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보이는 거,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 이 두가지는 정말 괜찮은 건 아니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글을 올려놓고 잘했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그건 채 반나절도 가지 못했다. 결국 그 글은 내려야했고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이 반나절의 시간이 내게는 고통의 시간이었고, 그래서 어제 아침부터 탈이 나기 시작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속이 뒤집혔고 출근하는 내내 구역질이 났다. 점심을 거르고 약국에 가 약을 사 먹었고 온 몸이 추위로 떨렸으며 오후부터는 어지럽기 시작했다. 괜한 짓을 했나보다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멘탈 갑이라고, 다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안되는 것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점점 더 머리가 아팠다. 남동생에게 퇴근길에 나를 기다렸다 태워가라 일렀고 남동생은 우리 회사앞에서 내가 나올때까지 기다렸다. 남동생의 차에 올라타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좌석이 너무 뒤로 쳐진 것 같아, 라고 하니 남동생이 의자 밑에 뭔가를 조절하라고 했고, 나는 손으로 더듬었지만 찾을 수 없어 내버려두었다. 일단 그냥 갈게, 하고. 남동생은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자신이 찾아주려고 손을 뻗었는데, 나는 어지러우니까 좀 내버려둬 일단 그냥 갈게, 했다. 나는 마음껏 아프다고 투정을 부려도 좋았다.
집에 가서는 저녁을 거르고 씻고 누웠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추워서 달달 떨고 있었더니 아빠가 안방에 있는 온수매트를 작동시켜 주셨다. 여기 들어가 누워 있어, 라고. 나는 보통 온수매트 위에 눕는 걸 싫어하고 침대가 아닌 데 눕는 걸 싫어하지만 아빠 말대로 했다. 아빠는 잠시후 이불을 더듬더듬 만져보시며 따뜻해졌냐 물으셨다. 그러더니 우리 병아리 아프지 마, 라고 하셨다. 나는 거기에 응수했다.
응 난 아빠 병아리 삐약삐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빠는 빵터지셨고 내 다리 쪽에 앉아서 텔레비젼을 시청하던 남동생은 이게 대체 뭐냐며 삼십대후반 병아리라니, 하고 혀를 차더니 이내, 불쌍하다 닭도 되지 못하고, 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아빠는 다시 매트위를 만져보셨다. 이제 따뜻하지? 하고. 그래서 나는 또 말했다.
응 따뜻해요. 난 아빠 병아리 삐약삐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여기서 멈췄어야 되는데, 내가 내 방으로 위치를 옮겨 침대에 누워 있는데 너무 열이 나는거다. 끙끙 앓다가 아빠 방으로 가서 아빠, 내 얼굴 좀 만져봐, 했다. 아빠는 손으로 내 뺨을 만지셨고, 너 열나네, 하셨다. 응. 병원 안가도 되겠냐고 하셔서 응 안가도 돼 자고 일어나면 다 나을거야 라고 했는데, 그러고 그냥 돌아오지 않고 한 번 또 한거다.
난 아빠 병아리 삐약삐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빵터져서 웃던 아빠가 말씀하셨다.
