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이 지나도록 이 영화는 내내 '이게 뭐지' 싶은 느낌만을 준다. 친구들과 늘상 모여 여자들 몸에 대하여 점수를 매기고 성적대상화 시키는 남자들이라니, 남자들끼리 이러는 거야 뭐 어제오늘 일이 아니겠지만, 자꾸 보여지는 그런 모습들은 좀 구역질난달까. 게다가 남자 주인공 '존'의 아버지도 다를 바 없어, 아들인 존이 데려오는 여자친구를 아래위로 훑으며 '귀엽'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귀여움은 당연히 귀염성의 그 귀여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쭉빵미녀라 귀엽다는 것. 그런 식의 시선으로 훑어보는 남자친구의 아버지라니, 구역질이 치밀어오른다. 혹여라도 결혼하게 된다면 저 시선을 늘상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존은 바텐더로 일하면서 늘 춤을 추러 다니고 여자들 몸에 점수를 매기며 하룻밤 자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점수 높은 여자랑 섹스를 해도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그가 늘상 찾아보는 포르노다.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실제의 섹스보다 훨씬 더 큰 만족도를 준다. 그래서 아무리 섹시한 여자랑 섹스를 하고 침대에 그녀가 누워있어도 그는 거실로 나가 포르노 사이트에 다시 접속, 혼자 만족하는 시간을 갖는다. 사랑하는 여자 '바바라'가 생겼지만, 바바라에게도 예외는 없다. 존은 바바라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에도 거실에서 포르노에 접속한다. 이 모습에 바바라는 실망하고 그와 헤어진다. 포르노를 보는 남자는 바바라가 바라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존에게 야간대학에서 같이 수업을 듣다 만난 '에스더'는 '포르노중독' 인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존은 그 말을 웃어넘기지만, 자신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에스더의 말대로 포르노를 보지 않으면 자위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포르노를 끊기로 결심한다. 이에 에스더는 존에게 말한다. 현실의 섹스는 포르노와 같을 수가 없다, 니가 포르노를 보며 만족하는 게 너 자신을 잊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너가 섹스로 너 자신을 잊어야한다면, 그건 니가 사랑하는 여자 안에서여야 한다, 너는 여자랑 섹스를 한 게 아니라 너 혼자 일방적인 섹스만을 한 것이다, 그런 섹스가 너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감을 한다면, 다르다, 고.
존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잘 몰랐지만, 에스더에게 '사적으로' 다가가고 그녀의 상처를 알게 되면서 생애 처음 '그동안의 섹스와는 다른' 섹스를 하게 된다. 아, 이건 달랐어. 그러자 그가 세상을 보고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운전을 하면 늘 분노가 차올랐던 그였지만, 이제 운전을 하면서 욕을 하고 핸들을 탕탕 치는 대신,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부른다. 헬스장에 가면 자기 운동 하기에 바빴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농구를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여자들하고 눈 맞추는 건 싫었'는데 이 여자랑은 자꾸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여자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내 생각을 아는 것 같고, 자신이 그녀의 생각을 아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서야 '사랑을 나눈다' 에서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와 함께 미래를 설계한다는가 하는 구체적인 어떤 것들을 말하진 않았지만, 이 교감이 '미치도록' 좋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자신의 고유한 성격도 있었을테지만, 환경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나의 조카가 제 외할머니의 말투를 따라하는 것을 보면, 어릴 때 함께하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존'의 아버지는 늘상 축구를 보고 분노한다. 말투는 거칠고 늘 시비조로 말하며 화를 낸다. 일주일에 한 번 식사를 함께하는 아들 존 과도 그래서 늘 싸운다.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기에 바쁘고 상대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화를 내고 윽박지른다. 엄마는 이 둘 사이에서 중재하려 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가 존에게 유일하게 다정했던 때는 아들 존이 지독하게 섹시한 여자를 여자친구로 데려왔을 때였다. 함께 선정적인 티브이 광고를 볼 때도 그들은 같은 마음이 된다. 존이 늘상 분노하고 화를 내는 모습은, 운전과 축구를 할 때라는 상황설정만 달랐지, 그의 아버지가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인 존이 다 자란 성인이 되도록 여전히 분노하고 있지만, 존은 이제 달라졌다. 달라지는 존을 보며 얼마전 트윗에서 본 서천석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밑에서부터 읽으면 된다.
