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디스크 파열로 시술하고 퇴원한 엄마의 손과 발이 되느라 연휴 내내 쉬지를 못했다. 언젠가의 닷새 연휴엔 다섯권의 책을 읽었던 적도 있었는데, 이번 나흘간의 연휴에선 그나마 한 권의 책을 겨우겨우 읽었다. 책이 재미있었기에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네 장 읽고 잘 뻔했다.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고 새벽 한 시가 넘어 잠들었는데 악몽을 꿨다. 꿈에서 나는 회사였고, 상사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울고 있었다. 울면서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다. 연휴가 끝나고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읽었던 책 속의 내용 때문이었는지, 어쨌든 이런 꿈을 꿨고, 꿈 속에서 당한 모욕이 꿈 속의 것이라 다행이라고, 깨고 나서 여러번 생각했다. 아, 이 미친 압박감....
"초봉이 천팔백이라고?"
전호 너머로 인도네시아에 계신 주연이 아버지가 펄펄 뛰셨다고 했지만 다행히 주연이는 연봉협상 때마다 평균보다 높은 인상률로 연봉을 쭉쭉 올려나갔다. 중간중간 착휘다하시피 하는 형편없는 회사들을 만날 때는 과감하게 이직을 했다. 초봉은 낮지만 임금 인상률이 좋고 이직도 자유로운 게 출판계였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란 걸 주연이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이직도 당장 돌봐야 할 사람이 없는, 아픈 가족이 없는, 부모가 자식보단 부자인 나 같은 애나 할 수 있는 건데, 그런 건 변하잖아. 아파지고 가난해지잖아. 어떻게 요행을 믿고 살겠어."
십년이 넘게 계속 천팔백을 받는 편집자들도 있고 근로기준법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화장실에 갈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기도 하고, 탕비실 문을 아침에만 열고 잠가버리는 곳도 드물지 않았다. 저자에게 받은 작은 선물 같은 것을 무조건 사장에게 바쳐야 하거나, 사이비 명상 같은 것을 강요받기도 하고, 사장에게 정신적 문제가 생겨 직원들이 책과 비품을 훔쳐간다며 책상 검사나 가방 검사를 하는 회사까지 있었다. 그러니까 21세기에도 자칫 잘못하면 광기의 왕국에 살게 되어버리는 게 현실이었다. (p,158)
158쪽의 저 구절을 읽는데, 한참 유명했던 트윗의 '출판사 대나무숲'이 생각났다. 당시에 거기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아, 이런 취급을 당하며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구나, 이곳의 환경은 열악하구나, 생각보다 사람취급 못받는구나, 했던 기억들. 그러나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똘아이 같은 상사들이 비단 출판계에만 있는 건 아니다. 생각보다 더 많은 병신들이 이곳 저곳에 터를 잡고 있고, 그리고 그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직원들을 괴롭힌다. 나만해도 직장생활 십오년 이상을 해오고 있는데, 얼마나 갖은 병신들을 마주했었는지 치가 떨린다.
지금 있는 곳에서는 욕과 폭언을 일삼는 상사들이 있다. 성희롱 발언을 하는 상사도 있고(그렇게 예쁘게 생긴 애는 우리 회사 오래 못다녀, 같은...). 무엇보다 실제 성추행을 하는 상사도 있었는데, 여직원에게 손을 잡자고 하거나 찢어진 정바지 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거나, 목을 쓰다듬는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거다. 내 눈앞에서 내가 그런 일들을 목격하면 나는 상대가 나보다 얼만큼 직급이 높든간에 '그러다가 고소당하는 수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또다른 경우엔 '맨 윗대가리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내가 그렇게 할 사람이란 걸 듣는 상사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과를 받기도 하고 안하겠다는 다짐을 받기도 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이런 나의 직장생활을 알고 있는 한 친구는 '당장 때려치고 싶다', '직장생활 너무 싫다', '더이상 진급하기 싫다'는 나의 말을 듣고는 '그러지말고 네가 임원을 해라' 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업계 특성상 남초집단이고 임원은 백프로 남자가 하고 있는 이 회사에서, 거기에 꿀리지 않고 네가 성추행 가해자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 걸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누군가가 임원이 되어야 하는건데 그걸 네가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느냐, 라는 게 아닌가. 아..생각지도 못한 친구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럴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이 지랄같은 남초집단 직장생활에서 내가 우뚝 여자 임원이 되어 분위기를 바꿔나가볼까..아, 그렇지만 그게 나 하나의 힘으로 될까. 현재 이 회사에서 나는 여자라는 성별을 가진 사람을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나보다 많은 여자직원들은 있지만 직급으로는 내가 위고, 연봉으로도 위다. 그러나 나랑 같은 직급을 가진 남자들에 비하면 내 월급은 적다. 내가 임원이 된다면, 그렇다면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을까? 어쩌면 여전히 남자 임원들만 바글거리는 곳에서 제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굴하게 되진 않을까? 그러나 내 밑에 있는 직원들을 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만들 수 있진 않을까?
