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원한다면, 네가 원하는 때에
분쿄 구 센고쿠에 사는 평범한 주부인 내 처제(서른다섯 살)가 갑자기 영어 회화 학원에 다닌다는 건, 솔직히 말해 그럴 필요성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길거리에서 외국 사람이 뭘 물어보면 어떡해요"라는 게 그녀가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유인데, 그런 경우를 과연 '필요'라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정말 분간하기 어렵다. 일본도 세계화되고 있으니 그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도 옳은 말이라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쩌다 외국 사람이 길을 물으면 그냥 "I'm sorry. I can't speak English"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싶다.
그리고 외국 사람이 길을 묻는 일은 삼 년에 한 번꼴도 없지 않나요?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지난 십 년 동안 외국 사람이 내게 길은 물은 적은 고작 한 번이다.)그 때문에 일부러 영어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시간을 심히 비경제적으로 쓰는 말이 아닐까?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인생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자기 마음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또 지금 유행하는 유아 영어 교실이라는 것도 잘 모르겠더군요. 우리 조카도 그런 데 다니고 "Thank you very much" "You are welcome" 하는 말을 조잘거리는데, 이게 필요한 것일까요? 어렸을 때의 어학 학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 또 할 말이 없지만,평범한 여섯 살 아이가 왜 2개 국어를 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모국어도 잘 못하는 어린아이가 표층적으로 2개 국어를 좀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몇 번이나 말하지만 재능이 있거나 혹은 필요가 생기면, 굳이 어린이 영어 교실에 다니지 않더라도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영어 회화쯤이야 반드시 할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먼저 나라는 인간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모국어를 통한 진정한 회화가 거기서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 회화 역시 거기서 시작 된다. (pp.150-151)
남동생 회사가 나의 회사 근처에 있어서 출퇴근 시에 남동생 차를 타고 함께 움직일 때가 있다. 보통은 퇴근때 라디오를 들으면서 같이 가곤 하는데, 최근에는 출근길에도 남동생 차를 타곤 한다. 남동생 차를 타면 책을 읽을 수 없고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는등의 활동을 일절 할 수 없지만, 십오분 쯤 더 침대에 누워 있어도 되고, 겁나 편안하다. 가장 큰 단점이 '내리기 싫다'는 정도. 내가 내려야 할 곳에 이르면 아, 내리기 싫다, 하고 절로 말하게 된다. 크- 그러다보니 항상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와도 회사에 도착하면 배고프곤 했는데, 그게 없어졌다. 이젠 사무실에 도착해도 배가 안고파...뭐, 이러다 잠시 후에 또 고프겠지만.. -0-
출근길에 남동생은 퇴근길과는 달리, EBS 의 영어교육방송을 틀어놓는다. 그러면 함께 그 방송을 듣게 되는데, 영어 공부야 뭐 평생의 숙제이니 내가 마다할 리가 없지만, 나는 오늘, 내가 영어로 듣는 것을 꽤 싫어한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나는 영어를 잘 듣는 사람도 잘 말하는 사람도 잘 읽는 사람도 아니다. 못하는 축에 가까울텐데, 그러다보니 영어로 구성된 문장을 들을라치면, 내 안의 집중력을 백프로 풀가동 시켜야 한다. 백프로 풀가동 시키면 백프로 이해가 되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그 중에서 내가 이해하는 건 한 30프로 정도 될까. 그나마도 가장 기본적인 단어들을 내가 알고 있기에 때려맞추는 식일텐데, 이 집중력 백프로 풀가동은 꽤 피곤한 일이다. 그러니까 나의 모국어로 누군가 말을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백프로 풀가동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들리며 이해가 된다. 물론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다면 모국어라 할지언정 들리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들을 수 있다는 거다. 집중력 30-40프로만 가동하면 내가 때꾸할 수 있을만큼 내 안에 상대의 말이 닿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문장과 글자 자체'를 텍스트로 인식은 가능한 것. 잠깐 시간이 지난뒤에, 아 그거, 하면서 대꾸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지만 영어의 경우는 다르다. 영어는 집중력 백프로 풀가동을 해야 고작 30프로 정도가 무슨 뜻인지 이해될 뿐이고, 혹여라도 집중력을 70프로 정도로 맞춘다면 단어 몇 개만 들리는 정도이며 30-40프로로 낮춘다면 단어 하나 조차도 들리지 않는 채 그저 외계어만 된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단어의 나열.... 듣고 이해하고자 할 때마다 집중력을 풀가동 시켜야 한다는 건 진짜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이다. 뇌가 쪼개지는 것 같아... 그래서 옆에 앉아 같이 듣는 남동생에게, 야, 뭔 말인지 조금이라도 이해할라면 집중력 풀가동 시켜야 돼, 겁나 피곤하지 않냐, 하는 말을 하곤 했었다. 그러던 오늘.
그 방송의 이름은 모르겠는데, 여튼 원어민 한명과 본토발음을 쓰는 (아마도)한국인 한 명이 또 영어로 방송을 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어도 섞어서 한다. 왼쪽 모서리는 어떻게 말하면 될까요? 하면서. 나는 숫제 집중력을 0에 맞춰둔 채로 내 생각하기에 바쁘다. 저기에 있는 호프집은 수제맥주를 만드는구나, 칠봉이랑 가봐야겠다, 수제맥주가 요새 맛있지, 안주는 피자로 해야 되는데 씬피자가 낫겠어, 둘이 먹으면 두꺼운 건 너무 크잖아, 씬이면 페퍼로니지, 접어서 먹으면 손가락 뜨거워,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방송에서 갑자기 팝송이 들린다. 이 방송은 다음 코너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팝송을 틀어주는데 꼭 한 곡 완전히 틀어주질 않고 중간에 끄더라. 여튼 귀에 익은 팝송이 들리자 신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 이 노래나 계속 끝까지 틀어줬으면 좋겠다. 영어로 그만 씨부렁거리고.
그러자 남동생이 말했다. 이 노래 뭔데? 몰라. 그래서 나는 아이폰의 시리를 돌려 노래를 알아냈고, 이어 남동생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누나 이 영어들이 씨부렁거린다고 생각하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이 말 듣고 나 빵터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내가 그랬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그동안 이 영어 방송이 씨부렁거린다고 생각한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나란 인간 Orz
그나저나 시리가 찾아준 노래가 뭔지 링크할랬는데... 기억이 안난다. 시리가 찾아줬던 음악이란 걸 어떻게 다시 확인할 수 있지? 제기랄...
암튼 앞으로도 남동생 차를 타고 올것이냐 지하철을 탈것이냐는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지하철의 좋은점: 많이 걷는다, 소화가 잘된다, 책을 읽을 수 있다
남동생차의 좋은점: 편하다. 겁나 편하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인생 매 순간은 선택을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편한 걸 맛본 이상 편하지 않은 걸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은데, 갑자기 미카 생각이 난다. 미카가 앨범이 잘 팔리고 성공한 가수가 되어 호텔에 머무르자, 그의 엄마가 '예술을 하는 사람이 편한 걸 알게되면 더이상 예술을 하기 힘들지 않겠냐' 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는데(이렇게 저렴하게 말하진 않았고 정확한 워딩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그 말을 듣고 미카는 자신이 원래 살던 집으로 들어갔다 했다. 물론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전혀, 전혀, 네버 없지만,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타는 게 나에게 더 좋은 것 같고, 내 육체가 편히 쉬기 위해서는 남동생 차를 타는 게 나을 것 같으니. 아아- 나도 모르겠다. 내일 일은 또 내일 일어나봐서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불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