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데는 자기 농장에 있는 마리아 크릴을 만나러 갔다. 크릴 할머니의 사악한 눈과 지혈하는 능력은 알리데가 태어났을 때부터 유명했기 때문에 알리데는 할머니의 능력에 대해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크릴 할머니에게 자기 처지를 봐 달라고 하려니 찾아가기가 어색했다. 알리데는 누구에게도 자기의 괴로움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기댈 데가 없었다.

마리아 크릴은 마당 긴 의자에 고양이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알리데가 올 줄 알았다고 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도 아시나요, 크릴 아주머니?"

"머리 색깔이 밝은 청년 때문이지. 젊고 잘생긴." (p.133)

















한스를 먼저 발견한 건 알리데였다. 첫눈에 반해 그가 자신을 봐주기를, 자신과 눈을 마주치기를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데 그가 눈을 들어 마주친 건 알리데의 눈이 아니라 알리데의 언니인 잉겔의 눈이었다. 그저 마주치기만 한거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 마주침에는 강렬함이 있었고 끌림이 있었다. 한스와 잉겔은 눈이 마주치고 사랑하게 됐다. 한스를 먼저 발견한 알리데의 의지와는 다르게, 알리데의 생각과는 다르게, 알리데의 기대와는 다르게.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누가 먼저 만났'는지가 대체 뭐가 중요할까.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알리데는 자기가 먼저 보았고 먼저 사랑을 시작했는데 이런 결과가 난 것이 몹시 원통하다. 한스가 언니인 잉겔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들을 볼 때마다 알리데는 저건 무슨 뜻일까, 저들은 무슨 의미를 담고 저 말을 하는걸까 몹시 궁금하다. 한스와 잉겔은 결혼하고 알리데는 그 집에 함께 살면서 그들이 서로의 시선을 좇고 들끓는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자꾸만자꾸만 보게 된다. 한스는 언니와 결혼했지만, 언니의 남편이지만 알리데는 한스를 포기할 수가 없다, 갖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노파를 찾아간다. 마법의 주문을 걸어줄 수 있는 노파를. 그녀는 노파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 못하게 할 수 있나요?" (p.136)



이미 언니의 남편인 한스를 두고 저런 바람을 가진 알리데가 너무 가여워서 너를 위해서라도 그걸 멈추라고 말하고 싶다. 한스를 바라보는 마음을 한스를 원하는 마음을 멈추라고. 그러나 이미 싹터버린 사랑은 멈추라는 말로 멈출 수 없는법. 한스에 대한 사랑과 욕망에 눈이 먼 알리데는 평생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들을 해버리고야 만다. 





나는 언제나 사랑에, 단 한사람에 대한 사랑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위험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그 사랑이 결국은 자신에게 비극을 가져올 것이 뻔한 선택을, 그들은 그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 하고야 마니까. 왜 사랑에 자신을 던질까. 왜 사랑에 그토록 매달릴까. 왜 그들은 그토록 그 사랑을 간절해할까. 나는 영화나 소설속에서 하나의 사랑에 자신을 송두리째 던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체 저런 삶은 어떤 삶일까' 를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나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실감한다. 나로 말하자면 사랑에 나 자신을 몽땅 던지지는 않으니까. 나로 말하자면 언제나 한 발을 빼고 있으니까. 나는 극으로 치닫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극으로 치닫는 사랑은 극으로 치닫는 결말을 불러오니까. 그들과 나의 차이는 어느것을 더 중요하게 두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나는 내 자존심을 가장 위에 두고 그들은 사랑을 가장 위에 둔다. 그들은 그 사랑을 '어떻게든' 이루고 싶고, 나는 그 과정에 내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다면 사랑을 접거나 포기하는 쪽을 택한다.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가슴 아파도 나는 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 이미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나를 전혀 봐주지도 않는데, 그런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려 보겠다고 묘약을 받으러 가는 그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다. '내 사랑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마음가짐은 대체 어디로부터 나온것일까. 왜 그것이 어떤 사람에겐 있고 어떤 사람에겐 없는걸까. 나에게는 모험심이 부족한걸지도 모르겠다. 위험한 길, 힘든 길인듯 하면 별로 가고 싶어지지 않는 그런 사람. 격렬한 연애를 할 수도 있고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상대가 나를 봐주지 않는 경우에 뭔가를 그다지 해내려고 할 것 같진 않다. 묵묵히 가슴아파하거나 포기하거나 할 뿐. 이 사랑을 이루게 해달라고 부적을 쓴다거나,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없애버린다거나 하는 일을 하지는 못할 것 같다. 나는 사랑에 빠졌어도 내 온 몸을 던지지는 않을것 같다. 여태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나는 이 세상에서 단단히 발 붙이고 살아가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한 몸 바쳐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사랑 받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는 내 온 신경을, 모든 에너지를, 더 나아가서는 내 목숨을 사랑에 걸지는 않을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상대 역시 그러했으면 좋겠다. 온 우주의 중심에 나를 두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상대도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자신을 이 땅에 설 수 있게 하는 여러가지 것들중 내가 하나였으면 좋겠다. '너여야만 해, 너 아니면 살 수 없어' 가 아니라 '너가 아니어도 살 수 있지만 가급적 너였으면 좋겠어' 라면 좋겠다. 나는 모험심만 부족한 게 아니라 세상에 내 책임이 하나라도 더 생기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걸수도 있겠다. 뭐, 어쨌든.




