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일어나 저울위로 올라가니 몸무게는 늘어있었고 아, 정말 지겹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 요란을 떨며 다이어트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올라갔다 제자리 올라갔다 제자리 하는 건 정말 지겹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 몰라, 그냥 돼지가 되는 편을 택할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으로 가 내가 타야 할 버스 130번을 기다렸다. 앱을 조회해보니 2분 후에 도착이었다. 그런데 저기, 내가 타야할 버스 130번이 오고 있다. 어? 2분 기다려야 하는데 벌써 왔네, 하면서 탔다. 어차피 몇정거장 안가고 내리기 때문에 내리는 문 쪽의 의자에 앉으려는데, 으음, 구조가 다르다. 으응? 왜 안이 마을버스처럼 생겼지? 그동안 탄 거랑 다르네.. 뭐 이런 버스도 있고 저런 버스도 있지,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깐 친구랑 메세지를 주고받다가 창밖을 내다봤는데 어...뭔가 낯설다...으응? 이런 데를 지나갔나, 원래? 하고 기웃거리는데 방송이 나온다. 지금 내려야 할 정류장은..아, 여긴 어디냐. 다음 정류장까지의 방송을 듣다가 벼락같은 깨달음! 나는 지하철 역을 가는 버스를 탄 게 아니라 지하철역으로부터 멀어지는 버스를 탔어...아......어떻게 이런 일이! 버스가 정차하자마자 부랴부랴 내려서는 무단횡단을 하고 택시를 잡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른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는 강동역이요, 라고 외친다. 아아, 무슨 일어 일어난거냐. 내가 탄 버스는 3212 초록색 마을버스였다. 아니, 이걸 왜 나는 파란색 130번 버스라고 생각하고 막 타버린거지? 하아- 아침부터 의욕상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사실 어젯밤부터 기운이 없고 피곤해서 일찍 잤는데, 새벽에 여러차례 잠을 깼다.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엉망이야... 방금전에는 거울을 보다가 새치를 발견했어...
아침부터 나랑 수다를 떨던 친구는 나의 이런 저조한 컨디션에 대한 상황을 듣고는 오늘은 여유롭게 아무 생각말고 달달한 커피를 한 잔 마시라며 커피 쿠폰을 잽싸게 날려주더라.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에 회사 근처에서 마끼아또로 바꿔서 마셨다. 기분전환삼아 샷을 하나 더 추가했는데, 마끼아또는 오늘 내 생각만큼 나를 기분좋게 해주지는 않네?
그리고 어제 도착한 알라딘 택배박스. 어제는 바빠서 풀어보지도 못했기에 오늘 풀어봤는데, 내가 이런 책을 샀네, 하며 심드렁해진다. 삶은................뭘까?
책을 읽고 있다. 최근에 조카 때문에 아이들이란 어떤 존재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던 차에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 고른 책이다.
며칠전에 시사인에서 읽은 정헤신의 글에서처럼 '아이들은 스스로가 이미 강한 존재이다' 라는 걸 역시나 말해주고 있다. 아이들은 우리가 무조건 걱정하고 참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스스로 자라나는 존재들이다, 어른과 같은 존재다 같은 것들. 그런데 저자가 말한 아이들에 대한 '지배욕'을 내가 갖고 있는 걸까, 저자의 말에 '아 정말 그렇구나!!'하고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기 보다는 '흐음, 그런가...'하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그래, 그렇긴 하지, 음, 그런가....하면서 적극적인 호응을 하게 되지는 않는달까. 아직 이 책의 90페이지까지 밖에 읽지 못했으니 더 읽어봐야 할 일이다.
그러다 이런 구절을 읽게 됐다.
