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언급되는 '케이트 초핀'의 [각성]은 국내에서는 '케이트 쇼팽'의 [각성] 이나 '케이트 쇼팽'의 [내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나와있다. 작가의 이름이 Kate Chopin 이니 케이트 초핀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각성의 원제목이 The Awakening 이니 지극히 문학적인 의역이긴 하지만 '내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으로 제목을 조금 바꿔 번역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뜻은 통하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책, [빨래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라면 얘기다 다르다. 아직 2/3 정도밖에 읽지 못했으니 끝까지 다 읽어봐야 더 확실해질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이쯤만 읽어도 충분할 것 같다. 대체 이 책의 제목이 왜 '빨래하는 페미니즘'이 됐을까? 이 책의 원제목은 [Reading Women: How the Great Books of Feminism Changed My Life] 인데 말이다. 이게 그러니까 번역하면, 책읽는 여자들: 어떻게 페미니즘에 대한 위대한 책이 내 삶을 변화시켰는가..쯤이 되는건가?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일상과 자신이 들은 강의, 그 강의의 소재가 된 고전들을 예로 들어가며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는다.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로 얘기하는 인문학 서적이지만, 딱딱하지도 않고 쉽게 읽힌다. 심지어 재미있다. 독립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개개인으로서의 한 '여자사람'이 엄마와 아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쉽게 말해 일과 가정 양쪽을 다 잘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끝없는 논쟁에 대한 이야기랄까. 남편의 의식이 여느 남자들보다 더 깨어있고 실제로 양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고 해도 중심 축이 되는 것, '모유를 먹이는' 중요한 기본 부터 아이의 성장에 미치는 중요한 것들에 대한 기본 축을 '엄마'가 하고 있기 때문에 애초에 양육에 평등할 수가 없다는 걸 이 책의 작가 '스테파니 스탈'이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똑똑한 스테파니 스탈, 자신이 쓸 돈을 자신이 벌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스테퍼니 스탈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남편과 사이가 안좋아지기도 한다.
실비아가 24개월 되었을 때 근처 유아원 반일반에 보내기 시작했다. 오전 시간이 자유로워지면서 집 밖으로 나가는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립과 불안정성에 지친 나는 동지애에 굶주려 있었다. 집안에 틀어박혀 혼잣말하며 지내는 날이 계속되다 보니 동료와 하찮은 일로 옥신각신하는 사내 정치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통장 잔고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제껏 열심히 기사를 써왔건만 받은 고료는 건강 보험료를 내고 나면 그다지 남는 게 없었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줄곧 스스로 벌어서 생활을 꾸려 왔다. 대학생일 때도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런데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한 이후 찔끔찔끔 버는 돈은 가정 경제에 그다지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꾸준한 수입이 없다는 게 괴로웠다. 지금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내 몸 하나 부양하는 것도 힘에 부칠 날이 올지 몰랐다. 비록 남편일지라도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사는 것은 내게 끔직한 공포이자 수치였다. (p.245)
책은 재미있어서 책장이 잘도 넘어간다. 게다가 고전에서도 작가의 일상 속에서도 생각할 부분이 많아, 나는 이 책을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죄다 읽히고 싶어졌다. 내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진짜 아는 사람들에게 죄다 한 권씩 보내보리고 싶다니까.
회사에서 직원들이 생일을 맞으면 작년부터 나는 개인적으로 책을 한 권씩 선물해주고 있다. 앞으로 그래야겠다고 생각하고 작년부터 실천하고 있는데, 친한 직원들이야 따로 선물을 챙기곤 했었지만, 친하지 않은 직원들에게는 그저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 전했던 거다. 고작 만원 넘는 돈으로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책을 선물한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 책을 거의 안읽는 직원들에게는 흥미롭고 빠져들만한 소설을 선물하면 책에 대한 재미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지난주 금요일에 생일을 맞은 K 대리는 그간 나로부터 빌려서 많은 소설책을 읽었던 터다. 그 직원은 평소에 나랑 친해 해마다 생일 선물을 챙겨주었는데, 이번에는 챙겨주면서 책 한 권을 더 준비했고, 그렇게 준비한 책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책,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다음에 생일을 맞이할 직원들에게는 이 책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다. 실상 대부분의 책이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더불어 작가가 글을 참 잘쓴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상과 고전, 강의에서부터 자신이 하고자 말을 섞어서 한 권의 책으로 펼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해 보이는 거다. 그래서 이런 글쓰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기 위해서 내 일상과 책들에서 소재를 가져오는 것. 그러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피력할 수 있다면, 완성된 글쓰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이런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또한 공부하는 그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도 들었다. 아이를 낳고 살면서 자신이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여성이 되어 있었던 것에 대해 자각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해서 실천에 옮기는 것. 강의를 열심히 듣고 또 강의에서 정해주는 책을 열심히 읽고 생각해 보는 것.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더 나아가 공부를 하는 것들이 무척 좋아보인 거다. 나는 공부를 못했고 또 공부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인지,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진 사람, 실제로 공부를 하는 사람을 보면 막 존경스럽고 대단한 느낌이 든다. 또한 마음으로 겁나 응원해주고 싶어지는 거다. 해보라고, 열심히 해보라고, 하고 싶은 공부 막 해보라고 하고 싶어지는 거다.