소설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이제는 나이가 많아버린 알리데의 집  앞에 어느날 '자라'라는 여성이 쓰러진 채로 발견된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을 쳤다는 그 젊은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 둘의 과거와 현재가 반복되는데, 그 둘은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살았으되 같은 삶을 살았다는 걸 보여준다. 알리데가 공산주의 국가적 체제로 인해 강한 힘에 농락당했다면, 자라는 돈의 유혹에 끌려가 여러 남자들로부터 농락당했다. 여자가 남자로부터 극도의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것, 그들이 반항하기에 상대가 너무 강했다는 것,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누군가 알아볼까 늘 두려워한다는 것이 그녀들의 공통점이었다. 가난했던 상황에서도 돈이 많아진 상황에서도, 여기에서도 그리고 거기에서도. 끊임없이 폭력은 행해지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 폭력으로 인해 평생 고통스러운 것으로 채워지고야 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여긴 거기와 다르다고? 아니, 다르지 않다.








그건그렇고,

어제는 돼지두루치기를 해보겠다며 두시간동안 부엌에 있었고, 별로 맛도 없었던 식사후 설거지를 하겠다며 또 한시간동안 부엌에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오늘부터는 씨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으리라. 그러면 딱 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만 쓰면 된다. 무슨 대단한 요리를 했다고 어제는 숟가락이란 숟가락 다 꺼내쓰고 그릇이란 그릇 다 꺼내써서 저녁 한 끼 먹는데 만신창이가 됐단 말인가. 그래, 이제부터는 씨리얼이 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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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3-10-16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이야기하기를.. 사랑은 '능력과 의지를 최대한 발휘하더라도 부족함이 드러날 수 있고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 고 하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이 문장에 동감하는 편입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무너지더라도 그런 게 사랑의 과정이라고 여기고 싶네요. 물론 많이 아프기는 하겠죠.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에 모든 것을 다 던지는 그런 사람을 이해할 것 같아요. 그러나 사람들마다 사랑에 대한 생각은 다 다른 것 같아요. 다락방님의 말씀이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가 아니라도 상관없지만 가급적 너였으면 좋겠다, 와 같은 선택을 모든 것을 다 사랑에 거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지 못할거 같네요. 뭐, 이렇게 끄적거리는 저도 아픈 사랑은 좀 피하고 싶지만...

다락방 2013-10-17 11:18   좋아요 0 | URL
저도 온 몸을 다 던져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해해요. 다만 저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가끔은 그렇게 온 몸을 다 던져 사랑에 바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고요. 한 상대에게 올인한다니,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그 가치는 최상이 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저는 제 모두를 다 던지기엔 제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것같아요. 모든걸 다던져 이사랑을 쟁취해보자 라는 생각보다는 무너지지 않게 나를 잘 붙들자 라는 쪽의 생각을 한달까요.

어제 현빈이 티븨 광고에서 눈밭을 달리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남동생에게 말했어요.

난 현빈이 참 좋지만 현빈이 자기랑 눈밭을 달리자고 하면 거절할거야. 라고.

그러자 남동생은 저에게 "그런 걱정은 하지마" 라고 하더군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dreamout 2013-10-1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을 살짝 바꿔서, 오늘 제 마음을 표현하자면..
회사를 위해 이 한몸 던지는 일은 없을겁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보이지않는 압박감이 계속 느껴지는 건, 아마 벌써 상당히 길들여졌기 때문 아닌지...

다락방 2013-10-17 11:22   좋아요 0 | URL
가끔 제가 너무나 많은 시간을(오전 8시-오후 6시) 회사에서 보내고 있단 생각을 들어요. 게다가 출퇴근시간은 또 한시간씩. 신해철의 [도시인] 노래 가사대로 '직장이란 전쟁터' 까지는 아니더라도 '집이란 잠자는 곳'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씁쓸해요. 저 역시 회사를 위해 한몸 던지는 일은 결코 없을거에요. 전 회사가 제 가장 중요한 축이 되게 하고 싶진 않아요. 회사는 사실 좀 중요하긴 하지만-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지, 그게 중심이 되는건 정말 싫어요.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저 역시도 길들여져 있을지도..

네꼬 2013-10-16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님 요새 요리에 관심 생겼어요? 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씨리얼 먹겠다는 결심을 보니, 역시 당신이라는 여자는 중간이 없는 여자. 돼지 두루치기 아니면 씨리얼이라니.

다락방 2013-10-17 11:24   좋아요 0 | URL
제가 요리에 관심이 생길리가 있겠습니까.
엄마가 여동생 산후조리 때문에 여동생 집에 가 계셔서 집에 밥과 반찬을 제가 하고 있어요...맨날 김치만 꺼내먹고 스팸만 부쳐먹을 순 없어서....그래봤자 반찬은 두루치기가 유일했고 국은 김치찌개랑 된장찌개 끓여봤는데 남동생이 먹어보더니 '누난 도대체 왜이러냐' 라고 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그것밖에 없어서 먹긴 먹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3-10-1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리얼은 아침에.... 돼지 두루치기는 저녁에...

다락방 2013-10-17 11:26   좋아요 0 | URL
아침부터 씨리얼이라니. 말도 안돼요! 그건 너무 초라한 아침이에요! (이러면서 무슨 저녁에 씨리얼이람 ㅋㅋ)
당연히 어제 저녁도 씨리얼은 아니었어요. -_-

Mephistopheles 2013-10-1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하셨어요???? ( 아머님 동생 산후조리...^^)

동생분이 어머님께 많이 고마워하실 것 같습니다. ( 남동생이요! )

다락방 2013-10-17 14:20   좋아요 0 | URL
독립은 그러니까..나중에........( ")

별로 고마워하는 것 같지 않던데요. 맛을 보면.....Orz

Mephistopheles 2013-10-17 16:5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께가 아닌 어.머.님.께.요.

다락방 2013-10-17 17:09   좋아요 0 | URL
아 저 오독했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머님께 라고 써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