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십번씩 좋다 싫다를 변덕스레 바꾸는 조카지만, 그래도 이번에 '이모 싫어'는 너무 오래 갔다. 나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녀석이 나를 계속 싫어하는 건 아닐까? 도대체 왜 갑자기 이모 싫다고 하는걸까? 아빠는 나와 함께 고민하다가 혹시 그 그림 때문이 아니겠냐고 말씀하셨고, 그제서야 나는 아, 그런가보다, 했다. 그게 맞을 것 같아, 라고.

 

그러니까 사건은 이랬다.

 

 

 

 

 

 

 

 

 

 

 

이 책과 또 이 책에 함께 딸려온 스케치북을 펼쳐놓고(이 책을 오래전에 선물해주신 M 님, 이제야 이 책을 제대로 써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이주전, 조카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곰을 한 마리 그리고 두 마리 그리면 조카는 이건 엄마곰 이건 조카곰, 하며 제 이름을 붙였던 거다. 토끼를 그려달라고 해서 또 두 마리를 그려주니 이번에는 이건 이모 토끼 이건 조카 토끼, 했다.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책을 넘기다가 호랑이를 그려달라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말하면서 그리려는데 조카가 이러는거다.

 

할아버지 호랑이 할머니 호랑이 엄마 호랑이 삼촌 호랑이 아빠 호랑이 이모 호랑이 조카 호랑이 다 그려줘,

 

라고. 아니, 곰이나 토끼에 비해 호랑이는 그리기도 어려운데 그 많은 걸 다 그리라고? 나는 그리기도 전에 지쳐서는 조카야, 그건 너무 많아, 스케치북 한 장에 다 그릴 수가 없어, 두 마리만 그릴게, 라고 하자 조카는 스케치북과 책을 들고서 엄마한테 갈거야, 라고 하는거다. 그러더니 엄마에게 가서 똑같이 말했다. 저렇게 많은 호랑이를 그려달라고. 그런데 오, 여동생은 흑흑 응 그래, 하더니 스케치북 한 장에 그 많은 호랑이들을 다 그려주는 거다.

 

아, 역시 엄마는 위대하구나! ㅠㅠ

 

 

그 때부터 아마도 이모 싫어를 입에 달고 사는 것 같았다. 늘상 싫어 좋아를 반복했던 조카라 이번에도 그러겠거니 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그 뒤로 통화를 할 때마다 이모 싫어, 라고 하는거다. ㅠㅠ

 

 

그리고 이주후인 엊그제 조카가 왔다. 나는 조카 보라고 책을 네 권이나 준비했지만 조카는 심드렁하게 자기집에도 책이 많다고 말하며 책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나는 의기소침해졌고 애정을 어떻게 회복해야하나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카는 내가 선물한 책들 중 하나를 들고서는 내게 읽어달라고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읽어줬고 그 뒤부터 조카는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공휴일은 금요일에는 조카와 함께 어린이 대공원을 갔는데 내내 나에게 안아달라고 했다. 어느 순간에는 이모 좋아해~ 라고 말하기도 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순간이었다. 식구들이 다함께 모여 치킨을 먹을 때는 자신의 옆자리를 치며 이모 여기 앉아, 라고 했다. 흑흑. 되찾았다, 애정을 되찾았어. 이제 됐어. 흑흑.

 

 

 

조카와 대공원을 간 날은 무척 더웠다. 조카와 여동생과 엄마와 함께 집 앞에서 헤어진 뒤, 나는 살 게 있어서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에 갔다 집에 걸어가려는데 너무 덥고 목이 마른거다. 아이스그린티라떼를 사먹어야겠다고 스타벅스 앞에 갔다가, 아냐, 오천원이 어디야, 나는 빈곤 모드야, 참고 집에 가서 물마셔, 하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정말 너무 목이 마른거다. 물을 하나 사 마셔야겠다, 생각하다가, 아니, 내가 이 땡볕 더위에 왜 이런걸 참아야 하는가, 오늘 조카랑 노느라 힘들었잖아, 즐기자,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캔맥주를 하나 샀다. 오후 세 시를 넘긴 시간이었나, 대낮이었고 길에는 사람들로 분주했지만, 나는 캔맥주를 들고 마시면서 걸었다. 이 사실을 친구에게 말했더니 대낮에 캔맥주를 들고 마시면서 걷는걸 상상할 수 없다며 그래도 되는거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걱정말라고 경찰에게 잡혀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 이모란 힘든거구나. 길을 걷다가 맥주를 사마실 만큼 힘든 것, 그게 바로 이모다. 하아-

 

 

 

 

 

 

 

 

 

 

 

 

 

 

 

 

 

 

 

 

 

