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 도착했을 때 결혼식은 끝나고 성당 뒷마당에서 기념 촬영이 한창이었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 양옆에 놓인 강렬한 원색의 팬지들 너머로 녹색 잎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수많은 하객들에게 포위되다시피 한 신랑, 신부의 뒤쪽으로 절정에 오른 색색의 철쭉들이 한껏 축제 분위기를 냈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려다가 멈추어 섰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성당 앞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 갔지. 오늘 아침에 분명히 넣었는데. 거칠게 손을 놀렸지만 선글라스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몇 번 더 헤집다가 백을 뒤집으려는데 뒷마당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신랑이 신부를 번쩍 안아 들고 성당 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달려가는 신랑의 동선 뒤로 한층 강해진 햇살이 찬란히 빛을 내뿜었다. 한동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봄의 명동 거리는 인파로 북적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전에 보았던 결혼식의 환한 아우라가 계속 뇌리에서 맴돌았다. 결혼식. 한 타인과 영원히 인생을 함께할 것을 서약하는 자리. 그 끝이야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영원을 서약하는 예식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얼마나 성스러운 것인가. 흐물이 비판을 일삼던 종교에 귀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흐물에게 전화해서 '흐물!' 네가 왜 하느님 품에 안겼는지 알 것 같아!' 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튈 것처럼 생생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나는 멈추어 섰다. 흐물과 통화할 때, 내 목소리는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었던가. 흐물과 있을 때, 나는 찬란히 빛났다. 만방에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그렇다면 흐물과 나, 둘 중 누가 누구를 이끌었던 것일까. 흐물이 나를 이끌어주었을까, 내가 흐물을 이끌어주었을까. 일방적으로 흐물을 이끌어주었다고 생각했던 그동안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pp.283-284)

 

 

 

 

 

 

 

 

 

 

 

 

 

 

 

 

 

결혼식은 축하해주러 가야 하는 자리이지만, 행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자리이지만, 그 결혼식에 참석해서 내 기분이 항상 좋으리란 법은 없다. 진심으로 축하해주러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입맛이 쓴 경우도 더러 생긴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 나도 한 결혼식의 하객으로 참석했다. 사실 그때 나는 결혼하는 당사자를 축하하러 가는 것이 본 목적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 반드시 하객으로 올 M 을 보러 가는 거였다. 우리는 헤어졌고 오랫동안 못보았지만, 그 결혼식엔 반드시 올 것이고, 그 결혼식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터다. 나는 그를 그렇게, 보고싶었다. 그 자리에서 하객대 하객으로 만난다면 우리는 그저 웃으며 안녕, 하고 인사를 하는게 전부겠지만, 이제 나는 그와 부러 만나는 사이가 아니니 그렇게 보는 것 말고는 그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버렸지만, 그 당시엔 내가 좋아했던 원피스를 입고, 향수를 뿌리고,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온 J의 차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결혼식장에 도착해서 아는 몇몇 얼굴들과 인사를 하고 틈틈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J 가 분명 M 이 여기에 온다고 했는데, 오면서 통화도 했다고 했는데..

 

예식을 채 보지도 않고, 당연히 식사도 하지 않은채, 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식장을 나왔다.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걷게될지 모르지만, 혹여라도 늦게 M 이 도착한다면 이렇게 걷다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걷다가 참지 못하고 M 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주 오랜만의 통화였다. 여보세요, 그가 전화를 받았고 나는 그에게 왜 예식장에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온 김에 얼굴좀 보려고 했는데,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듯 덧붙이며. 그는 거의 다 도착했다고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느라 좀 늦었노라고.

 

아.

 

식장에서 그를 기다렸다고한들, 그렇게 그와 마주쳤다고한들,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긴 껄끄러웠겠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굳이 여기를 올 필요는 없었는데. 결혼하는 당사자와 내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내가 올 줄도 몰랐을텐데. 욕심이 화를 불렀네. 나는 계속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예식장은 우리 집에서 차로 삼십분 거리에 있었고, 나는 그 길을 계속 걸어서 결국 집까지 갔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근처의 시장에 들러 피자를 한 판 포장해갔다. 누군가의 결혼식은, 아주 쓸쓸한 게 될 수도 있는거였다.