싸대기 날리기 전에 니 방 가서 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딸한테 애교를 바란건 아빠셨잖아요? 근데 왜 이제와서 싸대기 날린다고 하는거죠?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내 방에 돌아와서 내가 아는 남자들중 가장 상남자, 울트라 슈퍼 마쵸맨과 통화를 하는데, 하는동안에도 열은 나고 머리는 아프고, 그러고 있었는데, 글쎄, 이 울트라슈퍼마초맨한테 내가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고, 울트라슈퍼마초맨상남자는 신청곡을 받는다고 했으며, 그래서 나는 무려, 그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노래인, 심규선의 <담담하게>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그 노래를 불러줬다. 무려 울트라슈퍼상남자 마초맨이, 심규선의 담담하게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건 뭐 가히 폭발적인 영향력을 내게 주었는데, 암튼 내 열은 그 노래 듣고 내려간듯? 아침에 생각하니 또 웃긴거다. 상남자의 담담하게 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래전에 한 남자가 수화기를 통해 내게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는데, 내가 불러달란 것도 아니고 지가 술취해서 부르고 싶어서 부른것 같았는데, 노래는 잘 부르는 남자였지만, 암튼 그때 나는 그게 되게 싫었다. 상대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거다. 손은 어디다 둬야 하는지, 전화기를 계속 들고 있어야 되는지. 마치 죽어있는 시간 처럼 느껴져서 진짜 딱 싫은거다. 그 뒤로 내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박혀 있었다. "노래불러주는남자=쓸데없는시간을만들어내는남자" 암튼 딱 싫어가지고 혹여라도 그런 일이 생길까봐 남자사람들과 통화를 할때면 애초에 밝히고 시작하곤 했다. 전화기에 대고 노래부르는 남자 딱 싫어, 라고. 그동안 난 대체 뭐하라는 거야?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그런데 어제 알았다. 그럴 때는, 그냥 들으면 되는 거였다. 뭘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들으면 되는 거였다. 들으면서 좋아하면 되는 거였다. 듣는 동안 나는 내내 웃었다. 내가 낫고 있다는 걸, 내가 알 수 있었다. 상남자의 담담하게는 그런 거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한결 나아있었다. 기분도 좋았다. 밥도 맛있게 먹었고, 아픈 딸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말하며 나는 아침을 차려준 아빠의 궁둥이를 두번 툭툭, 쳐줬다. 엄마가 안산에 가계신데, 내가 아픈 통에 밥을 하고 차리는 것도 설거지도 다 아빠 몫이었다. 뭐 사실, 안아파도 엄마 안계실 때 아침은 아빠가 차려주신다 -0-
어제 노래를 불러준 상남자에게 좋았다고 말했고, 어제 이야기를 나눈 친구들에게 고마웠노라 말했다. 덕분에 나아졌다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건 이렇듯 힘이 된다. 내 주변의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아침이었다. 그 고마움 때문에 또 기뻤고.
우울한 독서를 마친 뒤에 어떤 책을 읽을까 책장 앞에서 한창을 고민했다. 역시 잭 리처가 생각났지만, 순서대로 읽고 싶었고 다음권이 내게는 없었다. 검색해서 다음권을 장바구니에 넣어두고는 그렇다면 마이클 코넬리를 읽을까 하다가, 아니야, 밝고 아름다운 거, 하고 책장 앞에 서서 아무리 노려봐도, 읽지 않은 책들에 대고 뭐가 더 아름답고 밝은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참에 확-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으니, 그래, 이 책이라면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단번에 꺼내들었다.
그리고 첫장을 펼치면서부터 나는 아주 크게 만족했다. 우앙- 좋아- 마치 우울할 때 먹는 버터를 잔뜩 쳐바른 빵 같은 느낌이랄까.
베르티 바톨로티 부인은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커피 넉 잔을 마시고, 버터와 꿀을 바른 주먹만 한 빵 세 개와 반숙 달걀 두 개를 먹었다. (p.7)
여기까지만 읽고서도 좋긴 했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버터와 꿀을 발랐다지만 결국 빵 세개와 달걀 두 개 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 다음줄은 내 욕망을 반영해줬다.
