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베트의 만찬》의 배경이 되는 덴마크의 한적한 마을은 배경도 현재가 아니라 '저런 마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이 영화를 보고싶었고 그래서 보기전에 책도 부랴부랴 읽었었다. 책을 읽고 쓴 글을 찾아봤더니 그당시의 나는 이 책을 읽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더라.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난 지금은 내 마음이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고 멘탈에 커다란 충격만 남겼다.
나는 푸짐한 식사가 나오는 영화가 좋다. 물론 푸짐하지 않은 식사도 좋다. 그러니 바베트의 '만찬'도 내가 좋아할 영화였다. 책에서 마지막 만찬 장면에 내가 얼마나 이 영화를 보고 싶어했는지 나는 기억한다. 와인과 음식을 입안에 넣고 사람들이 감상하는 그 장면들을 나는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영화를 통해 직접 '보고'나니, 제기랄, 책만 읽을걸, 하는 후회가 어마어마하게 몰려왔다. 일단, 이런 요리는 괜찮다. 이 만찬에 참석하고 싶게 만들어 준다.
요리를 내가는 틈틈이 바베트가 와인을 입안에 넣고 음미하던 모습, 만찬이 끝나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등도 기억에 남는다. 그렇지만...그렇지만.....바베트가 프랑스로부터 식재료가 무사히 도착했다며 리어카 한 가득 재료를 부엌으로 옮길 때, 부엌위에 늘어놓은 식재료들을 볼 때...아............진짜 멘탈에 무리가 왔다. 거기엔 살아있으므로 움직이고 짹짹 소리를 내는 메추리 여러마리가, 발을 꿈틀대며 움직이는 커다란 거북이가 있었던 것이다. 오, 신이시여.
물론, 이런 장면에 충격을 받는 내가 모순됐다는 생각을 당연히 한다. 나는 소와 돼지와 닭을 무척 잘 먹으니까. 소와 돼지와 닭도 살아있는 생명이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책 속에서 나는 이미 이 식재료들을 만났던 터다. 책에서 읽고 영화로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도 바로 이, 나다. 그러나 활자로 읽는 것과 실제로 눈 앞에서 보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달랐다. 저 작은 메추리들을, 저렇게 살아있어서 짹짹거리는데, 아 젠장할, 저걸....아아...먹고 싶지 않아... 그러나 그 메추리는 훌륭한 메인 요리로 변하고, 사람들은 아주 맛있게 먹는다.
저 소스도 아주 맛있게 숟가락으로 떠먹던데, 심지어 메추리 대가리까지 들고 먹던데...아....힘들어....그런데 사실 메추리보다 더 힘든 게 있었으니, 그건 식재료 거북이었다. 큰 거북이. 이건 정말이지, 사진으로 봐도 충격 받을 사람이 많을 테니 친히 접기를 하겠다. 심장 약한 분들은 보지 않으시기를 권하는 바이다.
저 큰 거북이가....식재료라고..부엌에 있어. 하아-----------------------------------------
저 큰 거북이는 아주 맛있는 '거북이 수프'가 된다.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만찬이 끝나고 나서 첫사랑과 재회한 장군이 '앞으로 내 영혼은 매일 너랑 저녁식사를 할거다' 라는 낭만적인 말을 내뱉는데, 책에서 이 부분을 내가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아, 가슴을 움직이지 못한다. 이미 내 가슴을 저 거북이가 쥐고 흔들었어....아 ... 싫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만약 재료를 말하지 않은 상태라면 나 역시도 그 자리에서 그릇째 들고 거북으 수프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한그릇 더를 외쳤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저 재료를 보고난 후라면 나는...나는.....그 수프에 입도 대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의외로 여린 식성을 가진 것이다. 아..머리가 아프다.. ㅠㅠ
음식 영화라서 무척 좋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이 바베트의 만찬은 내 멘탈에 스크래치를 남겼다...
그러다보니 내 멘탈에 스크래치를 남긴 음식 책이 퍼뜩 생각난다. 이건 멘탈에 스크래치 라기 보다는 기분에 스크래치다. 아주 큰 스크래치. 이 책속에 나오는 음식들은 죄다 먹어보고 싶고, 음식 묘사를 너무나 잘해놔서 입맛이 절로 다셔지지만, 백자평에 썼듯이 각 음식 섹션마다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들이 진짜 병맛이다. 물론 등장하는 캐릭터를 애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읽는 독자의 몫이다. 내게는 병맛일 수 있는 캐릭터가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걸 알든 어쨌든 나는 제기랄, 병맛 캐릭터라는 데서 한 치도 양보할 수가 없다.
