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여기 있을 것 같아 다시 문을 열었네."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네루다는 마리오의 팔꿈치를 움켜쥐고 자전거를 대놓은 외등 쪽으로 단호하게 끌고 갔다.
"생각을 하려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말인가? 시인이 되고 싶으면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혹시 존 웨인처럼 걷는 것과 껌 씹는 걸 동시에는 못하는거야?" (p.29)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는 언덕이라 불러도 좋을 산이 있다. 그러니 등산이라기 보다는 산책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코스인데, 나는 주말이면 곧잘 그 산에 오르곤 한다. 산의 정상에 올라 '정상에 올랐다'고 하면, 그 때마다 식구들은 그게 무슨 산이냐며 퉁을 놓지만, 어쨌든 산에 오르락 내리락 산책을 하고나면 두 다리도 뻐근하니 운동을 한 기분이다. 식구들과 함께 산책을 할 때도 있지만 나는 혼자 다녀오는 걸 즐긴다. 걷다가 좋은 풍경이 보이면 멈춰 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걷기도 한다. 아주 많이, 산의 냄새를 맡기도 한다.
사실은 그 시간동안 생각하는 걸 즐긴다. 숙취를 해소하고 싶을 때도 산책을 택하지만 생각을 하고 싶을 때도 산책을 택한다. 집에서부터 출발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두시간이 채 안되는 시간을 걸으면서, 그 시간동안은 충분히 머릿속으로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 생각을, 상상을 머릿속에서 마음껏 펼쳐나간다.
오늘은 그 시간의 대부분을 현빈과 소울메이트라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보냈다. 그가 너무 잘나서(!) 내가 힘겹겠지, 우리는 그저 소울메이트로만 지내야지 결코 바디메이트가 될 수는 없을것이다, 바디메이트가 된다면 다른 사람들의 질투와 시기로 내가 지쳐버릴 것이고 그에게 이별을 통보하겠지. 그러나 이별한다한들 그를 생각하는 시간들, 그와의 추억을 곱씹는 시간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소울메이트로 그를 영원히 내 곁에 두고 싶지만. 현빈과 소울메이트가 된다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가 나의 소울메이트란 사실을 비밀에 부칠 수도 있다. 끝내주는 의리로 우리의 소울을 안전하게 지켜나갈 수 있단 말이다.
그런 생각들을 거듭하다보니, 나는, 나란 사람은, 대상 보다는 그 대상을 생각하는 시간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하고 웃고 술을 마시고 손을 잡고 안는 그 모든 행위들을 사랑하지만, 그 상대를 만나기 전에 그를 생각하는 시간, 그를 만나고 난 후에 그를 생각하는 그 시간들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혼자' 있으면서 한 대상에 대해, 그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내게는 무척이나 소중하고 아름다우며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산드라 브라운의 소설에서 이런 부분에 아주 크게 공감을 한 것이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외출 준비하고 있는 줄은 알아요. 이 파일이 그만큼 중요하지 않았더라면 금요일 밤에 당신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월요일에는 심각한 인터뷰가 두 개나 있고, 그 중 하나는 주제가 낙태 문제거든요. 당신도 그게 얼마나 논쟁거리인지 잘 알죠? 그래서 꼭 필요한 관련 자료를 담은 파일을 ‥‥‥."
"사랑해, 브린."
브린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심지어는 미소조차 짓지 못했다. 그가 자기 몸에서 흘러내린 물이 괴인 한가운데서 서 있는 모양이 우습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담긴 진실함에 넋이 나가, 그저 멀거니 서서 듣기만 했다.
"외출 준비하고 있던 거 아냐. 집에서 혼자 조용히 당신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참이었지. 매일 매 순간마다 그래 왔던 것처럼." (pp.115-116)
혼자 조용히 당신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참, 이라는 그의 말이 백프로 이해가 됐다. 나 역시 가끔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상대를 생각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혼자 있는 조용한 집에서라면 가만히 앉아 자, 이제 그를 생각해야지, 한 적 있었고,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혼자 남겨졌을 때 좀 있다 나가자 잠시만 그를 혼자서 가만히 생각하고, 한 적도 있었다. 나는 강한 사람이라 어디에서든 잘 적응하며 잘 지내고 살아남을 사람이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외로움과 그리움에의 상태에서도 잘 견뎌낼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걸 좋아하는지,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할지, 어떻게 버텨내고 어떻게 견뎌내야 할 지를 점점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내 자신한테 아주 관심이 많고 내 자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강하기 때문에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줄 수 있다. 나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일들을 없도록,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보석을 주고 고기를 사 주는게 아니라, 나로 인해 염려하고 걱정하고 고민하게 하는 일들이 없도록 하는 일이다. 나는 그걸 아주 잘 해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고기를 사주는 건 좀.. 좋지만.
아, 그런데 내가 처음에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인용할 때는, 역시 생각은 걸으면서 하는게 짱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는데, 그렇게 해서 나 역시 '생각하는 순간'을 좋아한다는 말로 끝맺고 싶었던 건데, 왜 결국 내가 강하다는 잘난척으로 끝맺게 된걸까.
어쨌든 지금은 일요일 밤 아홉시가 다 되어가고 있고, 나는 이제 곧 맥주를 마실 것이다. 아니면 우울하니까. 이 우울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맥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세탁기가 돌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