그런 다음 잡곡 식빵 한 장에 햄과 치즈를, 우유 식빵 한 장에는 소시지를 얹어 먹었다.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는 바람에 커피와 노른자를 흘려 연갈색 잠옷에 얼룩이 생겼다. 빵 부스러기들이 잠옷 속으로 떨어졌다. 바톨로티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빵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한 발로 깡충깡충 뛰었다.(p.7)
아! 너무 좋다. 역시 저게 끝이 아니었어. 햄과 치즈, 소시지!!!!! 완벽한 아침이다!!!!! 아 치킨이 너무 먹고 싶다. 요즘 굽네치킨의 고추바사삭치킨이 유행이라던데, 나도 그거 한번 먹어보고 싶네. 오늘 집에 가서 먹을까? 아픈것도 다 나았으니? 나도 매일 아침에 햄과 치즈와 소시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베이컨과 고기가 있어도 좋고. 아, 그럼 정말 좋겠다. 버터는 필시 구비!! 그러고보면 내가 좋아하는 아침 식단은 정말이지 호텔 조식뷔페다. 딱 그거야. 난 그걸 좋아해. 근데 호텔 조식뷔페는 내가 자꾸 갖다 먹어야 되서 귀찮어...다른 사람이 가져다주면 내가 원하는 대로 가져오지 않아서 또 빡쳐.....그러니까 이걸 한 상 가득 차려 놓는거다. 가만있자, 아침 밥상이 완전 내 스타일인 영화가 있었는데.
이미지는 못찾고 영상만 찾았다. 여기 ☞ http://www.traileraddict.com/did-you-hear-about-the-morgans/breakfast
암튼 혼자 사는 베르티 바톨로티 부인이 이렇게 아침부터 잘 먹는 게 나는 몹시 흡족했는데(나는 혼자서도 아주 건강하게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한 애정이 생긴다), 그녀는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바톨로티 부인은 욕실로 갔다.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욕조는 이미 금붕어가 차지하고 있었다. 어제 수족관에서 사 온 작은 금붕어 일곱 마리와 큰 금붕어 네 마리가 욕조 안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아무리 물고기이지만 변화를 원할 것 같아서 그 곳에 풀어놓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휴가를 내어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데, 허구한 날 둥근 어항 속에만 갇혀 지내야 하는 물고기가 불쌍해서였다. (p.8-9)
아, 정말 너무 좋지 않은가. 사람들이 멀리 여행을 가듯, 금붕어에게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톨로티 부인이라니. 이 마음이 너무나 유쾌하고 따뜻해서 모두에게 전달해주고 싶었다. 이거봐, 금붕어에게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톨로티 부인은, 가끔 욕조에 금붕어를 풀어 놓는대! 하고 말이다.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씨익- 웃음을 짓게 되지 않을까?
혼자 사는 베르티 바톨로티 부인 앞으로 여덟살 소년이 배달된다. 소년은 부인을 엄마라 부르게 되고, 한 번도 엄마인 적 없었던 부인은 이제 이 아이에게 사랑을 주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배달되어진' 소년은 이미 그 나이의 아이가 해야 할 것들을 분명하게 교육받은 상황,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앞으로 알려줄 바톨로티 부인의 이야기가 아주 기대된다. 부디 아이가 가르쳐준 대로만 지내지 않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자기전에 사탕을 먹으며 죄책감을 느끼는 아이라니, 안된다. 죄책감은,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두 개 연달아 먹었을 때 느끼는 거지, 사탕 하나에 느끼는 게 아니다. 크리스피 크림 도넛도 한 개 먹었다면, 그때는 영혼이 사르르 녹는 기분만 느끼면 되는 거다. 죄책감은 두 개째부터, 뭐 싫다면 세 개째부터 느껴도 좋다.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잔뜩 발랐다고 그 쾌락에 몸둘 바를 모르며 살짝 죄책감을 느끼지도 말자. 두 개 먹은 게 아니라 한 개 먹었는데, 뭐 그리 죄책감을. 세 개 먹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헤비한 육체는 헤비한 음식으로부터! ( ")
여튼 두 끼를 거르고 일어나 거울을 보니, 와- 한층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얼굴이 더 깊어졌달까. 깊어진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출근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내 얼굴의 깊어진 아름다움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 얼굴은 왜 드러나지 않게 아름다운가..왜 은근하게 아름다운가..대놓고 아름다워도 될텐데............
치킨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