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양재역 8번 출구로 나오면 대체적으로 행복하다
라고 글을 쓰려고 했는데, 오늘은 지하철에서 내내 이 노래를 듣다가 가슴만 두구둥두구둥 거리고 말았다.
http://youtu.be/e-ijD7kdTs4
책도 못읽었어...
8번 출구로 나와 회사까지 걸으면, 그 시간이 무척 행복해서 부러 선택한 방향이었다. 5번 출구가 2-3분 정도 시간은 더 적게 걸리는데 말이지. 물론, 8번 출구로 나온다는 건, 그 앞의 스벅에 들른다는 걸 의미한다. 어제 마침 조조 모예스의 신간을 샀다가 이벤트에 당첨되어 스벅 아메리카노 기프티콘이 온 게 아닌가. 아침에 들러 커피를 마시자, 싶어 텀블러를 들고 스벅에 가 커피를 받고, 또 힘차게 걸었다
라고 쓰고 싶지만 저 노래 때문에 힘차게 걷기는 개뿔...눅진눅진. 아주 감상에 쩔어가지고 나를 누군가 빨래 짜듯 짠다면 줄줄줄 감상이 흘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아- 이래가지고야 마음먹은 대로 《자살의 전설》과 《지평》에 대한 얘길 할 수 있을까? 힘들어..에너지 딸려.........치킨 먹고 싶다. 아침부터. 어젯밤에는 생선 구이가 먹고 싶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는데..하아- 치킨 먹으면 에너지가 솟아날 것 같아. 그러면 자살의 전설과 지평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텐데...
라고 쓰지만 역시 자살의 전설에 대한 얘기를 한 번 해보자.
얼마전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나는 그런 얘기를 했었다. 사람은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해야 한다고.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자신의 한 몸을 챙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자신의 몫을 잘 살아내고 자신의 한 몸을 잘 건사하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한다. 존재 자체가 부담이나 기 빨리는 게 아닌, 내내 신경쓰이고 걱정하게 만드는 게 아닌, 그저 순수하게 '좋아함'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그런 사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힘들다는 말을 내내 들으면서 마음 끓이고 싶진 않다. 그보다는 하루 하루를 건강하게 채워나간다는 말을 듣고, 그래서 상대에 대한 걱정이나 염려 보다는 더 많이, 믿음과 안정감, 그리고 행복함을 느끼고 싶다. 이 세상에 상처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위로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상대를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안에, 연민이나 동정이 끼어들기를 원치는 않는다. 물론, 내가 이렇게 원한다고 해서 모든 관계가 이렇게 구성되어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분명 친근한 누군가에게 더 많이 기가 빨리고 어쩌면 나는 누군가의 기를 쪽쪽 빨아먹고 있을 런지도 모르겠다. 그러길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밴'은 어릴 적에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한다. 그걸 '경험'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알 수 없다. 분명 그 특별하고 비극적인 상황 속에 그는 놓여있었고, 그는 그로부터 혹은 그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경험이 바탕이 되어 그는 이 한 권의 책을 완성한다. 《자살의 전설》.
이 책을 읽는 일이 당연히 기쁠 리 없다. '코맥 매카시'의 뒤를 잇는다는 찬사에 나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글을 읽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책을 펴들고, 그러다 등장인물들이 놓인 상황에 힘이 빠져 버린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이다.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 내 행복을 뒤로 미루는 일은 어리석다고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둘은 너무 적다.