 

 

이 책속의 여자는 남자를 '보험같은 이성친구'라고 생각했다. 먼 곳에 살면서도 자기가 부르면 언제나 다가와주는 그를 언제까지고 옆에 있을 상대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을 짐작하게 되었을때에도, 어디 감히 나를 넘봐, 라는 생각으로 그를 무시했다. 그를 만나다가도 자신이 공을 들이는 다른 남자의 전화를 받고는 그를 버려두고 가버리기도 했다. 그 후에 연락이 잘 되지 않던 남자가, 글쎄, 결혼을 한다고 한 거다.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여자는 그 결혼식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가 결국 가기로 마음을 바꾼다. 삼십만원을 축의금으로 내려다가 십만원으로 바꾼다. 결혼식에 갔지만 아는척하지 않고 돌아간다. 가야했을까 가지말아야했을까. 왜 누군가의 결혼식엔 하객으로 참석하는 게 이다지도 쓸쓸하고 고독하고 입맛이 쓰단 말인가. 이 장면에서 나는 가슴이 허해지면서 영화 <사이드웨이>가 생각났다.

 

 

 

 

 

 

 

 

 

 

 

 

 

 

 

교사인 마일즈는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을 앞두고 그 친구와 둘이 총각여행을 떠난다. 이혼을 했고, 교사로서 돈벌이도 좋지가 않고,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내지만 어느 출판사도 그의 책을 출판해주려하지 않고, 호감이 가는 여자와는 잘 되질 않는다. 그런 그가 사랑하는 게 바로 와인. 와인을 맛보고, 와인을 수집하는 것이 그의 인생의 커다란 기쁨이다. 그 순간들이 그에겐 무척이나 소중하다.

 

 

"수집한 것중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 뭐예요?"
"61년산 슈발 블랑이요."
"와우. 그걸 어떻게 마시지 않고 두고만 있을 수 있죠?"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사람과 마시고 싶어서요."
"당신이 그걸 마시는 순간이 특별한 순간인거예요." 

 

 

여러가지 일들을 겪고 여행에서 돌아와, 마일즈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이제 결혼을 하는 것만으로도 쓸쓸한데, 그렇게 혼자 하객으로 왔던 그는, 그 결혼식장에서 자신의 전(前)부인을 만난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새로운 남편을 소개시켜주고 임신 소식을 알린다. 마일즈는 그녀에게 축하를 건네고, 친구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 많은 하객들 중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도 못한채로 결혼식장을 빠져나온다.

 

이 때의 마일즈가 떠올랐다. 보험같은 이성친구를 떠나보내는 여자를 책으로 만나면서, 그녀가 식장에서 뒤돌아 혼자 걸어나오는 장면에서, 마일즈가 생각났다. 그러나 마일즈에겐,

 

61년산 슈발블랑이 있었다. 마일즈는 특별한 순간에 마시고 싶었던 그 와인, 61년산 슈발블랑을 챙겨들고 소박한 식당으로 간다. 식당에 간 그는 햄버거 하나를 시켜서 그 햄버거를 앞에 두고 61년산 슈발블랑을 꺼내 식당의 플라스틱 컵에 따른다. 그는, 혼자서, 소박한 식당에 앉아, 그토록 소중하게 아껴온 61년산 슈발블랑을 마신다.

 

당신이 그걸 마시는 순간이 특별한 순간인거예요.

 

 

그는 자칫 비참하고 외롭고 절망에 빠져들 수도 있었을 그 순간을, 특별한 순간으로 바꿔버린다. 수많은 영화의 수많은 장면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나의 사이드웨이 DVD 는 어디에 있지? 누구에게 있는거지? 기억이 나질 않네 ㅠㅠ

 

 

 

퇴근길에는 우체통에 두 개의 편지를 넣었다. 하나는 부산으로 갈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서구로 갈 것이다. 하나는 당신이 그립다 썼고 다른 하나에는 시를 한 편 적었다.

 

 

여름의 끝


오래된 시간 앞에서 새로 돋아난 시간이 움츠린다

머리에 조그만 뿔이 두 개 돋아나고

자꾸 만지작거린다

결국 도깨비가 되었구나, 내 사랑



신발이 없어지고 발바닥이 조금 단단해졌다

일렁이는 거울을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수천 조각으로 너울거리는 거울 속에

엉덩이를 비추어 보는 일은

이젠 그만하고 싶다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배 뒤집혀 죽어 있는 풀벌레들,

촘촘히 늘어선 참한 죽음이

여름의 끝이었다고

징- 징- 징-

파닥이는 종소리

 

 

 

 

 

 

 

 

 

 

 

 

 

 

 

 

 

 

 

