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연휴동안에 조카들이 와있었다. 내가 준 도라에몽 다이어리를 잘 쓰던 조카 녀석들. 이 작은 것들이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리고 뭔가 쓰고 낙서를 하는 걸 보노라니 정말 예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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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도라에몽 다이어리에 그려진 자동차는 내가 그린 거..이모 솜씨. -0-
일전에 알라디너 ㅂ 님으로부터 조카 선물로 퍼즐을 받았더랬다. 조카를 준다고 해놓고 깜빡 잊었다가 어느날 밤에 내가 한 번 해봤다. 어릴 적에 한퍼즐 했었는데, 그래서 나는 내가 참 머리가 좋고 퍼즐을 잘 맞추는 사람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만년이 지나 해보는 퍼즐은 진짜 어려웠다. 작은 퍼즐 하나 맞추는 데 오만년 걸렸어..하아- 게다가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아, 나는 똑똑하고 퍼즐 잘 맞추는 여자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냥 어릴 적엔 다 퍼즐 잘 맞추는 건가... 아하하하하하하. 어쨌든 조카가 왔을 때 내가 했던 퍼즐을 내미니, 그대로 뒤집어서는 차례로 하나씩 끼워맞추더라. 야!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그냥 내비뒀다. 자기 집에 있는 퍼즐을 엄청 잘 맞추던데, 이렇게 일단 있던 모양 그대로 한 번 씩 해 본 뒤에 익혀서 하려는건가 싶어서, 그대로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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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에몽 다이어리를 소중하게 들고 다니면서, 어디서나 거길 펼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서, 여섯살 조카는 이모 좋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모는 나한테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어. 그치?
응, 이라고 답하며 나는 놀랐다. 이 작은 아이가 그런 걸 다 알고 있다는 데 흠칫 놀라서. 아이의 부모도 할미도 오랜 시간 붙어있다보니 아이에게 화내는 경우가 생긴다.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잘 되는 게 아니다. 나 역시 아이에게 화나는 경우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어쩌다 한 번 보는거니 그걸 참는 게 가능한 것일뿐. 어쨌든 아이에게 '나에게 한 번도 화내지 않는 사람' 이라는 인식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쯤은 그런 어른이 있어도 좋지 않은가. 내가 무얼 해도 화내지 않는 사람, 이 나를 사랑해준다는 걸 아는 건 좋지 않은가. 나는 무조건적인 네 편이야, 라는 인식을 아이에게 심어줄 수 있었을까? 저 작은 아이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들이 있을까?
이모는 나한테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어, 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래, 화내지 않는 어른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건 중요하지'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기욤 뮈소 소설의 이런 구절이 생각났다.
"그렇긴 해도 이 불안한 세상에서 제시를 돌봐주는 어른이 셋이라면 그리 많은 게 아니잖아." (p.367)
무조건 적인 사랑,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한 명쯤 있는 건 필요한 일이 아닐까.
아이들의 할머니인 우리 엄마는 아이들을 사랑하시는데, 정말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걸 끊임없이 다정하게 표현하신다. 가만 보고 있노라면, 우리 엄마, 어릴 때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을 준걸까, 싶을 만큼 신기하고 큰 사랑이라, 여동생과 남동생과 나는 간혹 그런 얘길 한다. 우리가 자존감이 높고 늘 당당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충분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빈번하게 엄마랑 다투고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또 서로 답답해서 상대를 설득하려 들기도 하지만, 얼마전에 엄마한테도 말했다. 엄마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거 너무 잘 느껴지고, 충분한 사랑을 주고 있다는 게 다 보여. 엄마는 그걸 참 잘하는 것 같아. 그래서 아이들이 할미라면 끔찍이도 좋아하는 것 같고. 엄마가 아이들한테 참 잘해줘서 너무 좋아, 라고.
어제는 이런 이야기들을 여동생과 나눴다. 여동생도 엄마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잘해주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치, 모성이 자연발생적인 게 아닌데, 엄마는 아이들이 사랑받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충분한 사랑을 듬뿍듬뿍 줘, 엄마의 큰 능력이야, 라고. 여섯살 조카가 내게 '이모는 내게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어' 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나자 여동생은 고맙다고 했다.

여섯 살 조카는,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내가 너무 좋아' 라며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기를 바란다. 계속계속 사랑해줘야지.
