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문을 열고 내리다가 나는 그 여자와 부딪쳤다. 여자가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빵, 달걀, 우유가 인도 위로 흩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p.7)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야 나도 숱하게 만났지만 왜 남자랑 부딪쳐서 '만나게' 된 적은 한 번도 없을까. 뭐 이런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려고 한 건 아니고, 이 책, <여자의 빛>의 저 시작 부분을 읽으면서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영화 <폴링 인 러브>가 떠올랐다.
영화속에서 남자는 아내의 선물을 사기 위해, 여자는 남편의 선물을 사기 위해 서점엘 간다. 서점에서 각자의 배우자를 위한 책을 샀는데 나가는 길이었던가, 둘이 부딪치고 서로의 책봉투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들은 그걸 다시 주워들고 사과의 말들을 건넨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돌아가서 배우자에게 선물이라며 내미는데-크리스마스 였던것이다!(아마도)-, 배우자가 그 책을 꺼내들고나서야 책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이들은 '아는 사이'가 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야 만다.
책을 읽으면서 로맹 가리는 자기 삶의 얼마만큼을 '생각'에 쏟아 부은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얼마만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사람들이 미처 인정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 들여다보지 못했던 부분,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그토록 날카롭게 잡아낼 수 있는 걸까.
자네에게 전화를 한 건 혼자 생각을 할 수 없어서였네. 그래서 이렇게 자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세. 말들이 곤경에 빠진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와 있으니까. 말들은 불어놓은 풍선 같네. 그래서 사람을 공중으로 두둥실 띄운다네. 내가 자네에게 전화를 한 건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였네. (p.55)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거나 설명하면서 내가 배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설명을 하던 도중 나조차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던 것이 명확하게 손에 잡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위의 대화에서 나는 나의 그런 경험들이 떠올랐다. 말을 하면서 스스로 이해하게 됐던 바로 그런 때가. 책 속의 저 남자는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잘 되지 않는 것이 상대에게 '말'을 함으로써 더 잘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건, 로맹 가리가 한 일이다. 나는 로맹 가리를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그는, 슬픔과 분노를 아픔과 절망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어떤 것들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것 같다고 해야하나. 나는 로맹 가리의 소설을 기쁘게 구입해 읽고 싶지만, 그런 그를 어떻게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다. 이 소설, <여자의 빛>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할 말들을 찾을 수가 없다. 사람은 이래서 어휘력 공부를 해야 하는걸까.
그가 대단한건, 남들도 다 하는 고민을 이미 하고 있었고 그걸 글로 표현해 낼수 있다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마련이라오. 지나치게 노력을 기울인 나머지 마비 상태에 이르는 경우도 있소. 하지만 저 위에서 그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우리의 승리나 실패가 아니라 아름다운 노력이라오. 로열젤리를 먹어본 적 있소? 그걸 먹으면 힘이 좀 나는 것 같던데." (p.107)
불과 며칠전에 '애정이 식는 순간 상대의 장점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고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로맹 가리는 '사랑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노력 하기 마련' 이라지 않는가. 술 한 잔 생각나는 대화가 아닌가. 다음의 대화는 어떻고!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나를 사랑해달라는 게 아니야. 동료애를 가져달라는거지. 불행이 넘실거리는 상황에서 내 곁에 있어달라고 청하는 거라고. 이보다 고매한 인간적 배려가 있을까. 여자 하나, 남자 하나, 그리고 우연을 배제하는 주사위 던지기. 거짓 성당들 한가운데 서려면 굳은 신앙이 필요하니까."
"미셸, 인공호흡으로 급할 때 목숨은 구할 수 있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숨을 쉴 순 없어."
"그다음에 살기 시작하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기회에 기회를 줘보자고. 모두들 고독하다고 외치는 시대야. 아무도 사랑을 외치지 않는다고. 고독을 외친다는 건 곧 사랑을 외치는 건데 말이야." (p.130)
문장들에 분홍색 색연필을 쥐고 밑줄을 그으면서, 내 2014년의 첫 책이 로맹 가리인 것이 무척 다행으로 여겨졌다. 굉장히 잘한 선택이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졌다. 나는 2014년의 척 책을 로맹 가리로 만들고 싶어서, 사실은 2013년의 마지막 날 이 책을 집어 들었건만, 어제 잠자리에서 '일부러' 졸았던 것이다. (정말?) 졸면서 고작 두 장 읽어냈을 뿐인데, 내 마음속에서 2014년의 첫 책으로 만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잠을 청해 책 읽기를 중단했던 것이다. 그렇게 다음날로 미뤘던 것이다. (진짜?)
게다가 명문은 다음 사진에서 나온다. 샤브샤브에 소주를 마시고 돌아와 펼친 책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만난 것이다.
아, 지금 음주중인 모두에게 이 문장을, 건배를, 그리고 축복을, 당신의 잔이 언제나 넘치기를!! (ㅇㄹㄱㅅ님, 보고 있어요?)
내일은 지난달이었나 지지난달에 회사를 그만둔 y 대리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지난주에 약속을 잡으면서 그는 내게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두면 음식점을 찾아두겠다고 했던 터다. 그러나 딱히 이음식이다, 하고 생각나는 게 없어, 이것 저것 고민하다 나는 오늘, 그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내가 보낸 메세지는 종로의 한 보쌈집에 대한 어떤 블로거의 글이었는데, 두어번 가 본 적이 있던 나로서는 메뉴도 괜찮고 식당도 깔끔했던 터라 여기가 좋겠다, 싶었던 것. 여기 어때요? 라는 나의 메세지에 잠시 뒤, 그로부터 답장이 왔다. 괜찮네요, 하면서 이내, 저는 여기를 가자고 하려고 했어요, 라며 링크 하나를 보내주는거다. 그 링크를 열어보니 오, 닭!볶!음!탕! 완전 맛있게 생긴거다. 오, 좋았어! 여기 완전 술도둑이겠네요, 라고 나는 급 반가운 마음에 답을 보내고 콜! 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다가 너무 웃겨서 혼자 소리내 웃었다. 서로 이 음식점이 어떻겠냐고 생각하고 그걸 메세지로 보내 의견을 묻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ㅎㅎㅎㅎㅎ 나도 너랑 뭘 먹을지 생각해봤는데 너도 나랑 뭘 먹을지 생각해봤구나, 뭐 이런 데서 오는 따뜻함과 더불어 '이 메뉴라면 너와 내가 동시에 먹기 좋지' 하는 배려까지. 게다가 시뻘건 닭볶음탕을 내가 거부할 수 없을거라는 어떤 그의 확신..같은거?
나는 이제 회사를 그만둔 그를 'y 씨'라고 부르면 된다. 원래 그렇게 부르다가 그가 대리로 진급하고 난 뒤 y 대리 라고 불렀더니 그는 약간 어색해했던 터라, 외려 다시 편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는 나를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이제 우리는 한 직장에 근무하는 동료가 아닌데 계속 나는 그에게 과장님으로 불려야하나? 뭐, 뭐라 부르든 상관은 없지만. "누나라고 불러요" 라고 드립 한 번 쳐볼까........................그러다 쌩까는 사이가 되겠지...................ㅋㅋㅋㅋ
여튼 내일은 닭볶음탕, 모레는 노가리집(꺄!), 글피는 곤드레밥....바쁘다, 신년에도. 입술에 빵구난 게 이래가지고 낫지를 않겠구나. 흙 ㅜㅜ
여튼,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