《어바웃 어 보이》에서 닉 혼비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들려주는데, 이 책을 읽다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나에게 너뿐이고 너에게 나뿐이라면, 우리 둘중 하나가 사라졌을 때 다른 하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내내 '자살'이 화두가 되는 이 소설 속에서 '자살'이란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고 있노라니, 자신의 삶을 혹은 죽음을 자신이 결정한다는 것에 굉장한 회의가 드는 것이다. 그래도 될까? 정말 그래도 되는걸까? 평생을 아버지의 자살에 휩싸여 사는 아들이 있는데, 그래도 되는 걸까? 아들의 자살 때문에 이도 저도 못하고 도망칠 생각만 하는 아버지가 있는데, 과연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그래도 되는' 일일까? 모르겠다. 특히나 <수콴 섬>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꾸만 그리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많이 무거워졌다. 본인이 약하다는 것을 그렇게 자주 드러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당신이 그렇게 약한 모습을 수시로 드러내면,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대신 아버지 옆을 선택한 아들의 기분은 대체 어떻겠냐고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둘은 바다를 따라 걸었다. 구름이 짙고 이슬비가 내렸다. 파도는 희미하고 바다는 불안하게 들끓었다. 이곳은 가파른 해안으로 전에는 거의 와본 적이 없었다. 산책은 반대편 곶을 돌아 그다음 곶까지 이어졌다. 둘 다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여자 없이는 못 살겠다. 너와 이곳에 있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내 여자 생각이 나는구나. 여자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 왜 그런지 모르겠다만, 주변에 없는 존재를 어떻게 이렇게 아쉬워 할 수 있는지, 원. 그러니까 아무리 바다와 산과 숲이 있다 해도 여자와 자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p.149)
여자와 자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사람들이 전혀 없는 수콴 섬으로 거주지를 이동한다. 십대 아들을 데리고. 아들은 엄마와 여동생도 보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고, 이곳에서의 생활이 암울할거라 충분히 짐작 가능하지만 밤에 우는 아버지를 알고 있으므로 '여기 있을게요' 라고 정말 그러고 싶은 것처럼 얘기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이 정말로 그러한 줄 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대로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만 들으려 하기 때문에. 왜 '진실'과 '진심'을 듣는 일이 그렇게나 '늦게' 우리에게 오는 걸까.
전신의 감각이 사라졌다. 갑자기 피곤하다 싶더니 입속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로이 생각이 났다. 그 애는 이런 식으로 두려움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로이의 죽음은 순간적이었다. 짐은 자신도 모르게 물을 토하고 다시 물을 삼켰다. 마치 마지막 물이라도 되는 양 허겁지겁 들이켰다. 차고 딱딱하고 불필요한 물. 그리고 로이가 아버지를 사랑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랑으로 충분해야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깨달음이란 왜 이렇듯 늘 늦기만 한지. (p.263)
죽음의 순간에서야 나에 대한 누군가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은 너무 '늦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오래전에 깨달았다면,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가 분명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그걸 깊고도 깊게 들어가보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에겐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한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엘리자베스 타운》에서 남자는 크게 절망해 자살을 시도하려고 한다. 자살을 시도하기 바로 직전, 그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자살을 진행할 것인가 전화를 받을 것인가 고민하던 남자는 자살하려던 걸 잠시 멈추고 전화를 받는다. 전화는 누나로부터 온 것이었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자살은 연기되었다. 그는 상복을 챙기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 자살의 연기는 좀 더 연기된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서.
나는 이 우연들이 겹치는 장면들을 보고,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분명 슬픈 소식임에 틀림없지만, 그 죽음으로 누나가 전화를 걸고, 그 전화를 받음으로써 남자는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내 관심을 갖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죽음에서 조금은 더 멀어지고, 결국은 삶을 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자살의 전설》속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또 아들이,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게 있었을까. 어떤 관심, 어떤 사랑, 그리고 어떤 대화들이 그들을 자살로부터 구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 자살을 선택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시작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아있는 자들에게 삶은 어김없이 계속되겠지만, 그 삶의 수많은 순간들에 고통이 찾아들 것이다. 아프다.
어젯밤에도 친구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해야 한다는 대화를 나누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친구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안정된 일이다.
이 책의 문체는 이 책의 띠지에서 말한 것처럼 조금 코맥 매카시를 닮긴 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줌파 라히리'를 떠올렸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 방향대로 나아갈 때 비로소 자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에서 그러했다. 치과 의사를 원하지 않았지만 치과 의사로 살고 있는 아버지를 묘사하는, 이런 부분이 그랬다.
하나의 삶을 타인의 삶 안에 구겨넣을 수 있다면 타성은 소멸할 것이다. 깊은 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아버지는 오랫동안 차를 몰아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내 작은 충치 신경을 뚫고, 구멍을 때우고, 치형을 만들고, 가르치고, 흘겨 보았다. 그리하여 그의 전 생애가 우그러지고 왜소해졌다. (p.271)
책을 읽을 때는 그저 아프다는 느낌 뿐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더 많이 생각이 난다. 수콴 섬이.
친구와 나는 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았다.
