통 튀면서 이동하고, 정말이지 멈추지를 못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 과거의 어느 때로 돌아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한시간 남짓 있으면서 꼬박 둘은 이야기를 나누는거다. 찻집에 잠깐 들어가 커피도 마시고 담배도 한 대씩 피고 다시 센강 주변을 걷고 유람선도 잠깐 타고.


한 명이 그 때의 시간이 그리고 그 때의 상대가 그리워 글을 썼다면,

다른 한 명은 그 때의 시간이 그리고 그 때의 상대가 그리워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비행기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둘은 이제 여자의 집에 잠깐 들르기로 한다. 여자가 만들었다는 노래를 듣기 위해. 여자는 집에 도착해서는 차 한잔 줄까? 묻고 남자는 좋다고 한다. 그 때 여자가 차의 이름을 말하는데, 내가 영화를 다 보고 잠깐 '근데 그 차가 뭐였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네 글자였는데.


페퍼민트?

아니다, 민트 류가 아니었어. 내가 마셔본 거였던 것 같아.

로즈마리?

아니다.

라즈베리?

아니다.

아.. 네글자, 네글자였는데. 페퍼민트도, 로즈마리도 아닌 네 글자. 뭐지?

너무 기억하고 싶은데 생각이 나질 않아서 영화의 그 부분을 다시 돌려봤다.


캐모마일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캐모마일이라니.



여자는 남자에게 차를 끓여 주고, 노래를 들려준다. 그들은 함께 음악을 듣고 콘서트에 갔던 일을 얘기하다 여자가 춤을 추면서, 너 그러다가 비행기 놓쳐, 라고 말하는데, 남자는 이제 비행기 놓치는 것을 각오한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여기 있으니까. 내내 그리워하던 사람이 여기 있으니까. 그는 마지막에, 비행기를 놓치기로 한다.



왜 어떤 만남은 길지 않아도, 횟수가 많지 않아도, 그토록이나 강렬한걸까? 왤까?


















<비포 선셋>이 미국 남자와 프랑스 여자의 사랑이야기라면,

<브로큰 잉글리쉬>는 미국 여자와 프랑스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미국 여자는 미국에 여행온 프랑스 남자를 우연히 알게 되고 그와 같이 밤을 보내게 된다. 남자는 여자에게 '나 프랑스로 돌아가야하는데 너 같이 갈래?' 묻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혹시 프랑스에 오면 연락해, 라며 전화번호를 남겨준다. 


그녀는 프랑스에 간다. 그를 만나고 싶다. 프랑스에 도착했으니 그에게 전화만 걸면 되는데, 전화번호가 쓰여진 종이를 잃어버렸다. 내가 여기에 대해서는 엄청 안타까워하며 그리고 노여워하며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먼댓글 트랙백 참조)

여자는 남자의 전화번호를 찾지 못해 연락하지 못했고 만나지도 못했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시간을 홀로 보낸 후에 미국에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가는 길, 기적처럼 그녀는 지하철 안에서 그렇게나 만나고 싶던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지하철에서 내리고 그들은 그렇게 바에 들어간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녀에게 '그러니까 나를 만나러 왔지만 만나지 못했고 이제 돌아가려 한다는거냐' 물었고, 여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기 좀 더 있으면서 나랑 얘기 나눠요' 라고 말한 뒤에,


'당신은 비행기를 놓치겠지만'


이라고 덧붙인다. 그녀는 그렇게 비행기를 놓치는 걸 선택한다. 비행기를 예정대로 타고 돌아가는 것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와 보내는 시간이 그녀에게 더 큰 까닭이다. 그것은 찾아왔던 상대이기 때문일 것이며 기다리던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돌아가기로 예정된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갑작스럽지만 결국엔 선택한 것,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니, 돌아가야 해' 라고 말해서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정대로 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눈앞의 사랑이 커도, 내 눈앞의 상대가 간절해도,

예정된 비행기를 타고 가 내게 주어졌던 일을 다시 맞닥뜨리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물론 며칠, 설사 몇 달이라도 내가 없다고 세상이 엉망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내가 있던 곳에 혼란을 주는 일을 선택하길 원하지 않을 수 있다.

비포 선셋에서도 그리고 브로큰 잉글리쉬에서도, 상대가 비행기를 놓치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상대 때문에 비행기를 놓치는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건 사랑이었네, 사랑이 틀림없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라면? 나였다면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것이다. 돌아갔다가, 널 만나러 다시 올게, 라고 말할 것이고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충동적으로 너 때문에 여기 좀 더 있겠어, 를 선택해서 내가 하는 일이나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는 일은, 나는 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람이 너무 좋아. 그러니까, 



다시 만나러 올것이다.

만나러 올게.

만나러 온다고 말했으니까, 만나러 올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나의 상대가 비행기를 놓치지 않는다해도, 예정대로 타고 가기를 선택한다고 해도, '넌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라고 실망하지도 않을 것이고, 거기에 대해 서운하지도 않다. '너가 나를 사랑한다면 지금 떠나지 않을텐데'같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비행기를 놓치기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왔던 곳으로 예정대로 돌아가길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만 진실한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사실, 나는, 상대가 충동적으로 비행기를 놓치기보다는 예정대로 돌아가는 성향의 사람이기를 원한다. 나는 그 편이 더 마음이 끌린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다만, 갔다가 다시 올게, 라고 말만 해준다면, 그거면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온다고 말해놓고 오지 않을 사람은 아닐테니까. 세상에 자기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사랑하지 않으니까.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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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7-25 0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사실 종종 자주 봅니다) 전 이 투머치토커 커플이 정말 너무 좋습니다. 그들이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인 것 너무 좋고요. 저랑 동족이라고 생각해서 더 좋아합니다. ㅋㅋㅋ 대화를 섞는 것은 몸을 섞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정희진 슨상님께서 말씀 하셧쥬. 그건 너무 맞는 말이고, 그래서 저는 좀 대화 섞는 것에 헤픕니다. (몸 섞는 건 락방님 말씀대로 사주에 없는 걸로 합시다ㅋㅋㅋ 굳이 양자택일 할 필요는 없지만, 둘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저는 대화, 무조건 대화입니다) 저는 걸으면서 대화하는 것의 희열을 좀 압니다. 그리고 종종 길을 잃죠. 기꺼이 가던 길과 대화의 길을 함께 잃어주던 친구들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 거기에 낭만과 사랑을 더해버린 판타지 같은 영화... ㅎㅎㅎ 비 포 선 셋 -! 크으!

다락방 2022-07-25 10:47   좋아요 3 | URL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게 정말 미치게 해요. 너무 좋아요. 그런데 그게 좋을 수 있는건 이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게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지식배틀 같은거 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래서 리액션을 하잖아요. 특히 에던 호크 쪽이 더 여자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보는것 같아요. 여자는 좀 자제하는 것 같았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았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

clavis 2022-08-1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글이 너무 좋네요. 락방님..이렇고 저랬던 일들이 있었지만, 오늘의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건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