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연차를 냈다. 평일 낮에 극장에 가는 걸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터라 신나게 영화를 예매하고 극장엘 갔는데, 오, 극장을 마치 내가 전세낸 것처럼 신났다. 나를 포함해서 관객이 열명도 채 안됐던 것. 움화화핫. 씐나요!
영화 《타임 투 러브》는 어..그저 그런 영화였다. 딱히 좋지는 않았지만, '설사 비참할지라도 당신과 함께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주인공의 말은 인상깊었다. 어떤 사랑을 선택하느냐도 본인의 결정이지만 사랑을 선택하느냐 아니냐도 또 본인의 몫이니까. 어떤이는 비참한게 싫어 사랑앞에 도망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과 행복은 대단한 게 아니다. 정말이지 별 게 아니다. 그런데 그걸 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지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하고 또 그걸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화가 통화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계속 만나고 싶다면, 그게 뭐 사랑이지. 게다가 그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는 게 행복인거고.
여자는 약혼자가 있었지만 미술관에 가고 요가를 하는 일등에 자신의 약혼자와 함께 하지 않는다. 대신 남자를 불러 함께한다. 마주보고 깔깔대고 웃는 일을 함께 하는데, 결혼약속은 그때부터는 세뇌에 지나지 않는다. 내 앞에 앉아 즐겁게 해주는 이남자는 친구다,친구다,친구다, 라고 계속 되새겨야 하는 까닭은 그가 더이상 친구만으로 느껴지진 않기 때문이다. 얼라리여~ 남자는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인으로 다가서려고 하지만 여자는 자꾸 아니라고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 라고 생각하는데 상대는 '그건 사랑이 아니라니깐' 이라고 자꾸 말하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나는 이럴때 그래 알았어 병신아, 니 감정도 모르는 병신. 하고 돌아설테지만 영화속 남자는 내 말이 맞다니까!! 하면서 들이댄다. 누가 상대와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영화속 남자다. 됐고.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주인공의 게이친구 소설가인데, 그는 행위예술이랍시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공공장소에 놓아두고 도망친다. 그 책을 발견하는 누군가가 재미있게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리고 그 책은, 이미 나도 재미있게 읽은, 바로, 《콜레라 시대의 사랑》 이었다. 꺅 >.<
아, 어찌나 반가운지. 게다가 이 낭만적인 행위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사실 나도 이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을 예전부터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다 책 놓아두고 오기, 같은거. 누구든 발견한 사람이 읽어주었으면 해서. 영화속에서 선택된 책도 소설이었지만, 공공장소에 놓아두고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그 책은, 역시 소설이어야 적당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을 것, 빠져들 것, 책장을 덮고도 한동안 그 책 생각을 하게 될 것,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보는 기분이 들게할 것. 크- 이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공공장소에 놓아두고 도망치는 책이 《잡식동물의 딜레마》 라든가 《만들어진 신》이라면, 크, 안어울리잖아?
나는 낭만적인 기분이 되어, 내가 공공장소에 두고 온다면 어떤 책이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당연히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가 떠올랐다. 아 좋아.. 또 뭐가 있을까?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좋지만 두 권이라 부담된다. 영화속에서는 한 권이었는데. 음, 《채링크로스 84번지》도 좋을것 같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클럽》이어도 좋을테고. 줌파 라히리의 책, 《그저 좋은 사람》은 어떨까? 한창훈의 책, 《나는 여기가 좋다》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다. 《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도 괜찮지 않을까? 《두도시 이야기》나 《순수의 시대》, 《내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도 좋을것 같다. 아, 또 뭔가 강한거 한 방 없을까? 어쩌면 이 모든 책들을 뒤로한 채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를 놓아두고 오는 게 가장 좋을지도 모르겠다. (읭?)