집안일을 도와주고 아이가 부모에게 돈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이것에 위화감을 느긴다. 집안일은 가족 모두가 분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때마침 그때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것이 공동생활일 게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쇼핑도 요리도 할 수 있다. 귀찮아 할 때도 있지만, 재미있어 할 때도 많다. '일을 도와주고' 돈을 받는다는 것은 집안일은 어른 일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게 아닐까. 하물며 '가사는 엄마 일'이라는 역할 분담의 고정관념에 매여서는 곤란하다. 일하고 적더라도 돈을 얻는다는 것은 집 바깥, 즉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p.51)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집안일이라는 것은 아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 모두가 살아가는 곳이니 '함께'해내가는 것이지 '엄마의 일'인데 '도와주는 것', '아내'가 할 일인데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은 자체가 틀렸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공간에서 모두가 함께 화장실을 사용하고 밥을 먹고 있으니 청소를 함께 하고 설거지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돈을 벌게 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는 것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 일을 했으니 돈을 줄게' 하는 것은,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임을 암시하는 것일 게다. '당연히 너도 함께 해야 하는 일' 이 아니라. 그러니까 다 알겠는데,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자기의 용돈을 챙겨야 할까. 집안 일은 같이 하는대로 하고, 용돈은 용돈의 개념으로 줘야 하는걸까. 저자의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일을 하고 싶어해서 중학생 때 외갓댁 목장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음, 그래, 이건 분명 긍정적이고 좋은 효과를 주겠지만-내 몫의 일을 한 뒤에 거기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일을 할 환경은 사실 조성되어 있기가 힘들지 않은가. 저자의 어머니(아이들의 할머니)가 목장을 했기에 청소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었지, 다른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일을 할 환경 자체가 힘들텐데,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현명한걸까?
그러다 아주 오래전에 본 '이반카 트럼프'의 일화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도널드 트럼프'라는 어마어마한 부자인데다 그녀도 젊은 나이에 재벌이 되었는데-당연하겠지..-, 한 토크쇼에 그녀가 나와서 그런 얘길 하더라.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내게 그냥 돈을 주지 않았다, 반드시 심부름이라든가 집안 일에 대한 대가로 돈을 주었고, 나는 그렇게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사고 싶은 걸 사야 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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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반카 트럼프는 '나는 그렇게 앉아서 낼름낼름 돈을 받아먹은 게 아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어떤 의도로 그 말을 했는지는 알겠다. 그렇지만, 이반카 트럼프가 심부름하고 받은 돈은 내가 심부름하고 받은 돈과 같을까? 절대적인 면의 액수에서도 또한 상대적인 면의 액수에서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 않을까. 구체적으로 1달러를 줬다던가 100달러를 줬다던가 하는 얘기를 하진 않았지만, 분명 내가, 혹은 보통의 아이들이 받았던 100원 200원의 돈을 받았던 건 아니지 않을까. 어쩐지 빡쳐....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가지고 태어나야 돈이 많아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고, 내 돈은 내가 벌어야만 먹고 사는 것도 내게는 당연한 얘기이고, 모두가 다같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게 아님도 역시나 당연한 얘기인데, 이런 어마어마한 격차가 벌어지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대단히 빡치는 것이다.
일전에 집에 소파가 낡아 새로 사야할 일이 있었을 때, 아버지는 나와 남동생에게 10만원씩 보태라고 하셨더랬다. 너희들도 앉는 소파, 라는 게 아빠의 주장이었다. 그 전날 나는 2천만원짜리 시계를 한 방에 결제하고 사는 사람을 보았는데, 왜 나이가 비슷한 우리 아버지는 몇십만원짜리 소파를 혼자 사지도 못해 자식들에게 돈을 보태라하고, 왜 어떤 아버지는 2천만원짜리 시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나...하고 대단히 빡쳐서 한 이틀간을 보냈던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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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이들에 대한 책을 읽다가 왜 나는 갑자기 빈부격차로 인해 빡치고 있지.....이반카 트럼프 때문이야....하아- 왜 하필 이반카 트럼프가 생각난거지..왜지......저리가,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사라져버리란 말얏! 꺼졋!