나로 말하자면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얼마나 쉬운 위치에 있는가, 하고 새삼 생각했다. 누군가 열심히 공부하고 글로 써놓은 것을, 그저 책 한 권의 값을 치르고 앉아서 읽기만 하면 되니.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지만, 나는 그런 능력까지는 안되고. 그저 여기에서 책을 읽고 책으로 대신 공부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책이 있다, 좋더라, 하고 말해주는 일은 할 수 있으니 나는 그걸 하는 걸로.
그리고 다른 얘기인데, 저자가 뉴욕을 떠나 시골에 가서 살게 되기 전에 911 테러사건을 겪게 되는 걸 보면서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누군가랑 함께 산다는 건, 저자의 표현대로 '이인삼각'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할텐데, 서로가 서로의 다른 점들에 대해 인정하고 조율하면서 자기들만의 룰을 만들고, 그러면서 같은 경험을 하고 또 그렇게 두 사람만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 걸 의미할테다. 일전에 여동생과 제부가 출산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보고 함께 공유하며 얘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의 사건을 같이 공유하게 된다는 건 그 자체로 특별할 것이다. 뭔지 모를 묵직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휴 그랜트'와 '사라 제시카 파커'가 나오는 영화 [들어는 봤니, 모건 부부?] 에서 이 부부는 사이가 안좋았는데, 여차저차 시골에서 며칠 같이 묵으면서, 그들이 함께 있었던 장소, 떠들썩한 도시의 소음을 함께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장면이 있다. 내가 지금 이시간 눈 앞의 어떤 한 사건을 누군가와 함께 보고 있다는 것. 우리는 거기에 대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 라고 시작하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 그때 거기에서 말이야'로 시작할 수 있는 얘기. 함께 산다는 건, '우리가 그때' 라고 시작할 수 있는 문장들이 더 많아진다는 걸 의미하겠지.
방송을 통해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비행기 충돌이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테러리즘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콕 들어와 박혔다. 그 단어는 쉽사리 떨쳐지지 않았다. 품 안에 평화롭게 안겨 있는 실비아를 내려다보았다. 숨 쉴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둥글게 말려 있는 손이 보였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들로부터 실비아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실비아를 꼭 안아 주었다.
그 사건 이후에야 테러리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남편과 나는 침대 한가운데 안전하게 눕혀 놓은 실비아 양쪽에 웅크린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참사의 물결을 지켜보았다. 나는 다시 일어나 앉아 양팔로 내 몸을 감싸 안고는 얼어붙어 있었다. 심장은 벌새의 날갯짓만큼이나 빠르게, 심장이 더는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폭주하는 심장의 고동이 진정되기를 바라면서 실비아의 놀랍도록 앙증맞은 발가락을 하나부터 열까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반복해서 셌다. (p.80-81)
저자인 스페터니와 남편 존은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뉴욕을 떠나는 것을 앞당긴다. 그렇게 거주지를 옮긴 그들 부부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고, 그러나 헤어지지 않은 채 그들은 다시 몇해를 시골에서 보낸 뒤 뉴욕으로 함께 돌아온다. 이들 부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설사 헤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해도 저 시간들에 대해 가끔 돌이켜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공포스럽고 아픈 순간 눈물 흘렸던 것부터 시작해서, 갓 태어난 아이를 가운데 놓고 양쪽에 누워 있었던 시간, 순간 들을. 그것만큼은 앞으로 누굴 만나 어떤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결코 지울 수 없는 둘만의 역사가 되어있지 않을까. 사랑한다는 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둘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이 재미있어서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조용한 까페로 찾아가 책을 읽고 싶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의 저자 '스테퍼니 스탈'처럼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걸 끔찍하게 생각하는만큼, 내가 내 먹을 밥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무실에 궁둥이 딱 붙이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 책을 마저 읽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지... 안타깝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