토요일엔 영화 《황금시대》를 보았는데, 혼자이고 먹고사는 걱정없이 지내는 지금이 내 황금시대가 아닐까 한다, 라는 주인공의 말이 정말 그대로여서 씁쓸했다. '샤오홍'이란 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고, 영화속에서 가끔 인용되는 그녀 소설의 문장들이 딱히 와닿지 않아 좀 지루했는데, 영화만 보고서는 사실 그녀가 왜 '천재'라는 타이틀을 얻는건지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그녀의 소설을 한권쯤 읽어보고 싶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과연 번역되어 나와있긴 한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오늘 친구의 블로그에서 《생사의 장》이 이미 나와있음을 알게됐다. 오!
근데 뭔가 표지도....지루하게 생겼네?
전날 새벽내내 친구랑 수다떠느라 잠을 잘 못잤고 아침부터 험난한 남한산성에 올랐던 터라 극장에 가면서는 너무 졸린거다. 아, 졸것 같아 졸것 같아, 했는데, 역시나 졸아버렸... 미안, 탕웨이. 당신은 변함없이 아름답더군요. 예뻐..
그런데 제목으로는 역시 《5일간의 마중》이 훨씬 내스타일인 것 같다. 이거 보러 가야겠다. 근데 언제? ㅜㅜ
토요일에는 친구랑 남한산성을 올랐는데, 와, 처음 가보는데 너무 예뻐서 기분이 좋아졌다. 계속 비탈길을 올라야해서 숨이 차지만, 중간중간 멈춰서서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오르니, 크, 기가 막힌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역시 아름다운 풍경은 눈에 담는게 제일인 듯. 아이폰으로 찍으니 내가 보는 만큼의 아름다움이 살아나질 않는다. 안타깝게도.
일요일엔 귀여리를 다녀왔다. 코스모스가 절경을 이룬다고 아빠가 우릴 이끌고 가신건데, 우리가 갔을때는 이미 코스모스가 지고 있었다.
일요일은 부모님 결혼기념일이어서 다같이 경기도로 가서 식사를 했다. 남동생의 차를 타고 갔는데, 남동생의 차 바닥에 깔린 시트가 지저분한거다. 부모님은 왜이렇게 차를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냐고 지청구를 늘어놓으셨고, 남동생은 깨끗하게 세차를 다 했는데 다음날 회사의 야유회를 다녀왔더니 이렇게 됐다고 했다. 청소 다시 할거라면서. 이에 아빠는 털면 된다고 하시고는 당신이 털어주겠노라 하셨다.
식당에 도착해 식사를 하고 계산을 마친뒤 엄마와 나와보니, 이미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시던 아빠와 남동생이 차 시트를 빼내어 털고 있더라. 아빠가 아니면 누가 남동생 차시트에 신경이나 쓰고 그걸 털어주려고 할까, 갑자기 이 사소한 장면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래서 가족인가, 싶어지는 마음과 함께. 정말 별거 아닌 것들, 같이 식사하고 지저분한 차 시트를 대신 털어주고, 함께 지고 있는 코스모스를 보러 다녀오는 이런 것들이. 누구나 다 하는 이런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특별한 차림 없이 그저 집안에 있던 그대로 나가 할 수 있다는 것. 이건 가족만이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어진거다.
아, 물론 남동생은 화장도 안하고 머리도 안빗은 채(원래 안빗는다) 나가는 나를 보면서 자기 차에 있던 모자를 줬다.
- 써라. 추하다.
- 나는 완전 나 이쁜것 같은데? 난 나 괜찮아.
- 써라.
그러자 옆에서 엄마가 말씀하셨다.
- 써.
그래서 모자를 썼다. -0-
아, 그리고 금요일 잠이 오지 않던 늦은 밤, 드디어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움화화화핫.