쓸쓸하게 돌아서야했던 결혼식장과, 보험같은 이성친구를 잃어버린 여자와, 61년산 슈발블랑을 혼자서 따라 마셨던 마일즈가 생각났던 날, 이 시를 읽으니, 쥐약같았다. 여름, 내가 여름에 잃어버린 사랑이 떠올랐다. 여름에 시작되고 여름에 끝냈던 사랑이. 겨울에 시작됐고 여름에 끝났던 사랑이. 여름에 잃었던 그 두 사랑이, 내게는 가장 찬란했다. 그들 앞에서 나는 가장 가슴 떨렸었다. 여름에 헤어지면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고질적인 병인가보다. 사랑을 잃고난 후 조금 더 강해질 수 있었지만, 그러기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야했다. 마찬가지로 신발이 없어지고 발바닥이 조금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맨발에 수없이 많은 고통이 가해졌을 것이다. 날카로운 돌을, 깨진 유리를, 고인 물엉덩이를 그 발로 디뎌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단단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여름에 사랑을 잃어본 적이 있다면, 그전보다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름에 사랑을 잃는 걸 권하고 싶진 않다. 그런식으로 여름의 끝을 맞이해서는 안된다.

 

 

 

 

나도 와인을 마셨다.

마일즈에게 건배를.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10-30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31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31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10-31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 정말 멋진 글입니다. sideways..ㅎㅎ

다락방 2013-10-31 08:45   좋아요 0 | URL
아이참 가연님도..부끄럽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좋아한다)

아무개 2013-10-3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생각해보니 저는 주로 봄여름쯤에 연애를 시작, 슬슬 추워질때즘 헤어졌던거 같아요.

좀 더 강해졌을진 모르겠지만 좀 더 추웠던거 같습니다.
그 이별이 있던 겨울들은요.

다락방 2013-10-31 09:36   좋아요 0 | URL
물론 겨울에 헤어진적도 있지만, 저는 여름에 헤어진 두 남자가 유독 기억에 남네요. 그 헤어짐이 엄청 힘들었어요. 그 두 남자를 제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기도 했고요. 그들은 제게 환상적인 존재였어요. 크-
그 여름이 무척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어휴, 그 눈물들.. ㅠㅠ

아무개 2013-10-31 09:45   좋아요 0 | URL
자면서 울고 밥 먹다가 울고 전절에 서서도 울고 길을 걷다가 울고.....
참 많이도 울었었네요.

나중에 만나면 실연이야기나 잔뜩 해볼까요?
아마 그날은 누구하나쯤 인사불성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다락방 2013-10-31 09:48   좋아요 0 | URL
실연이야기 ㅎㅎㅎㅎㅎ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ㅋㅋㅋㅋㅋ 뭔가 소주가 술술술 하면서 넘어갈 것 같아요. 하하하

아무개 2013-10-31 09:52   좋아요 0 | URL
담번 모임의 주제는 내인생 최악의 연애와 최고의 연애입니다.

흠...어디 방이라도 잡고 술마셔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다락방 2013-10-31 09:56   좋아요 0 | URL
전 이거 지금 말할 수 있어요.

내인생 최악의 연애는 '사랑하지 않았던 상대와 했던 연애' 이며
내인생 최고의 연애는 '해보지 못했던 게 많았던 연애' 입니다. ㅎㅎㅎㅎㅎ

자작나무 2013-10-3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 님과 무개 님의 화려한 인생과 풍성한 기억에 슈발 블랑을.
난 살아오면서 왜 기억나는게 별로 없을까요? 연애조차도.

다락방 2013-11-03 22:29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될 일들과 만나게 될 사람들이 기억되지 않을까요?

2013-10-31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3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3-10-31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우리 사이드웨이를 플레이 시켜놓고 밤새 와인을 마셔봅시다.

다락방 2013-11-03 22:29   좋아요 0 | URL
캬- 좋죠. 아름다운 영화에요. 난 이 영화가 몹시 좋아요!

에르고숨 2013-11-0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쯤 우체통에 넣은 편지 이후의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으려나요... 다락방 님이 안 계신 마지막키스서재가 참 쓸쓸합니다.

다락방 2013-11-03 22:30   좋아요 0 | URL
어머. 에르고숨님, 저 기다리신 겁니까? 움화화화핫.
일요일 밤이라 여기를 안 올 수가 없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주말 어떻게 보냈어요?

에르고숨 2013-11-04 00:58   좋아요 0 | URL
예. 슬픈 글을 남기고 ‘멋지게’ 잠깐 부재해주시니 그러지 않겠어요?
주말에 술 마시고 책 읽었어요, 물론 여기도 들락거리고요. 역시, 새 독후감을 갖고 와주셨네요. 또 한 주 무탈하고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다락방 2013-11-04 17:09   좋아요 0 | URL
저도 주말에 술 마시고 에르고숨님 서재에 들락거렸어요! 흔적은 안남겼지만 말예요. 헤헷.
^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