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도 한 번 얘기했었던 것 같은데, 시트콤 <하이킥>에서 뮤지컬 배우로 성공을 앞둔 신지에게 서민정이 축하한다며 부럽다고 한다. 그때 신지는 서민정에게 '네 꿈은 이게 아닌데 왜 부러워' 라고 되묻고, 이에 서민정은 자신의 꿈이 뭐였는지 다시 확인한다. 서민정의 꿈은 뮤지컬 배우로 성공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일이었다.
'줄리아 로버츠'와 '줄리아 스타일즈' 주연의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결혼을 하려는 우수한 학생인 줄리아 스타일즈의 집에 찾아가 줄리아 로버츠는 아쉬움을 전한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갈 수 있는데, 더 공부를 많이 할 수도 있는데, 그토록 가능성이 보이는데 결혼이라니. 이에 줄리아 스타일즈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건 공부가 아니라 이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이라고 한다.
내 꿈은 네 꿈과 다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이 다른 사람의 꿈과 마찬가지일거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일전에 결혼한 내 친구중 1人은 내게 연애하기를 자꾸 권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네가 행복해지는 걸 보고싶어' 였다. 헐...내가 연애하고 있지 않으므로 행복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걸까? 얼마전에 친구중 1人은 동창으로부터 '결혼할 남자가 아니면 시간낭비하지 말고 그만 만나'라는 말을 들었다며 분개했다. 왜, 도대체 '왜', '결혼할 남자'와만 교제해야 할까?
자신이 결혼했으면 다른 사람들도 결혼해야된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되는걸까? 내 경우엔 지금 '비혼' 상태인데 무척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 나는 이런 내가 행복하다고 해서 결혼한 사람들에게 '비혼이 겁나 행복하니까 다 헤어져라' 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내 꿈이 네 꿈일거라고, 내 목표가 네 목표일거라고, 우리는 결국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함부로 생각하고 말하는걸까.
내 꿈은 네 꿈과 다르다.
토미히로의 계획이란 중형 캠핑카를 타고 아내와 일본 전역을 여행하는 것이었다. 꿈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미국 영화를 보면 정년퇴직 후 캠핑카를 타고 대자연 속을 여행하는 부부가 곧잘 등장한다. 단순한 관광 여행이 아니다. 마음껏 좋아하는 곳을 찾아가서 아름다운 산이나 바다나 호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 계획을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두었다. 깜짝 놀래주고 싶었다.
……
퇴직하고 한 달이 되어가자 신변 정리가 대충 끝났다. 아껴둔 와인을 따고 고기를 구워 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고생하셨어요." 가족의 감사 인사말을 들으며 건배를 하고 나서 처음으로 계획을 밝혔다.
"지금까지 비밀로 해왔는데 캠핑카를 타고 엄마랑 전국을 돌아볼 생각이다."
"와! 아버지 멋져요."
아들은 감탄했지만 딸은 마음이 복잡한 얼굴이었다. 아내는 깜짝 놀라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군. 실은 차는 이미 정해두었어. 중고이기는 한데, 차 내부에 천연목을 아낌없이 써서 분위기가 아주 좋아."
토미히로가 웃는 얼굴로 그런 얘기를 하자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아내와 딸은 그저 묵묵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더 이상 캠핑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캠핑카>, p.174-175
회사에서 퇴직한 남편이 꾸는 꿈은 말그대로 멋진 꿈이었다. 그리고 그런 꿈을 꾸고 있고 계획하고 있으며 실행을 앞두고 있다는 것 역시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 꿈, 그 계획에 동반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아내'의 의중을 물어보진 않았다. 그래놓고서는 칭찬 받기를 바라는 아이처럼 탁- 터뜨리다니. 참... 어이가 없다.