나는 책과 색연필을 따로 샀는데 저렴하게 샀다고 좋아했지만, 생각해보니 알라딘에서 샀으면 적립금이 생기고 마일리지도 생기잖아? 뭐 그거나 이거나인듯. 여튼 이걸 사두고서는 흐음, 그렇지만 내가 이걸 칠하는 과정에서 어떤 압박감을 느껴 스트레스를 받지나 않을까 싶어져 칠하기를 자꾸 미뤄왔다. 나는 내가 스트레스 받는거 진짜 조낸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머릿속이 터질듯이 복잡하였고, 나는 조용한 거실로 나가 여차하면 티븨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틀어두고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처음 색을 칠하기로 결정한 건 부엉이 그림이었다. 애초에 이 책을 사게 된 것도 블로그 이웃의 부엉이 때문이었으니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독특한 부엉이를 만들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아..이 부엉이는 과연 어떻게 되려나. 한 군데를 칠하고 다른 군데를 칠하기 위해 색을 고르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고 손에 힘을쥐고 색을 칠하면서, 오,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러니까, 차분해지는 거다!! 그간 백팔배로도, 산책으로도 차분해지지 않았던 머릿속이 정리가 되는거다. 아니, 이건 정리가 됐다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인데 뭐라 해야할까. 그래,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올 틈이 없는거, 그게 맞다.
나는 암기력이 딸리지만 집중력은 진짜 짱이다. 업무상으로도 부지런히 매일 성실히 일하는 편이기 보다는 걍 본척만척 했다가 한순간에 집중 빡- 해서 해치우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기한이 있는 일을 안하고 있다 치더라도, 저거 뭐 집중만 하면 한방에 끝나는데 뭐, 라는 마음가짐으로 업무를 대한달까? 이때 집중력은 단 하나에 대해서만 발휘되는데, 와, 이 색을 칠할 때 그 집중력이 도움이 되는거다. 여기에 집중하다 보니 그간 머릿속을 괴롭히고 복잡하게 만들었던 생각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것. 얼씨구나 좋구나!
이 색칠은 나에게 힐링은 아니었다. 힐링과는 거리가 멀다. 힐링은 이런걸로 하는게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나 차분해지는 데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완전 집중해서 칠하다보니 나중엔 손이 아팠지만... 여튼 현재까지는 이정도로 완성되었는데, 저 요란한 색의 부엉이를 보노라니, 아 나는 예쁜 부엉이를 만들려는 게 아니었구나, 그냥 색을 칠하고 싶었던 거구나 싶어졌다. 부엉아, 널 화투짝 같이 만들어버렸구나...미안해... ㅠㅠ
암튼 머릿속 복잡하신 분들에게 강추한다. 진짜 차분해진다. 머릿속에 들어와있던 생각들이 달아난다. 저 멀리 가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 어떤 색을 칠할까 하는 생각만 가득하게 된다.
어제는 오랜만에 조카 미모에 대한 칭찬을 들었는데 나는 조카의 엄마가 아닌 이모이면서 왜이렇게 기분이 좋아. 마치 옥희엄마가 된것마냥 부끄부끄해지고 설레이는거다. 나 예쁘다는 게 아니라 조카 예쁘다는건데. 아, 이런 옥희엄마 기분..너무 오랜만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카야, 예뻐서 고마워. 히잉. 알러뷰 뿅~ ♡
그렇지만 당신도 어렸을 때 이렇게 예뻤냐고는 묻지 말아요. 난 아니야... 아니었어. Orz
여튼 주말을 보내고 오늘 아침에 눈을 뜨는데, 와, 너무 일어나기 싫은거다. 월요일이라니, 아침이라니, 앞으로 또 일주일간 이렇게 일어나야 하다니...정말이지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그 순간만큼은, 돈많은 사람이면 누구도 상관없으니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날 먹여살릴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그냥 결혼하겠다고. 사랑 따위, 캥거루에게나 줘버리라지. 코뿔소가 가져가든가. 그딴거 없어도 살 수 있고, 그러다가 혹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가슴속에 품고 가슴으로만 열렬히 사랑하면 되니까, 제발 이 출근을 멈춰줬으면 좋겠다고. 흑흑 ㅠㅠ 나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거, 이것 좀 안하게 해달라고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에게 간절히 빌고 싶었다.
출.근.은.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