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있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업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나의 소중한 맥북으로-아직 할부를 한 달도 갚지 않은!!- 국회방송을 하루종일 틀어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필리버스터란 것이 무엇인지, 이번 기회로 나는 알게 되었다. 어? 필리버스터? 하고 용어에 대한 것만 알았다가, 의원들이 차례대로 발언하는 걸 보면서, 아 이걸 말하는구나, 하고 바로 그 뜻이 와닿았다. 이들은 악법이 만들어지는 걸 저지하려는 거구나. 필리버스터란 이런 거였어! 그래서 관심있게 지켜보고 싶지만, 낮동안 내내 회사에 있고 집에 가면 자기 바빠서 실상 내가 이걸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제는 퇴근길에 들었고, 집에 가서는 맥북으로 켜두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켜두었고, 그렇게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고 아침을 먹었고, 그리고 출근길에 들었다. 들으면서, 나는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됐다. 이를테면 테러방지법이 왜 나쁜 법인지, 국정원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그 과거에 박정희는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테러방지법을 왜 막아야 하는지. 막연하게 혹은 조금 알고 있던 것들을 그전보다 더 많이 알게 된 거다. 게다가 희망도 자라났다. 나는 국회의원이란 쌈질만 하고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 칠봉이는 '국회의원은 사실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하는 자리다' 라고 내게 말했다. 법에 대한 걸 공부하고 또 공부해서 새로운 법을 만들고 거기에 대해 의논을 하고 하려면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거다. 안그래도 이번에 발언하는 의원들을 보면서, 아 저들이 저렇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니, 저들이 안되는 것에 대해 저렇게 잘 알고 있었다니, 내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 미안해지기까지 하는 거다. 친구들이랑 그런 얘기를 나눴다. 그간 이런줄을 몰라봐서 미안하다고. 이렇게 계속 차분하게 자신의 말을 오래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좀 더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방송을 많이 보지 못했으니 텍스트로 좀 봐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미 많은 방송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깨알같이 기록을 해줘서 너무 좋다. 내 친구들과도 자꾸 얘기한다. 칠봉이랑도 자꾸 얘기한다. 필리버스터를 통해 박정희 시대의 강압적인 일들이, 그 수많은 간첩누명이 낱낱이 까발려졌고, 국정원이 한 일들이 탈탈 털렸다. 이렇게나 많은 말들이 차분하게 쏟아지고 있는데, 공중파 어디에도 여기에 대한 얘기가 없다. 오늘 점심 먹으면서 회사 직원에게 얘기했는데 필리버스터 자체를 아예 모르더라. 그러니까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거다. 그래, 어차피 이 방송은 관심 있는 사람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정작 읽어야할 사람들이 아예 읽지 않는 것처럼, 이 방송 역시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은 아예 듣지 않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만 하더라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행위라며 책상을 탕탕, 무려 이십분간이나!! 쳤다지 않은가.
아, 그런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아니고 ㅋㅋㅋㅋ 이런 필리버스터가 글쎄, 책 얘기도 해주신다. 어제 신경민 의원이 국정원에 대해 쓴 책을 가지고 나오시더니!
좀 전에 서기호 의원은 '코리 닥터로우'의 [리틀 브라더]를 소개했다!!
어머, 이게 뭔일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소설 책을 가지고나와 발언하는 전판사 국회의원이라니! >.<
나는 저 책을 안읽었는데, 읽어봐야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리틀 브라더]의 작가 '코리 닥터로우'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글을 썼다고 한다.
코리 닥터로우의 필리버스터 관련 글
책을 더이상 안사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그러니까 적어도 이번 해 만이라도), 이 책은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하하하하.
지금 통장에 잔고가 0이라서 내가 뭘 할 수가 없고, 월급을 받는대로 몇몇 의원에게 작게나마 후원금을 보내고 싶다. 내 친구들 여럿은 벌써 후원금을 넣었다고 하더라. 은수미 의원은 그렇게 1만원 2만원 찍힌 통장이 하루아침에 여덟개나 됐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발언자 중에 진선미 의원도 있어서, 진선미 의원이 하는 발언은 오롯이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강동구 에서 일하셔서 지난번엔 길동역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도 나눴다. 소라넷 이슈를 꺼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어야 했는데, 갑작스런 마주침에 당황한 나는 '응원합니다' 라는 말밖에 꺼내지 못해 못내 아쉽다.
스맛폰의 단톡창으로, 그리고 트윗의 창으로, 나의 다정한 벗들이 자꾸만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낸다. 어제 내가 국회방송을 볼 때 동시 시청자는 3만명이 넘었었는데, 지금은 2만5천명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모두 응원하고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의원들이 나와 연설을 하고, 그 연설을 들으며 나와 내 친구들이 희망을 갖고, 총선에 기대를 하고, 그리고 지금 이 자체를 좋아하며 반응하고 있다는 것들이 모두다 너무 좋다. 고맙다. 어제 낮에 방송을 보던 친구는 못보고 있어 안타까워하는 나에게 '너 보면 난리날거야!' 라고 말해주었는데, 이런 모든 반응들이 난 참 좋다. 나의 다정한 벗들과 혹은 나의 형제들과 혹은 칠봉이와 함께 앉아 이 방송을 같이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린 같이 흥분하고 같이 소리지르고 같이 울 수 있을텐데. 또, 같이 욕하기도 하면서.
몇 해전 선거에 어린 조카의 손을 잡고 투표하러 갔던 일이 새삼 떠오른다. 그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나는 투표 현장으로 갔다. 투표하러 다녀올게, 란 말에 '이모 따라갈래' 라고 그 어린 아이가 얘기해서,-아마도 세살이었을 나의 조카!!- 그 작은 손을 잡고 내가 투표하러 갔던 일, 그 일이 얼마나 스스로 자랑스러웠는지가 새삼 생각났다. 투표하기 위해 줄을 서있던 어른들이 모두 내 조카 예쁘다고 난리법썩인데, 나는 그렇게 예쁜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투표하러 왔다는 데에서 어마어마한 기쁨을 느꼈다.
강기정 의원은 발언의 마지막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필리버스터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장면이었다.
이제 나는 어떤 국회의원들은 열심히 일하고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희망이 생겼다. 믿음도 조금 가져본다. 나도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