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이모부의 서재
















감상적인 글은 산만하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내 글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고. 중구난방 어지러운건 자신의 감상을 제대로 컨트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내가 감상적인 글을 쓰면서도 감상적인 글을 읽는것이 싫었다. 감상적인 글들은 글을 읽다 멈추게 만들었고 좀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런 글들이 내 글(이라고 해봤자 알라딘 서재에 올리는 페이퍼...뿐이지만)을 닮은 것 같아 더 싫었다. 그런 글들을 접할 때마다 내 글도 이런 느낌인걸까, 아 싫어...라고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임호부의 『이모부의 서재』를 읽으면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임호부의 서평들은 충분히 감상적인데 산만하지 않았다. 잘 정돈되고 정리되어 있었다. 체계적이며 하나로 나아갔다. 감상적이면서도 차분한 글을 쓸 수 있다니, 이런게 가능한거구나, 싶으면서 내 글을 돌아보게 됐다. 정말이지 내가 그동안 써온 글들이 부끄러워졌다. 형편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이 책 속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서평집은 대개 세 종류로 나뉜다. 독자를 향해 쓴 것, 다른 저자들을 향해 쓴 것 그리고 저자 자신을 향해 쓴 것. 첫 번째 경우는 대개 독자를 통쾌하게 해주거나 최소한 독자에게 유용하다. 반면 거론된 저자들은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다(장정일의 『독서일기』와 로쟈의 번역비평이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 경우는 독자는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거론된 책의 저자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든다(이른바 주례비평으로 채워진 비평집들이 이 경우다). 세 번째 경우는 저자의 만족으로 그친다(서평 형식으로 쓰인 에세이집들이 대개 그렇다). 책은 소통의 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저자와 독자와 평자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셈이다. (p.67)



내가 그동안 책을 읽고 알라딘 서재에 올린 감상들은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고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저자의 만족으로 그치'는 글이 될 수밖에 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저자의 만족으로 그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가뜩이나 감상적이면서도 차분한 글에 이미 기가 죽어있는 마당에... 아, 이 책은 정말이지 사람 기죽이는 책이다. 내가 그동안 써온 글들을 죄다 뜯어고치고 싶어지는거다. 몇 개 다시 읽어보니 주제도 없고 일목요연하지도 않고 중구난방 산만하고..하아- 애초에 지적이고 차분한 글과 내 글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오버스러운 짓이었지만, 똑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쓴' 것인데, 전혀 다른 종류의 글이, 더군다가 한 쪽이 형편없게 느껴지는 글이 나온다는 게 속상한거다.  자꾸만 기가 죽어, 끝까지 읽지말고 여기서 멈출까,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종이로 나오는 글이라면 이정도는 되야지, 이런 생각도 들고.



멈추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보람이 바로 나타났다.



서울 지하철 6호선 합정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플랫폼에 들어서면 벽 한쪽에 시 한 편이 걸려 있다. 대개는 교정지가 하나 가득 든 가방을 둘러메고 그곳을 지나게 되는데 어서 집에 가서 어머니 저녁을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해질 때라도, 나는 시 앞에 멈춰서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여러 번 그 시를 읽곤 한다. 이런 시다.




마음의 그림자

           -최하림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 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는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였다



가을이 소담하게 담긴 시라서 더위를 식힐 요량으로 멈춰 서는 건 아니다. 어서 가을이 왔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고 가방 까지 내려놓는 것도 아니다.

내가 늘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시구,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를 마치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이듯 마음 한 켠에 다시 밝혀놓기 위해서다. 내게 위안을 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시구. (pp.129-130)