어제 우연히 이 영화의 얘기가 나왔고, 그래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다보니 당연히 자세히 기억날 리 없었다. 여자는 세금을 안냈어, 라고 내가 말했고 남자가 세무사였던것 같아, 라고 극가 말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세금을 내라고 말하려 갔다가 여자를 처음 만났던 것 같아, 그녀를 버스에서 보고 내릴 역을 지나쳐 그녀를 따라 내리지, 라고 내가 말했고 그랬던 것 같아, 라고 그가 말했다.복합 구조였고 남자는 자신이 소설속의 주인공임을 알고 작가를 찾아가지, 라고 그가 말했고, 아 그랬던 것 같아, 라고 내가 말했다. 그러다 이 영화를 본 후에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얘기했는데,
오늘 아침, 뜬금없이 이 영화속 장면이 떠올랐다. 어제 말하지 못했던,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이.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로 밀가루를 주는 장면. 그리고 그 장면 때문에 그 당시에도 그와 대화했던 것이. 나는 그저 밀가루를 준다고 웃었는데, 그는 내게 말했었다.
flower 대신에 flour 를 주는 건 유희겠지, 라고.
그때 처음 알았다. 아, 밀가루가 영어로는 flour 이구나! 나는 그녀가 빵집을 하기 때문에 밀가루를 선물한다고 생각했어!
어제는 기억나지 않았던 이 장면이 뜬금없이 기억나면서, 지금 읽고 있는 책,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메로베. 성이었나, 이름이었나? 하지만 명멸하는 불빛이 아주 꺼져버릴까 두려워 이 문제에 길게 몰두할 수 없었다. 수첩에 이 이름을 적어넣은 것만 해도 벌써 소득이었다. 메로베. 다른 것으로 생각을 돌리는 척하기. 기억을 밀어붙이지 않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제 스스로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려면 그 수밖에는 없었다. 메로베. (p.11)
남자는 젊은 시절의 기억들이 희미해짐을 깨닫고 몰스킨 수첩 하나를 준비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기억이 날 때마다 메모를 한다. 그리고 그 파편의 조각들로 기억들을 되새겨보려고 한다. 메로베. 기억난 그 이름이 성이었는지 이름이었는지도 모르는채로 그저 두다가, 마침내는 그에 관련된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메로베 주변의 사람들까지. 그가 누구와 연관이 있었는지도, 그리고 그가 그 당시의 '그녀'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됐는지까지도, 서서히, 결국은, 떠올리고 만다. 이 남자와 내가 겹쳐졌다. 몇 년전에 본 영화를 툭- 던졌고, 이랬던가 저랬던가 기억 나는 부분들을 던지며 서서히, 그렇게 기억들을 찾아냈고, 밀어붙이지 않고 놓아두었더니 오늘, 불쑥 생각나잖는가. 파트릭 모디아노는 지평에서 이런 기억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구나, 새삼 다가왔다.
이번호 시사인에는 읽을 거리가 아주 풍성하다.
어제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굴뚝에 올라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기업이 있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항상 먹먹하게 한다. 이런 일들을 알고 있다는 건, 유의미하다. 지금 당장 액션을 취하는 게 아니어도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앞으로 어느 방향을 봐야할지를 알 수 있으니까. 알고 있다면, 모르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에 실패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사도 무척 좋았다.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사춘기 아이들에 대한 글은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여동생이 오면 읽어보라 권할 것이다.
다시 저 위에, 출근길 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와- 그냥 짜면 감성이 후두두둑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다 보니 에너지가 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뭔가 더 에너지를 써야할 것만 같아졌다. 그러다 가로수를 보며 생각했다. 아, 장작 패기! 장작 패기는 어떨까. 나무를 잔뜩 도끼로 찍고 베고 하는 일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야 하니, 그러다보면 이 축축한 감성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아, 그럴 바엔 아예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벌목꾼이 되는 건 어떨까. 나는 벌목꾼이 되어 하루 온종일 나무만 베어대는 거다. 그러다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면 나무 그늘에 앉아 좀 쉬면서, 또다시 어김없이 감성이 나를 덮치려고 하면 다시 벌떡 일어나 나무를 베고...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버터를 잔뜩 발라 구운 세숫대야 만한 스테이크를 먹고...그러다 일이 끝나면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술을 퍼마시고 기절을 하고....그러면 이 감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육체의 고단함에 감성을 뒤로 좀 던져둘 수 있지 않을까.
감성에 푹 젖어 벌목꾼이 되고 싶어지는, 그런 아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