아이는 필요한 것을 직감으로 안다. 훗카이도의 동생 부부 집은 나중에 둘째 아이도 혼자서 오랫동안 머무른 적이 있고, '반가출'할 곳으로 꽤 유용했다. 그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을 만큼 고마운 장소였음에 틀림없다. 동생 부부는 그냥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아이들을 받아줬던 것이다. 어른들이 서로 자신의 아이 말고 다른 집 아이들의 가출처 노릇을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64)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반가출해서 찾아올 수 있는 곳. 찾아와 며칠 머무르다 갈 수 있는 곳. 혹여라도 나중에 내 조카들이 제 부모와 말다툼을 했다거나 서로가 서로를 이해시키지 못해 답답할 때, 어딘가로 잠깐 떠나있고 싶을 때, 그때 내 집을 찾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별 말은 하지 않아도 그냥 서로 맛있는 것 먹고 편히 자고 그러면서 아이의 마음이 한결 나아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머무르는 집이 내 조카들의 가출처 노릇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일단 내가 독립을 먼저 해야.... 킁.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어쩐지 동의할 수가 없다.
아이는 언제 어른이 될까? 어른과 아이는 다르다며 새삼스럽게 상하 관계로 등급을 매기는 것은 거북하다. 그렇다고 두루뭉술하게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신체적인 특성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세대, 즉 아이를 세상에 보낼 수 있는 몸인지 아닌지 하는 큰 차이다.
이 변화는 신체에 반드시 찾아온다. 그래서 이것을 바탕으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면 매우 알기 쉽고 자연스럽다. 여자아이는 월경, 남자아이는 사정射精의 시작이라는 구분. 어른의 몸이 되는 명확한 변화이다. 나는 이 단순한 변화의 시기가 아이와 어른을 가르는 납득할 만한 유일한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보면 세상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참 희한하다. (p.69)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방법이 월경과 사정이라니, 이건 좀...납득이 되질 않아.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희한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어째서 그게 어른과 아이를 가르는 유일한 구분이라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질 않는다. 월경하고 사정하면 .. 이제 '어른'이라는 건가. 암튼 나는 이 견해에 대해 매우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저자가 참 희한하다.
그나저나 며칠전 책방출 받으신 분들은, 다들 제대로 받으셨는지요? 몇몇 분들은 잘 받았다고 해주셨는데 몇몇분들은 말씀이 없으셔서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받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회사 동료가 파인애플케이크 라는 걸 줬다. 연휴동안 동료의 엄마가 대만 여행을 가셨는데, 그때 사온 것이라고 한다. 배도 출출하고 하니 먹어봐야겠다. 먹고나면 컨디션이 좀 나아질까? 저녁에 육전에 소주나 마시러 갈까...
육전.....
지금 아이 역할을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는 힘이 넘치는 어른들이 너무 강하게 아이를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새삼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게 해왔다고 생각하고 뒤늦게나마 반성한다. 지나친 교육열과 지배 욕망을 극복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 아이가 가장 원하는 친절한 어른의 일일 것이다. 아이의 건강한 목소리를 듣고 해맑은 미소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p.58)
아이를 야단친다는 것은 부모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고,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나는 아이를 어떻게 하고 싶은가, 왜 그러고 싶은가, 나 자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그것이 아이에게는 어떤가`등이 그때그때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거리가 된다. 그래서 메뉴얼이 통하지 않는다. 복잡하고 까다로워도 부모 각자가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아이는 언제나 어른이 게으름 피우도록 놔두지 않는다. 매일 부모가 뭔가를 생각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한다. 그 덕분에 어른이 조금은 추락하지 않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것은 물론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그 기회를 아이로부터 받는 것은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p.137)
"밭일은 공장 생산과 달라서 1년에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없어. 실패하면 내년을 기다려야만 해. 10년의 경험도 열 번의 경험에 지나지 않아. 이게 참 괴로운 점이야." (p.163)
어른들로부터 "아이는 부모만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식물이 안정된 상태로 크려면 잔뿌리가 많아야 하듯이 인간 가족의 삶도 사람들의 네트워크에서 지원을 받아야 한다. 현대 가족은 약하다는 말을 듣는데, 이는 식물이 땅에 내린 잔뿌리들을 시들게 하고 한두 개의 큰 뿌리로만 겨우 서 있는 위험한 상태와 비슷하다. 이런 상태로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넘어지고 만다.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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