조카가 병원에 입원해있고, 다음주가 출산예정일인 여동생은 조카의 옆에서 조카를 돌보고 있다. 지금 조카도 또 여동생도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를 생각하던 중에 위와 같은 글을 만난거다. 마음이 급하고 몸이 힘들어도 시 앞에 멈춰서는 잠시동안의 시간을 가졌다는 그 순간. 그 순간을 여동생에게 선물해주고 싶어졌다. 책장을 잠시 덮고 어떤 시를 여동생에게 주어야할까, 어떤 시를 들려줘야 여동생이 잠시동안이나마 지금의 힘든 시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포기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시 앞에 멈춰서, 그 시를 읽는 순간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여동생은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는데 내가 외려 여기서 위로 받으라고 강요하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 임호부와 나는 시와 소설로 잠시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제 딸의 고통앞에 한참을 우는 여동생에게 시를 들려줄 생각을 하니,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킬것만 같다. 나는 동생에게 시를 들려주는 순간을 조금 미루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조금만 미루자. 지금은 그저 동생의 말을 들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만 하자. 비록 나는 여동생에게 시를 들려줄 수는 없었지만, 이 책에서 이 부분을 읽는데, 아 읽기를 잘했다, 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시 한편으로 고단한 일상을 위로 받는다는 게 무척 좋아서. 지하철 역에서 시 한편에 임호부는 위로를 받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순간을 즐겼다.





오늘 아침엔 5월에 한동안 열심히 들었던 심규선의 노래들이 떠올라 다시 들었다. 






담담하게 너의 앞에서 웃어보이려
얼마나 많이 노력하는지
그댄 모를거에요 정말 모를거에요
생각보다 더 나 많이 노력해요
그대 맘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대가 말한 온갖 작품을
가슴 속에 새기고 듣고 보고 외워도
우리의 거린 좀처럼 좁혀지질 않네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대는 내게
너무나 자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만
아, 나로 하여금 노래 부르게 만드는 사람이 그대라는 걸
나는 알고 있지요
알아요
그대 맘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대가 말한 온갖 작품을
가슴 속에 새기고 듣고 보고 외워도
우리의 거린 좀처럼 좁혀지질 않네요
얽매이는 기분이 들면 안되니까요
나는 다가서다가도 물러나요
보여주고 싶지만 드러낼 순 없기에
그대의 옷자락 끝만 붙잡고 있는 걸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대는 내게
너무나 자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만
아, 나로 하여금 노래 부르게 만드는 사람이 그대라는 걸
나는 알고 있지요
사랑 앞에 뭐 그리 두려움이 많나요
나는 몰라요 그대 말처럼 잘 모르겠어요
아, 나로 하여금 이토록 가슴이 뛰고
벅차오르게 만드는 사람 그대라는 것만 알아요




나는 특히 이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든다. 얽매이는 기분이 들면 안되니까요/ 나는 다가서다가도 물러나요. 캬- 좋구나. 좋다. 


지금보다 시를 더 열심히 읽어봐야겠다. 아주 근사한 시를, 따뜻하고 위로가 될만한 시를 찾아 딩동- 여동생에게 전송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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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3-10-0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귀여운 아가가 어디가 아픈가요?
어서 나아야할텐데... 금방 낫고나면 또 한뼘 훌쩍 클거예요...

다락방 2013-10-02 17:17   좋아요 0 | URL
아 휘모리님. 가와사키 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며칠째 고열에 시달려서 소아과를 몇번이나 가보다가 종합병원 간건데 이런 일이.. 오늘 새벽까지 앓다가 지금은 좋아졌대요. 내일 조카 보러 다녀오려고요. 동생이 나올 때가 되니 흠씬 앓나 싶기도 해요.

무해한모리군 2013-10-02 17:18   좋아요 0 | URL
아 가와사키 엄청 아프다던데.
자그마한 아기가 너무 힘들겠어요...
어서 털고 일어나야할텐데요.

다락방 2013-10-02 17:23   좋아요 0 | URL
아기 엄마도 한참이나 울었다지만 저도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혼났어요. 그 작은 아기가 앓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제가 대신 아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얼른 기운차려 주길 바라고 있답니다. 세상의 모든 아가들이 아프지 말고 자랐으면 좋겠어요. ㅠㅠ

2013-10-02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2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2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0-04 22:05   좋아요 0 | URL
이메일 확인 하셨습니까? ㅎㅎ 보냈습니다.