아내는 아내의 생활이 있었다. 아내는 아내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있고. 아내는 아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있고 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아내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멋대로 자신의 계획에 아내를 넣을 수가 있을까? 누군가와 '같이' 뭔가 하고 싶어졌다면, 의견을 물어보는게 순서다. 이런거 하고 싶은데, 너는 어때? 게다가 그게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라면 반드시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게 아닌가. 제멋대로 저렇게 파티자리에서 터뜨려버리다니. 사람들 많은데서 공개적으로 청혼하는 것처럼 기분나쁘다. '좋은 것'이라는 명목으로 당연히 상대도 좋아할거라고, 나처럼 함께 흥분할거라 생각하다니. 정말 머저리같지 않은가. 답답할 따름이다. 파티 자리라는 분위기를 깰 수 없어 '나는 너랑 같이 갈 수가 없는데?'라고 대번에 말하지 못한 아내의 마음은 어떠할까. 나한테 좋은게 상대에게도 좋을 거라는 착각을 제발 좀 버리고 살았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 소설속에서는 아내가 자신에게도 자신의 시간이 있는거라며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편은 '아내에게도 아내의 시간이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였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진작에 일어났어야 했었고.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해서 같은 꿈을 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설사 그렇다해도 우리에겐 상대의 의견을 물어보는 게 반드시, 꼭 필요한 법이다.
이건 기쁜 일, 축하할 일, 좋아 마땅해야 할 일이니까 네 의견을 묻지 않아도 당연히 좋아하겠지, 라는 생각은, 정말이지 오만한 것이다.
암튼, 나는 귤을 먹고 있다.
이 소설집에는 총 5편의 중편이 실려있다. 모두 직장에서 정년퇴직 혹은 조기퇴직한 오십대 이상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아마도 세대가 세대이니만큼 '결혼'에 대해서 좀 강압적이랄까, 강박적이랄까, 뭐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결혼을 했던 것 같은 문장들이 더러 보인다.
남편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편 역시 지방 출신인데, 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유명 사립대학을 졸업했다. 남편은 가족과 친구등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다카마키 요시코와 결혼했다. 남편은 흔히 말하는 '여자의 얼굴을 밝히는 남자'로 미인과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혼이라는 건 아마 이런 것이려니 하고 당신과 결혼한 거야." 남편은 아들이 태어났을 즈음 그런 말을 했다. -<펫 로스>, p.234
꺼져...
도쿄에서 처음 근무했던 시나가와의 작은 운송 회사는 몇 년 뒤 오일쇼크에 잇따른 대불황으로 순식간에 도산했다. 그후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중견 회사에 취직해 대형 면허를 땄고, 사무직으로 일하는 어린 아가씨와 사내 커플로 결혼했다. 여자는 아직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나이였고 용모도 머리도 '중하'쯤 되었다. 결혼한 이유는 상사가 권했던 데다 스물다섯살이 넘으면 결혼해야 한다고 마음 한구석으로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도우미>, p.308
너도 꺼져...
이런 부분들을 읽을 때는, 작년이었나, 누군가의 강연을 유튭으로 봤던 게 떠올랐다. 연애를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남들도 다 좋아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말고 한단계 눈을 낮춰서 사람을 좋아하라고, 그러면 오래간다고....
다 꺼져라. 말이냐 소냐.
나 역시도 '그냥 이쯤이면 결혼할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겠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그런 선택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사람하고 꼭 하고 싶다' 하는 사람과 할것이다. 이쯤에서 그만 결혼할까, 뭐 이런 생각으로 이 정도 남자쯤이면 뭐 나름 괜찮지, 하는 생각하면서 결혼하진 않을 거다. 혼자 지내고 말지. 혼자서 일하고 돈 벌어서 먹고 싶은거 먹으며 마시고 싶은 술 마시며 살 수 있는데 대체 왜 '이정도의 사람'과 '이정도의 시기'쯤에 결혼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상대가 나를 그렇게 선택해 결혼했다는 걸 알게되면, 헐, 집을 나가버릴 거다.
너는 '중하'쯤 되는 여자지만(니가 나를 왜평가해?) 나는 이제 정착해야 할 때가 되서 마침 너를 사귀고 있으니 결혼했어.