일전에 새로 온 임원 한 분이 다른 임원에게 '내 커피를 타줄 여직원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는 걸 전해들었다. 듣는 임원은 당시 자기 커피는 자기가 타먹는 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는 임원에게 '네 커피는 네가 타 마셔야지' 라고 말하진 않았다더라. 그 상황을 전해듣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듣는 임원이 같은 직급의 '여자'였다면, 바로 그 앞에서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네 커피는 네가 타마셔야지' 라고. 만약 나였으면 그렇게 말했을 것 같은 거다. 그때 생각했다. '커피 타줄 여직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임원 밑에서 직장 생활하는 남자 사원들과, '자기 커피는 자기가 타마셔라' 고 말하는 여자 임원 밑에서 사회생활을 사직하는 남자 사원들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꿈같은 생각일까?
"조용히 책을 만들고 있으면 언어가 투명한 생물이고 나는 그 생물의 몸속에 손을 넣어서 척추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아. 멋진 일이야. 편집 일 자체는 좋아."
"그런데?"
"그런데 어느새부턴가 너무 소모적인 일이 되어버렸어. 책이 안팔리기 시작하면서 사람을 덜 뽑고 그 적은 사람들이 기계처럼 일하게 되었어. 그렇게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희가 무슨 예술가냐, 시비 거는 사람들도 많은데 예술가는 아니지만 장인이라고는 생각하거든. 장인에게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공을 들일 여유가 필요하고 말야. 그런 게 불가능하도록 노동강도는 무리하게 걸리는데 환경은 점점 나빠지고."
"환경이 싫은 거구나?"
"나빠지는 환경을 좋은 사람들이 참고 있어. 떠나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 덕에 그나마 이 정도 유지되는 건데 싸울 여건조차 안되는 곳이 더 많아." (p.221)
특히나 .생산 라인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실제적으로 몸을 많이 다치기도 한다. 심한 경우 목숨도 잃는다. 출판계나 어디나 똑같다. 적은 사람으로 더 많은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혹독히 굴리다보니 사고가 안날래야 안날 수가 없다. 그런 환경에서 인간은 인간이기 보다 기계로 취급당한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가는 인건비는 아까워하면서 인간을 아까워할 줄은 모른다. 책에서는 항공승무원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친구의 얘기도 나오는데, 서비스업이나 출판업계나 다 마찬가지. 일하는 우리 모두는 같은 직장의 상사들로부터 그리고 손님들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학대를 당한다.
이 작가는 편집인들이 겪는 고충을, 그러니까 드러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출판사들의 기이한 행태들을 어떻게 이렇게 낱낱이 밝힐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가 있나? 작가이기 때문에 친한 편집인으로부터 수집, 취재한걸까? 그러나 책을 다 읽고 인터뷰를 읽노라니, 작가가 편집자로 일한 경험이 있더라. 아!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구나. 이렇게 고발하는 게, 그래서 가능했구나.
그러자 세상 모든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승무원은 승무원대로, 비서는 비서대로, 편의점 알바생은 알바생대로, 주방 보조는 주방 보조대로, 배달은 배달대로 그렇게 다들 작가가 되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어땠는지 고발해줬으면 좋겠다. 정세랑 작가가 했듯이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 나가면서 이렇게 털어놓아도 좋을 것이고, 본격적으로 고발에 더 치중해도 좋을 것이다. 고발하고 까발리다보면 조금씩 변하게 되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직딩들이여, 화이팅!!
