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게다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엔 엄청 성실하게 교회를 다녔지만, 그것은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해야하는줄 알았기 때문에 다녔던 것이지, 내가 뭔가를 알거나 느끼거나 좋아해서 다닌 것은 아니었다. 이런 내가 매일 예배후 성경공부 시간에 참석했다해도 성경에 대해 알 리가 없다. 정확히 열다섯살 때부터였나, 교회 다니는 것을 멈추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고, 나중엔 치를 떨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신에 대해 어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다. 다만, 가끔 태초에 신이 어떤 생각으로 이 세상을 만든걸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친가쪽 친척들은 절실한 크리스찬들이라 자녀들의 결혼에 대해서도 '크리스찬이 아니면 절대 안돼' 라는 마인드를 가지신 분들인데, 일전에 나의 엄마가 디스크 수술을 한다고 입원해 계셨을 때 큰아버지가 문병을 오셔서는 '하나님이 다 뜻이 있어서 아프게 한거다' 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남동생과 내가 거품 물고 쓰러질 뻔했던 기억이 있다. 여러가지 일들이 내게 있었고, 그것들중 어떤건 꽤 큰 일이라, 나는 지금 현재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승우의 소설을 읽을 때면 기독교에 대한 나의 생각과는 별개로 성경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한다. 각설하고,
토요일에 경향신문을 읽었다. 읽으면서, 아, 너무 충격적이라 사진을 찍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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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읽었는데, 모세가 삼천명가량의 이웃을 죽였다는 출애굽기의 저 말이 사실일까, 한참을 멍했다. 우상을 숭배했다고 삼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다고? 진짜? 십계명의 첫번째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였던가, 그런데 그러했기 때문에, 죽인거야, 정말? 이건...뭔가 부조리하지 않아? 너무 충격적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 실수를 계기로 다음번에 더 나은 행동을 할 수가 있고 또 더 나은 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도 그런걸까. 그리고 모세도 그런걸까? 이 부분에서 나는 얼마전에 읽었던 단편집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가 생각났다. 길지만 옮겨보도록 하겠다. '미셸 투르니에'의 <당나귀와 황소> 의 한 부분이다.
"그럼 먼저 아브라함의 희생 제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했죠. 그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에 있는 산을 올라갔어요. 이삭은 어리둥절했겠죠. 나무도 가져왔고 불과 칼도 가져왔는데 도대체 번제물로 드릴 양이 어디에 있지? 나무, 불, 칼 ‥‥‥. 아니, 이럴 수가. 이것들은 저주받은 인간 운명의 성흔(聖痕)이잖아!"
"그보다 많은 것을 볼 겁니다." 가브리엘은 못과 망치와 가시면류관을 생각하면서 침울하게 말했지요.
"아브라함이 제단을 세우고 나무를 차례차례 쌓은 다음, 이삭을 나무 제단 위에 묶어 놓고 칼을 들어 그 하얀 목덜미에 갖다 댔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팔을 붙잡았지요.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가브리엘이 말허리를 잘랐습니다.
"그렇죠, 물론 착한 천사니까요. 그렇지만 이삭은 친아버지가 자기 목에 칼을 겨눌 때 받은 충격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했어요. 시퍼렇게 번쩍이던 칼날 때문에 이삭은 눈을 다쳐 평생 시력이 좋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눈이 완전히 멀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작은 앋르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당신은 어째서 자식 살해를 중단시킨 걸로 만족할 수 없었던 거죠? 피를 꼭 흘려야만 했습니까? 가브리엘, 당신이 아브라함에게 어린 숫양을 번제물로 쓰도록 주지 않았던가요? 하느님은 그날 아침 죽음을 목격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으셨나요?"
"아브라함의 희생 제물이 실패한 혁명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다음번에는 더 잘할겁니다." 가브리엘이 말했다.
"사실, 성스러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야훼의 비밀스러운 열정의 출처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카인과 아벨을 생각해 보죠. 두 형제가 모두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며 각기 자기가 수고해서 얻은 소산물을 바쳤어요. 카인은 땅을 경작하는 농부였으므로 과일과 곡식을 올린 반면에 목동이었던 아벨은 어린 양과 그 기름을 봉헌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죠? 야훼는 카인의 제물은 외면하시고 아벨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어떤 이유에서 그러셨던 거죠? 내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답은 단 한 가지뿐이에요. 야훼는 식물을 싫어하시고 고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숭배하는 하느님은 육식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그널 분으로 경배합니다. 화려하고 장엄한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해 보세요. 눈이 부실 정도로 거룩한 하느님의 지성소가 종종 도살장처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신선한 피로 흠뻑 젖는다는 것을 아셨는지요? 거칠게 깎아 투박하기만 한 커다란 돌덩어리 제단은 모서리마다 뿔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고 희생 제물의 피가 빠질 수 있도록 여기저기에 가로질러 홈을 파 놓았죠. 축제를 베풀어야 할 때면 제사장들은 도살자로 변신하여 온갖 짐승의 무리들을 대량으로 살육합니다. 황소와 숫양과 숫염소, 심지어 비둘기 떼까지 모두 발작적으로 밀려드는 죽음의 고통에 전율하지요. 대리석 탁자 위에서 동물들의 각이 떠지고 내장은 화로로 던져지며 도시 전체가 연기로 자욱합니다. 북풍이라도 불어오는 날이면 내가 사는 그 산속까지 악취가 스며들어 가축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답니다." (pp.270-272)
이 소설속에서는 당나귀가 화자인데, 그 당나귀는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날 당시 마굿간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아기의 탄생을 돕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고 요셉은 태어난 그의 아이가 친자임을 인정하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그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인 사일러스가 찾아오고, 사일러스는 선물을 바치며 위처럼 얘기하는거다.