이게 무슨 개소리냐. 말이야 방구야. 저 말 듣고 내가 '오, 나도 그래!' 하면서 살아야 하는거냐, '오 겁나 땡큐' 이러면서 살아야 하는거냐. 또한, '아 그런거구나' 하고 체념하면서 살고 싶지도 않다. 진짜 뻐킹스런 상황이 아닌가. 저런 상황에 맞닥뜨리느니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거 해먹으면서(오리, 부추김치!!), 와인이나 한가득 쟁여놓고, 에로영화(언제든 추천받아요)나 보면서 혼자 살겠다. 이 편이 훨씬 근사해!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이 소설속의 저 주인공들이 다 빌어먹을 놈이었다거나 한 건 아니다. 결혼에 있어서 저런 마음가짐을 가졌었고, 다들 다르게 늙어간다. 하하하하하. 그냥 저런 발언들을 보니 빡이쳐서...
이 책의 첫중편인 <결혼 상담소>에서는, 내가 이책을 통틀어 가장 좋아했던 문장이 나온다.
"방금 본 영화 말인데요, 예전에 봤을 때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거려니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그뿐이 아니라는 걸 알겠네요. 그게 그녀가 말하고 싶어 했던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해바라기>에서 두 사람 다 상대를 만나러 가잖아요? 그게 열쇠 인 것 같네요. 소피아 로렌이 소련가지 남편을 찾으러 가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애매한 상태로, 어떤 의미로는 평온하게 시간이 흘러갔을지도 모르잖아요? 난 당신의 애인이나 소피아 로렌처럼 무언가를 찾거나 전해주려고 멀리까지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으니 실감할 수는 없지만, 그건 진심을 다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주 먼 곳에 있는 상대를 찾아가 중요한 무언가를 전한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가치 있는 것 같아요. 성의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진심을 다할 수 있잖아요? 진심을 다한다는 게, 말 그대로 다 써버린다는 의미와 상대를 위해 뭔가 노력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그 두 가지 다 당신의 연인에게도, 소피아 로렌에게도, 그리고 소련에서 가정을 꾸린 원래 남편에게도, 물론 당신에게도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네요." -<결혼 상담소>, p.64-65
성의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라는 대사에서 그만 묵직해져버리고 말았다. 묵직한 무게감, 그게 가슴속에 차올랐다. 상대를 위해 뭔가를 노력한다는 것, 진심을 다한다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에게는 그것을 우리가 바라고 또 우리가 상대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나는 진심을 다할 수 있는 상대와 사랑하고 싶다.
"올라올 때 신사가 있었지? 거기에 약수터가 있단다. 맛있지? 인도, 잘 들어라. 뭔가 괴로운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천천히 물을 마셔라. 그러면 일단 마음이 차분해지지. 탁한 물이나 냄새 나는 물은 안 돼. 이 물처럼 깨끗하고 맑은 물을 마셔야 한단다."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 p.85
물을 마시고자 요즘 엄청 노력중인데, 내가 마시는 물이 한 번도 내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혹여라도 괴로운 일이 생긴다면 이 문장을 기억하고 싶다. 이 문장을 떠올리고 천천히 물을 마시고 싶다. 그럴 경우에 내가 정말 차분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무라카미 류'의 작품을 읽어본 게 몇 권 안되지만, 내게 그는 좀 변태..삘 나는 작품을 쓰는 작가로 인식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소소한 인간들의 이야기라니, 읽으면서 놀랐다. 게다가 위의 어떤 인용문들도 그렇고, 내가 생각하는 바와 정확히일치하는 생각들을 글로 풀어 옮겨놨더라. 내가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 일단 내 몫을 충실히 잘 살아갈 것. 류는, 자신의 소설속 '개'를 빌어 그 얘기를 전한다. 죽어가는 개, 보비 이야기다.
소생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하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소생은 보비에게 배웠습니다. 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보비는 말기가 되자 걸을 수도, 일어설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한 거겠지만, 그래도 살려고 한 것입니다. -<펫 로스>, p.283-284
우리는 일상의 매순간, 누군가에게서, 어딘가에서 이렇듯 무언가를 얻을 수도, 받을 수도, 깨달을 수도 있다. 그렇게 지속되는 게 삶이다.
오늘 점심은 평양냉면을 (또!!) 먹기로 했다. 오후에는 스케일링을 받으러 갈것이다. 저녁 메뉴는 아직 생각해두지 않았지만, 뭔가 다이어트 식으로 먹어야겠다고 다짐을 (또!!)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