특히나 스키야키 얘기가 나오는 <인정 스키야키 이야기>에 등장하는 '쓰루지'가 아주 병맛인데, 극중 쓰루지는 '큰도련님' 이므로 자신의 마음대로 결혼하기 보다는 부모님이나 집안 생각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혼기를 놓친 남자이다. 여러 여자를 사귀기도 했지만 여자의 집안을 따지는 부모님 때문에 헤어지고 지금의 나이인 서른아홉이 되었는데, 과거에 사귄 여자중 '유리에'는 임신을 하기도 했었다. 이 과거 사연을 읽다가 내가 빡친건데,
유리에는 백화점 스낵바에서 알게 된 점원이었다. 둥근 부채에 눈과 코를 띄엄띄엄 붙여놓은 것 같은 큰 얼굴에 허리가 굵은 여자였는데, 착 달라붙어 곱살맞게 굴지 않는 것이 쓰루지의 마음에 들었다. 띄엄듸엄 붙어 있는 자그마한 눈코도 의외로 잘 정돈되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느낌이 좋았다.
얌전한 성격이라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었는데,
"역시, 안 되겠어. 어떡하지‥‥‥."
하고 쓰루지가 말했을 때도,
"흐음‥‥‥.."
하고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쩔 수 없네, 지울게."
하고 조용히 말했다.
결혼을 해서 배 속의 아이를 낳을까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기세가 등등하여 도저히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부모님을 버리고 집을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실체가 사라졌는데도 종이 도매상 '오카미도'의 후계자인 큰도련님이라는 의식에서 못 벗어나는 자신도 싫었지만, 부모님과 수많은 위패와 불단, 주황색 노렌과 오래된 문서의 압박을 좀처럼 무시할 수 없었다.
"미안해‥‥‥화내지 마."
하고 쓰루지는 유리에에게 말했다. (p.84-85)
하아- 난 저 마지막 말이 너무 싫었다. 미안해, 화내지마. 라니. 어휴. 가슴속에 불길이 치솟는 느낌이다. 만약 저자리의 나였다면 '화나게 해놓고 화내지 말라니 이 개새끼야!' 라고 응수했을 것 같다. 너무 무능력하고 유약해서 한숨이 나온다. 화나게 해놓고 화내지말라니...아..너무 싫어. 만약 내가 쓰루지랑 사귀는 여자였다면 '애를 지워야 한다'에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화내지마' 에서 화가 났을것 같다. 바로 그순간 저 남자에 대한 오만정이 다 떨어져서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을 듯.
모든게 선택의 문제이고, 그 선택은 모두 '자신'을 위한것이다. 큰도련님이라는 의식, 부모님을 버리지 못하겠는 마음, 오래된 문서의 압박..이 모든것들로부터 도망치는 것보다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포기하는' 쪽이 그에게는 '덜'고통스러웠던 거다. 이게 바로 냉정한 사실이다. 물론 그여자를 사랑했을 것이고, 진정 미안했을 것이지만, 아이를 포기하고 여자를 포기하는 쪽이 바로 그가 '선택'한 것이다. 두 가지의 고통 앞에 덜 고통스러운 걸 택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다. 쓰루지가 아이를 지우길 원했던 것 역시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의 결정인데도 불구하고 '지울게'란 말을 여자가 먼저 하게 만드는 저 우유부단함, '어떡하지' 라고 말하면서 바톤을 넘기는 저 태도. 소름끼치게 싫다. 어떡하냐니..니가 원하는 건 지우는 거잖아. 그렇게 해놓고서 '화내지마' 라고 말하는 모습이라니. 아 뭐지...저게 저 남자의 성격이겠지만, 저 남자의 성향이겠지만, 아 너무 화가난다. 나는 저 모습에 화가나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화가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아니 저렇게밖에 할 수 없는데 어쩌겠냐 나는 이해가 된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이해는 이해고 나는 분노가 샘솟는다. 빡쳐..
암튼 분위기에 휩쓸려 의도치않게 옷을 벗게 될 수도 있겠지만, 콘돔 사용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저 이야기의 교훈이다. 콘돔 사용을 안하니까 사귀던 남자의 가장 밑바닥 찌질한 모습까지 맞닥뜨려야 하잖아. 아 싫어.. 내가 유리에였다면 아마도 '아, 내가 이런 남자를 사랑하고 같이 잤다니..' 하고 벙쪘을 것 같다. 내 자신이 싫어졌을 것 같아. 콘돔은 필수!!
으으-
엊그제는 동료 직원이 아침에 샌드위치를 줬다. 엄마가 싸주셨다고 한다. 단순 심플한 샌드위치였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완전 맛있다, 하면서 계속 계속 감탄했다. 으흐흐흐흐.
어제와 오늘은 알라딘 ㄲㅍㅋ 님이 주신 차를 우려 마셨다. 향이 좋았다. 헤헷.
만약 오늘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라고 한다면, 나는 조카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사들고 조카에게 가야지.
거북이와 저 남자의 찌질함에 맞서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내야겠다. 이따 점심때 태민이 나오는 이 영상이나 한 번 봐야겠다.
아참. 그런데 엊그제 당일배송 시킨 책이 왜 아직까지도 안오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