:)
주말에는 대전에 친구들을 만나러 다녀왔다. 친구1과 기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 안에서 읽으려고 나는 책을 두 권이나 챙겨왔는데, 아, 친구님하... 친구는 '널 보여주려고 가져왔어' 라며 자신의 아이패드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친구가 유료결제한 성인만화가 가득가득... 아, 친구야.. 나는 처음으로 성인만화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곳은 실로 놀라웠다. 나에게 에로틱한 컨텐츠는 영화나 책이었고, 또 에로틱한 장면들은 언제나 나의 머릿속에서만 생생했는데, 아아, 눈 앞에 이것은 뭐여... 아, 성인만화의 세계.. 나는 친구의 아이패드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고, 얼마 보지도 않았는데 대전에 도착해서 너무 서운했다. 그리고 대전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 기차에 앉자마자 친구 1에게 아이패드 줘, 라고 말하고 다시 성인만화에 몰두했다. 아, 이 끈적끈적하고 에로틱한 세상이여... 친구님하, 너는 왜 나에게 이런 세상을 알게 했니...날더러 이제 어쩌란 말이니...나는 이제 책사고 영화보고 술마시는 돈을 아껴서 성인만화 결제해야 하는거니... 하앍- 긴긴밤 한 허리를 뎅강 잘라내어 성인만화를 보며 눈알 빠지는 날들이 많아지려나... 세상.....아, 인생.....
친구들과 마트에 가서 먹을 거리 마실 거리를 실컷 샀다. 그리고 우리는 호텔 테이블에 차려놓았다. 크-

연어회와 광어회, 문어까지.. 양질의 안주들. 아하하하. 딸기와 토마토 바나나 귤 과일들 잔뜩. 샐러드까지. 훌륭한 상차림이었다. 그러나 저 날 우리가 가장 맛있게 먹은 메뉴는 뭐니뭐니해도 사발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다음에는 그냥 이것저것 사지말고 사발면만 살까?' 라고 말하며 낄낄거렸다. 저기 보이는 열라면이 내 것, 참깨라면은 친구1의 것, 새우탕면은 친구2의 것. 나는 마트에서 당연히 진짬뽕 사발면을 사려고 했는데 그건 아직 사발면으로 안나왔나 보더라. 시무룩... 요즘 진짬뽕에 흠뻑 빠져있는데 사발면 없어서 서운했어. 시무룩. 다음 모임 때까지는 나와줘...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한껏 수다를 떠는 것은 너무나 즐겁다. 분명 삶의 활력소가 된다. 일상을 버티는 힘은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오늘 아침에 칠봉이랑 통화를 하는데 그 이른 아침에 통화하면서도 우린 서로 웃었다. 별 거 아닌 말들로 웃으면서, 아, 아침부터 당신이랑 통화하니 흥겹네, 라고 말하고 칠봉이도 그렇다고 했다. 좋은 사람과 별 거 아닌 얘기들을 하면서 웃을 수 있다면, 그건 나름대로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월요일인 오늘 일이 아주 많을 거라 일요일 오후부터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어젯밤엔 잠도 제대로 못잤는데, 잠을 제대로 못자면서 또 '이렇게 잠을 못자면 내일 컨디션 엉망일텐데' 라고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웃으며 대화를 하니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좋은 시작이었어, 다 괜찮을 것 같아, 잘 지낼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가지 것들을 앞으로의 시간에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조금만 더 기다리면 거기에 갈 수 있어,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걸 할 수 있지 등등.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고, 그 기다림에 대한 기대로 연속성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지금 당장은 수요일에 연어회 먹으러 가기로 한 걸 기다리고, 목요일에 조카들이 오는 걸 기다리고, 토요일에 친구와 콘서트 가기로 한 걸 기다린다. 2월달에 있을 친구의 결혼식을 기다리........고 싶지만 다이어트 어떡하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예쁘게 하고 가고 싶은데 지금 상태로는 곤란하고 다이어트는 하기 싫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새로운 옷도 한 벌 사서 입고 가고 싶은데, 사이즈 줄여서 사는 게 목표였는데... 사실 또 삶이 그렇게 내뜻대로 잘 되는 건 아닌것 같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니, 근데 친구 결혼식을 내가 왜 기다리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참 이렇게 삼십년 이상을 살아왔는데도 나는 여전히 나를 잘 모르겠다.
아침에 잠깐 다른 부서에 갔더니 임원1이 막 다녀간 상황, 임원1이 풍기는 냄새가 사무실에 진동했다. 담배 냄새를 가리기 위해 본인에게 페브리즈를 뿌리는 데 그 냄새가 정말 .. 환기가 필요할 정도로 싫다. K 대리와 업무상 얘기를 하는데 K 대리가 이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는데 차장님이 오니까 차장님에게서 향기가 나서 너무 좋아요, 라더라. 그래서 내가 한 바퀴 돌아줬다. 많이 맡아...라고 말하며...
(페이퍼의 제목은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 가사 일부 인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