나는 성경을 잘 모르고, 그러니 인용한 문장에 어떤 오류가 숨어있다해도 사실 찾아낼 수가 없다. 다만, 사일러스의 항의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특히나 희생 제물에 대해 다음에 더 잘하겠다는 가브리엘의 말은, 이건 소설이지만, 소설임을 알지만, 야속하기 짝이없다. 삶과 죽음을 '실패' 로 다룰 수 있다니, 그것이 '시행착오'가 될 수 있다니. 누구나 실수하지만, 그 모든 실수들이 실수란 이유로 용납될 수 있는걸까. 책을 읽으면서 미셸 투르니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일러스는 동물을 사랑했다. 그래서 가브리엘에게 따졌다.
"나의 주님이시여, 어떤 사람들은 내가 사람들을 싫어해서 산으로 들어갔다고 말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내가 은둔하게 된 것은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짐승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동물을 사랑한다면 인간의 사악함이나 탐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요, 나는 평범한 농부라고는 할 수 없어요. 나는 가축들을 팔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습니다. 짐승들은 나에게 젖을 주고 나는 그것으로 크림과 버터와 치즈를 만듭니다. 아무것도 팔지 않아요. 이 선물을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살마들에게 나눠 줍니다. 오늘 밤 나를 깨워 별을 보여 준 천사의 말에 순종한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반항심 때문이에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꼴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종교의식에 대한 나의 반항심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은 거의 태고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아주 옛날 부터 있었기 때문에 변화를 불러오려면 엄청난 개혁이 필요할 겁니다." (pp.269-270)
나는 토끼털 장갑을 선물받고 따뜻하다고 생각했고, 고기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가끔은 불편하다. 내가 특히 더 동물을 사랑하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가끔 불편함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나는 인간을 더 사랑한다. 인간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세가 삼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인것이 몹시 부당하게 느껴진다. 시행착오라고 말한다면 더 화가날 만큼. 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있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그런데, 좀 더 해야 하는건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아 모르겠다. 나도 내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이 얘기 했다 저 얘기 했다 뒤죽박죽하는데, 그나마 정확한 표현을 찾자면 사일러스가 말했듯이 '종교의식에 대한 반항심' 정도인 듯하다. 내겐, 그게 있는것 같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모르는 상태로 그저 화만나는, 그런 상태의 반항심.
금요일에는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는데, 한 친구가 자신의 새로운 직업에 대해 설명했다. 시작한 지 얼마 안됐지만 프로의 냄새가 폴폴 나서 굉장히 근사하고 멋지게 느껴졌는데, 더 멋있었던 건, 그 친구가 '앞으로의 일' 에 대해서도 구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의 현재도 그 친구의 과거엔 미래였을텐데, 이것도 다 계획하고 있었고. 사람이 다 자기 살 길 찾아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나만 멈춰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이 저마다 잘하는 게 있다면, 그 친구가 잘하는 영역은 감히 내가 넘보지 못할 부분이란 생각도 들었다. 사소한 일화들을 자신의 시선으로 얘기하는 친구를 보며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는데, 같은 사람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그 친구같은 분석을 내놓을 수 없는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저 일을 할 만하니까 하고, 잘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했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 그 친구의 새로운 일에 대한 얘기를 홀린듯이 들었다.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도 뭔가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대로 있으면 안되는 게 아닐까. 저마다 자기 살 길을 찾아가는데, 나만 너무 정지해있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에 몰두하다가,
택시비 21,000 원에 쓰러질 뻔했다. 아, 난 미래 설계 따위 되는 애가 아니다. 당장 닥쳐온 택시비에 멘탈에 충격이 다가왔어. 21,000원이라니. 이 금액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아, 오늘 중고샵에 책 등록하고나니 27,000원이 나오던데, 매입내역 뽑아 상자에 넣으면서, 이걸로 택시비 뽑았다, 하는 생각을 하고야 만것이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마지막으로, 오늘 나를 제일 처음, 제일 크게 웃게 한 일.
당신에게 시 한 편을 적어보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다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