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를 두 번 밖에 보지못했고 그나마 그 두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게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극중 차강심(김현주)은 대기업 회장의 비서실장이다. 십오년간 근무했으며 회장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터, 회장의 아들인 상무(김상경)를 잘 보필해달라며 상무실에 비서실장으로 가게되고, 그러면서 상무랑 티격태격 아마도 사랑을 하게 될 것 같다. 상무는 아버지의 재혼을 빌미로 집으로부터 독립을 하게되는데, 자신이 독립해 살아갈 집을 알아보면서 그 집의 매매가는 삼억오천만원이란 부동산 중개소인의 말을 들으면서 본인은 사지 않고 '월세'로 살겠다고 한다. 그러자 부동산 중개인은 기존에 이 집을 사려고 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너에게 팔 수 있다' 라고 한다. 그리고 그 집을 사겠다던 사람이 차강심 이었다.
차강심은 본인이 사고 싶었던 집을 살 수 있다는 말에 좋아하면서 그런데 모자란 돈을 어떻게 마련하나 고민한다. 융자를 받을까 아버지에게 빌릴까, 하고. 그러다 아버지에게 빌리기로 결정하고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달라 얘기한다. 이러이러해서 돈이 모자란데 아버지가 좀 빌려주세요, 라며 그녀가 말한 액수는, 헐,
오.천.만.원. 이었다.
나는 국대떡볶이를 먹다가 헐, 하고 먹기를 멈췄다. 삼억오천만원 짜리 집을 사는데 오천만원이 모자라다는 건, 삼억원은 이미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나는 저 드라마속의 대기업 회장 비서실장이 연봉을 얼마나 받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받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녀와 나의 연차는 같다. 나 역시 십오년간 회사생활을 했으니까. 그런데 그녀에겐 삼억이 있고 나에겐 없다. 똑같이 십오년간 직장생활을 했는데 왜 그녀에겐 삼억원이 있고 내겐 없는가. 연봉을 얼마나 받으면 삼억원을 모을 수 있는가. 나는 나랑 연차가 비슷한 내 친구들을 다 불러모아 물어보고 싶었다.
너, 삼억 모았니?
이것은 후진 회사를 다니는 나만의 무능인가. 나는 당장 뛰쳐나가 더 높은 연봉을 주는 회사를 찾아 헤매여야 하는가. 일전에 한 알라디너가 평균 연봉 올린 거 보고도 헉 했었는데. 아니, 저게 평균이라니, 나는 깍아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얼마를 받으면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걸까. 십오년간 회사를 다니며 삼억원을 모으는 게 가능한건가? 만약 내가 지금보다 덜 먹고 덜 마시고 덜 읽고 덜 놀았다면, 나 역시 삼억을 모으는 게 가능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서는 삼억원을 모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삼억원은 무슨, 지금 당장 카드값 빵구나게 생겨서 이걸 어떻게 융통시키나 고민하고 있는데....후아- 엄마한테 말해야 할까. 엄마, 이십만원만 빌려줘...라고??
극중 권효진(손담비)은 병원 원장의 딸이다. 아마도 신랑감인 의사 차강재(윤박)를 아버지가 결정해준 모양인데, 여튼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를 정말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차강재는 결혼은 누구랑 하든 마찬가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 혼자 잘나서 의사까지 됐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식구들에게 '나 결혼한다' 라는 선언을 한 채 그녀와 결혼을 하기로 한다. 그런 그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보는 동료 여자닥터가 그에게 '행복하냐'고 묻자 그는 '너는 아직도 그런 걸 믿냐' 라고 답하는데, 권효진은 그 여자닥터의 존재가 마음에 걸린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그녀를 찾아가 '나는 차강재랑 결혼할 것이고, 차강재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말한다.