악몽 때문인지 너무 우울한 얘기만 했구먼...그렇다면 by the way,
최근에 지면 광고에서 니콜 키드먼을 종종 만났다. 한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더라. 그런데 너무 예쁜 거다. 시계 광고였다.
우앗...너무 예쁘다. 정말 예쁘다. 진짜 우아하고 아름답다. 아니, 뭐 이렇게 예뻐...
그리고 저 헤어스타일! 나도 꼭 저런 헤어스타일이 하고 싶어지는 거다. 아..뭐냥...나도 머리 저렇게 할래..
나는 지금 짧은 단발에 앞머리가 있는 예쁜 얼굴인데(응?), 앞머리도 이제부터 자르지 않고 함께 길려서 차츰차츰 저런 스타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앞머리 없는 약간 긴 머리의 예쁜 얼굴로 변화를 줘볼까? 아 예쁘다...
오늘 아침 거울을 보다가 앞머리가 또 자를 정도로 자랐다는 걸 알게됐다. 미장원에 언제갈까 생각하다가 멈칫, 아, 나 머리 니콜키드먼처럼 하기로 했지, 되새긴다.
연휴중에 하루는 조카들을 만나러 갔다. 세 살 조카는 '이모'를 말할 수 있다. '싫어', '아니', 등등의 단어들도 말할 수 있는데, 엊그제 화요일 아침에는 제 엄마가 밥을 먹여주는 것도, 제 할미가 밥을 먹여주는 것도 싫다며, '이모'가 먹여달라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조카 앞에 앉아 조카에게 밥을 먹여주려는 데,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이잉~' 해달라는 거다. 이게 뭔말이여 싶어 여동생에게 물어보니, 비행기 나는 손짓을 하며 밥숟가락을 저어~쪽에서부터 가져오라는 거다. 나는 깔깔 웃으며, 밥이 담긴 숟가락을 저어어어쪽에서부터 가져오며 위이잉~ 하고 아이의 입 앞으로 가져다댔다. 그러자 조카는 방긋 웃으며 입을 벌리고 받아 먹더라. 김치를 달라길래 김치 맵지 않아? 물으니 여동생은 김치를 좋아하는 어린 조카를 위해 별로 맵지 않은 열무김치를 담가놨더라.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으니 세 살 조카가 말한다. '커, 커'. 너무 크다는 거다. 가위로 작게 잘라서 조카의 입에 넣어주니 조카가 좋아한다. 예뻤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여섯살 조카가 할머니 품에 안겨서는 가지 말라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한동안 잘 보내줬는데 이날 아침엔 왜 우리를 보내는게 아이에게 힘이 든걸까. 우는 아이를 두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직도 눈물을 떨어뜨리는 아이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한편으론, 그렇게 울 수 있는 조카가 고맙고 또 다행스런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거, 누군가와의 작별이 힘들면 힘들다고 그대로 드러내는 거, 그게 너무 좋아보이는 거다. 마침 이 책 속에서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언제 또 올 거야? 길게 있으면 안돼? 언제쯤 와서 길게 있을 수 있어?˝
여기가 싫어, 하고 분명히 말하고 떠난 송이인데도 출국 게이트 앞에만 서면 나는 끈끈이 주걱처럼 굴었다.
˝할머니가 되면.˝
그럼 꼭 돌아와서 살 거라고 했다. 나랑 주연이랑 셋이 함께 같은 요양원에 들어가자고 했다. (p.248)
내가 기억하는 나의 작별에서 나는 한 번도 끈끈이 주걱이 되었던 적이 없었다. 조카의 눈물을 보면서, 그리고 책 속의 저 장면을 읽으면서, 살면서 한번쯤은, 정말 헤어지기 싫은 누군가의 앞에서는, 끈끈이 주걱이 되어 눈물을 흘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라도 내 옆에 둘 수 있다면, 시도를 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용기인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