2013-10-06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느긋느긋 2013-10-0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호부의 글도 늘 챙겨읽으면서 좋아하지만
다락방님 글을 더 좋아하고 즐겨읽는다는
비밀스런 고백을 살포시 하고 갑니다.
공감하기만 매번 누르지만
댓글까지 달게 만드는 힘을 가진 건 다락방님 뿐! ㅠㅠ

다락방 2013-10-02 17:21   좋아요 0 | URL
워낙에 글을 잘 쓰시는 분이셔서 경탄의 눈길로 보곤 했지만 책으로 읽노라니 막 비교가 되더라고요. 절 기죽이려고 쓰신 글은 아니지만 저는 괜한 자격지심에 기가 죽어가지고. 흙흙

이렇게 댓글을 남겨주셔서 제가 기억상실님을 알게 되고 기억상실님의 생각도 알게되니 참 좋아요. 매번 고맙습니다, 기억상실님.
:)

비로그인 2013-10-0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내고 나서 제가 그동안 썼던 글들을 차분히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부분들도 체크할 겸 보게 된 거죠. 이런저런 오탈자는 보시는 분들껜 죄송하지만 뭐 그닥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게 제 현재 모습인 걸요. 문제는요,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거였어요. 이건 기만이 아닐까? 내가 정말 이 책들을 읽는 순간에 이렇게 정리된 감정과 생각을 했단 말인가? 이건 말하자면 내 감정에 솔직한 글이라기보다 그걸 어떻게든 잘 전달하려고 애쓴 흔적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정말 쓰고 싶은 글은요(아니 읽고 싶은 글은요) 각각의 문장이 크고 작은 골목이 되어 서로 연결된 그런 글입니다. 큰길로 이어지지 않고 저희들끼리만 연결된 채 서로 보듬고 있는 그런 글 말이죠. 현재 다락방님의 글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그런 글을 쓸 가능성은 저보다 많을 겁니다. 그나저나 조카가 얼른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네요. 아, 정말이지 아이들은 아프지도 말고 상처도 받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다락방 2013-10-04 22:0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큰길로 이어지지 않고 저희들끼리만 연결된 채 서로 보듬고 있는' 글은 책 말미의 '방' 에 대한 글과 같은 의미인 것 같은데, 맞나요, 후와님?

차분한 글을 쓰고 싶은데 저는 차분한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인가봐요. 후와님의 책을 읽고 제 글들을 한번 고쳐보고자 들여다봤는데 차분하게 고치려니 글 자체가 지금보다 더 엉망이 되는것 같더라고요. 차분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건가보다, 그렇게 체념하고 있습니다. 어휴..


조카는 오늘 퇴원했어요. 어제는 조카의 병실에 가서 밤을 보냈는데 밤새 아이들이 우는 소리를 듣는건 진짜 마음 아프더라고요. 조카보다 덜 아픈 아이들도 있었지만 조카보다 더 아픈 아이들이 훨씬 많았어요. 수술을 마치고 입원해있는 아이들도 있고요. 피 뽑거나 주사를 맞을 때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들을 보는데, 어휴, 아이들은 정말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어요..


네꼬 2013-10-02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웽. 우리 귀요미가 아플 데가 어디 있다고. ㅠㅠ 얼렁 나아라. 타미 엄마도 화이팅.

다락님, 최하림 시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거예요.

http://blog.aladin.co.kr/chat/1097897

(마침 내 서재에 있어서 부끄럽게도 막 주소 적음.)

다락방 2013-10-04 22:09   좋아요 0 | URL
우앙 그 시도 좋으다.
최하림 시집 한 권 사야겠어요. 불끈!

타미는 오늘 퇴원했어요. 네꼬님, 아이들이 아픈건 정말 너무나 가슴이 아파요. 내 조카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이들 말예요. ㅠㅠ

가연 2013-10-03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요, 다락방님 글도 좋은데ㅎㅎㅎ

다락방 2013-10-04 22:09   좋아요 0 | URL
므흐흐흐흣 고맙습니다. 그치만 부끄러워요 제 글은 ㅠㅠ

소나기 2013-10-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담하게,를 처음 들었던 게 이곳에서였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 지금 다시 들어도 여전히 좋네요.
다락방님 글은 저는 참 좋아하지요. 뭔가 유쾌하고, 자유분방한 그 느낌이 좋아요.
기분이 우울할 때도 웃음이 나게하는 그런 글이지요.ㅎㅎㅎ

다락방 2013-10-04 22:10   좋아요 0 | URL
담담하게, 참 좋지요? 헤헷.

유쾌하고 자유분방한 느낌만 갖고 차분하고 지적인 글은 저는 포기해야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닌것 같아요. 흑흑 ㅠㅠ 웃음만 가지고 가야겠습니다. 하하하하하.


잘 지내요, 홀릭제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