만약 권효진이 차강재를 믿는다면, 차강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한다면, 권효진에게 이 만남은 굉장히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만남이었을 거다. 애초에 이런 만남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권효진은 차강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차강재가 자신을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므로 그녀는 차강재를 믿을 수도, 확신을 가질 수도 없다. 자신의 사랑, 자신의 결혼, 자신의 남자는 자신이 나서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곁에 자신보다 더 오랜 시간 함께 있는 사람, 허물없이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 그녀를 찾아가 '내가 그의 아내될 사람이야' 를 반드시 선언해야만 하는 그 마음은, 결국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걸 인정하는 꼴이다.
질투는 '상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는 게 아니다.
질투는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온다.
내가 나를 사랑하므로 '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므로 질투가 온다. 왜 그랑 더 오랜 시간 대화하는 여자가 내가 아니지? 왜 그랑 웃으면서 편하게 대화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지? 그건 당연히 나여야 하잖아? 내가 그를 사랑하니까 그도 '나를' 사랑해야 하잖아?
또한 질투는 상대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온다.
그는 언제고 어떤 상황에고 내 옆에 있을 것이다, 라는 확신 대신 '그는 언제고 다른 사람으로 인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온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항상 그의 옆에 있다는 것. 나와 나누지 못하는 대화를 나누는 다른 상대가 있다는 것. 나에 대한 사랑이 강하지 않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것 때문에 질투는 온다. 그러므로 사실 저 상황에서 권효진이 찾아가야 할 대상은 그 여자닥터가 아.니.다.
그 여자닥터에겐 잘못이 없다. 물론 그 여자닥터가 차강재를 좋아한다. 그를 유혹하고 싶어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여자에게 흔들리고 권효진 옆에 붙어있지 않는 사람은 다름아닌 차강재다. 권효진이 맞서 상대해야 할 대상은 여자닥터가 아니라 차강재다. 차강재의 마음을 잡을 생각을 해야하는 거지, 여자닥터를 찾아가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며, 스스로 그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걸 인정하는 꼴이다. 차강재가 사랑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차강재를 알아야지 차강재 옆에 있는 여자를 알려고 해서는 안되는거다. 그러므로 그녀가 안타깝고 불쌍하다.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나온다. '그애가 뚱뚱해진다고 해서 내가 날씬해지는 건 아니다' 라는 사실. 학교 퀸카에게 살찌는 음식을 아무리 줘봤자 내가 날씬해지는 게 아니다. 권효진이 그녀에게 가 아무리 '내가 그랑 결혼할 여자다' 라고 외쳐봤자, 그게 사랑이 되는 게 아니다. 설사 그 여자닥터가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하고 차강재의 눈앞에서 사라진다고해서, 차강재의 사랑이 갑자기 권효진에게 불쑥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른 누구 때문에 그가 오롯이 내 몫이 안되는 건 아니다, 라는 거다. 왜, 야광토끼의 노래가사중에도 나오지 않는가.
만약에 내가 너를 그녀보다 먼저 알았더라면
그래도 넌 그녀를 택했겠지 난 그냥 아닌거지 -can't stop thinking about you 中
'그녀 때문'이 아니다. '나' 때문인 거다.
아무튼 나는 삼억이 없고 삼억을 모아둔 남자친구 하나 없다. 오늘도 적립금과 마일리지를 털고 신한카드 사이트를 통해 3프로 할인받아 내 돈 주고 산 책들이 도착했다. 내가 돈 벌어서 내가 책 산다. 내가 돈 벌어서 술을 마시고 삼겹살을 먹으므로 삼억을 당최 모을 수가 없다. 안먹고 안읽어도 삼억을 모으는 건 내게는 현실가능성이 없는 말이지만. 뭐,
그것과 별개로 차강심과 상무의 러브스토리가 궁금하다. 간질간질 긴장되는 로맨스가 펼쳐질 것 같아 기대된다. 그래서 어제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로맨스를 좀 읽어보자 싶어 알라딘에서 이래저래 검색해봤는데, 도무지 뭐가 제대로된 로맨스 소설인지, 뭘 읽어야 막 짜릿짜릿해질지 몰라 안샀다. 결국 읽을지 안읽을지도 모르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도착했구나. 내가 바라는 것과 실제 내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이렇듯, 아주 먼 거리가 존재한다.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