영화속에서 존이 자신의 과거나 환경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이거나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포르노에 중독됐으며 분노에 차있는 성격이었다가, 교감하는 상대를 만나면서 달라지는 모습이 보여질 뿐. 존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기까지, '아 내가 그런 사람인가'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했으며 또 그렇게 했지만, 그렇게하게끔 도와주며 옆에 있어준 에스더도 중요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도 영화는 말해준다. 그간 그가 여자들에 대해 몸매평가를 내리고 그런 여자를 여자친구로 데리고 다니는 것은, 그가 친구들에게 그런 여자랑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내가 행복한' 걸 그가 경험하는 대신, 그가 선택한 건, '남들에게 이런 여자랑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지고 싶었던, 그런 사람. 그러나 '보여지고자 하는' 모습대로 사는 것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으로 인해 혹은 누군가가 옆에 있음으로 인해 '충족되야만'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한 모습은 얼마든 가장할 수 있지만, 행복한 모습을 가장해서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여진다한들, 그것이 행복한 건 아니다. 그 공허함은 결국 자신의 몫, 자꾸 그런 식으로 '행복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자신의 행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에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커피를 건네는 사람이 필요하고 술잔을 부딪혀줄 사람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다는 확신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넌 잘하고 있다', '넌 최고다' 등의 말로 바닥에 하염없이 가라앉는 나를 일으켜 세워줄 사람. 좋아하고 신뢰한다는 말로 나의 두 발이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서있을 수 있게 하는 사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화려한 외모를 내세워 '이런 나를 옆에 두고 싶다면 너는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저것도 이것도 저것도 이것도 저것도~ '하며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두 눈을 바라보며 말하고 웃고 들어주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내 스스로 충분히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이런 단단한 나를 지탱해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는 분노하는 대신 노래를 따라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이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이 교감임은 분명하다. 당신과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걸고 들어주며 교감해야 한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가 더 나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마지막, 존은 '이런 교감이 미치도록 좋다'고 하는데, 나는 교감을 미치도록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좋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옆에 두고 싶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감독이 조셉 고든 래빗이다. 오, 조셉!
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 나는 갸웃했다. 어...난 이 영화 별론데...라고. 같이 본 친구에게 '나 이 영화 별론데?' 라고 말하자 친구는 '어, 나는 네 스타일 아닐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보자고 해서 좀 이상했어' 라고 하더라. 일단 나는 이 책의 원작인 만화도 보지 않았고 드라마도 보지 않아서 이 영화가 얼마나 각색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영화를 영화 자체로 감상한 것인데, 음식들도 그다지 탐이 나지 않고 무엇보다 이 작은 식당에 모인 각각의 사람들이 서로의 사연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걸리적거린다. 피곤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안식처같은 식당인 것은 알겠는데, 나에게 이 식당이 안식처가 될 수는 없겠더라. 음식에 감흥받지 못한 나를 보며 같이 본 친구는 '너에게는 리틀 포레스트가 훨씬 좋았을 텐데, 이 영화에서는 음식 만드는 과정이 잘 안나와서 그런 것 같다' 라고 하더라. 맞다. 나는 이 영화보다 [리틀 포레스트]가 훨씬 좋았다. 쉽게 말하자면 리틀 포레스트는 보면 '아 이렇게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드는데, 심야식당은 보면서 '저 식당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 차라리 나는 와인을 사들고 리틀 포레스트의 여주인공 집에 찾아가고 싶더라. 바로 직전에 본 영화이기도 하며 또 같은 일본의 영화이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등장인물이 많지도 않은데 대자연 틈에서 성장하는 주인공을 볼 수 있다. 심야식당에서는 나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심야식당에서 마스터를 도와주는 여자의 사연과 캐릭터는 생각할수록 짜증이나는데, 자신의 돈을 들고 튄 남자를 거절하지도 못해서 우연히 식당에 온 다른 남자가 '이 여자는 나랑 결혼할 사이다' 라고 연극을 해 그 상황과 그 남자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이 설정이..난...너무 병신같아.....다른 사람들 다 있는데 나랑 살자라며 윽박지르는 남자도 병신같고, 거기에 무슨 구원의 왕자처럼 나타나서 '그렇겐 안돼 이 여자는 나랑 약혼했어' 이러는 것도 오버센스고... 둘 다 꺼져.
이 100장의 엽서셋트를 사고서는 너무 좋아서 히죽대다가 혹시 집에서 쓰고싶어질 때를 대비해 열장쯤 집에 가져다두었다. 어제 조카들이 놀러왔는데 나는 집에 있던 엽서 여러장을 조카에게 보여주며, 네가 갖고 싶은 것 한장 줄게, 했더니 조카가 한 장을 고르더라. 그래 그거 너 가져, 라고 호기롭게 주고는 남은 엽서를 정리하려는데, 조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모, 타미 이거 다 가지면 안돼?
어? 이 아이좀 보라지? 하하하하하. 나는 몇초간 망설이다가 그래, 너 다 가져, 근데 하나만 이모가 가질게, 라고 하자 타미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찜해두었던 한 장을 빼고 나머지 엽서를 다 조카에게 주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해서 조카가 나를 예전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진 않더라.
에피톤 프로젝트 콘서트 얘기도 하고 싶은데, 글이 너무 길어지니 이만 줄여야겠다.
남동생이 '요즘 글을 안쓴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왜그러냐'고 어젯밤부터 내게 묻더니 오늘 아침 또 물었다. 그래서 '응, 글을 쓴다는 게 뭔지, 내가 교만한건지 아닌지, 그냥 회의가 들어, 싫으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동생이 말했다.
'회의 그만하고 이제 써.'
그러자 나는 우습게도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