행정실장의 얼굴은 상한 홍시 색깔이었다. 민미란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눈물만 똑똑 떨구고 있었다.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참 취향도 여러가지라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손가락 마디에 쩐 냄새가 나도록 인색하고 꽉 막힌 행정실장도 그렇지만 거의 듬직하다 싶은 몸매의, 복지재단 아니면 언감생심 비서실에 근무할까 싶은 민미란까지, 둘 다 누군가의 환상의 대상이 되기엔 많이 부족해 보였다. 도대체 어디에 끌린 걸까. (프랑스식 세탁소, p.233)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은 「프랑스식 세탁소」 였는데, 이 부분을 읽자 슬퍼졌다. '듬직하다 싶은 몸매' 때문이었을까,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언젠가 어느 순간, 누군가도 나와 내 연인을 보며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또 나 역시 고백하자면 어느 커플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주로 길에서 마주치는 모르는 연인들에 대해서였다. 역시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짝이 있구나, 하면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굴러가고 있는게 아닐까. 취향이 여러가지 이기 때문에 우리는 저마다 짝을 찾을 수 있는게 아닐까. 취향이 모두 같았다면 한 사람이 여러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고, 외로운 영혼이 곳곳에 퍼져 있을테니, 취향이 여러가지인 것이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그러나 듬직하다 싶은 몸매, 는 자꾸 걸린다. 백화점에 가서 9,900원짜리 박스티를 사서 집에 돌아왔는데, 분명 펼쳐보면 너무나 커서, 이건 대단한 박스티겠군, 했는데, 너무 크면 남동생 입으라고 줘야지, 했는데, 입어보니 쫄티였다. 여기에서 오는 정신적 혼란과 충격은 대단했다. 다시 백화점으로 가 가장 큰 사이즈로 바꿨다. 할 수없지, 가장 큰 사이즈를 박스티로 입는 수밖에. 이건 정말이지 누군가는 담요로 써도 될 만큼 펼쳐놓았을 때 대단한 사이즈였다. 그러나 그 가장 큰 사이즈마저도 나에겐 박스티가 되지 않았다. 슬프다. 난 정말 듬직하구나, 너무 듬직해. 이런 내가 누군가의 환상의 대상이 되기엔 많이 부족하겠지. 흑흑.

 

 

 

 

-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햄버거는 맥도날드 햄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급적 먹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먹게 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정말이지 집어던지고 싶은 맛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런걸 햄버거라고 만들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진짜 짜증나. 나는 그 작은 햄버거를 차마 다 먹지도 못한다. 너무 맛없어서. 다음부턴 맥도날드에서 먹게 된다면 그저 감자튀김만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헐, 어린이대공원에서 파는 또래오래 치킨의 햄버거도 만만치 않았다. 끔찍한 맛이었다. 배가 고파 씹어 삼키면서, 집어던질 만한 햄버거가 여기 또 있군, 했다. 또래오래 치킨은 치킨중의 으뜸인데, 어린이대공원에서 파는 햄버거는 대체 왜 그모양이란 말인가. 그건 정말 심하다.

 

 

- 어제 뒷동산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 남동생은 내게 회사를 관두고 아예 다른 직업을 갖게 된다면 누난 무얼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집 앞의 편의점을 가리키며, 저 정도 사이즈의 동네 서점을 운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딱 저 사이즈로 동네에서 하는거지, 그런데 문제집은 팔지 않는거야, 라고. 그리고 되물었다. 그런데 문제집을 팔지 않으면 나 굶어 죽겠지? 그러자 남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집만 팔지 않으면 되는거아냐, 로또를 팔어, 그럼.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그...그래. 로또를 팔면 되겠다. 담배도 팔까? 그러자 남동생은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문제집은 팔기 싫은거잖아, 하면서.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고있지만 슬픈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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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05-19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전 다락방님 서점 단골 고객이 될겁니다. 하루에 한권씩 책을 살게요. 로또는 말구요.

다락방 2013-05-20 10:00   좋아요 0 | URL
아 그렇다면 저는 먹고살기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고정고객이 있으니 말입니다. 역시..서점을 한 번 차려볼까요..

dreamout 2013-05-19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익을 낼 좋은 방법인데요. ^^
로또 파는 서점이라~~ ㅎㅎ

다락방 2013-05-20 10:04   좋아요 0 | URL
로또를 팔면 수익을 낼 수는 있겠지만 금요일엔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아요. 전 제 서점이 복잡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우..그리고 막 저한테 자동 한 줄이요~ 이러면서 막 달라고 할 거 아녜요. 저 책 팔아야 되는데 -_-

마노아 2013-05-1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뜩해. 마지막에 대박 빵 터졌어요. 다락방님 남동생 완전 사랑해요. 진짜 최고예요. 등장할 때마다 큰웃음 줘요. 아, 진심 고마워요.ㅜ.ㅜ

다락방 2013-05-20 10:04   좋아요 0 | URL
저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웃긴 사람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양물감 2013-05-20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학다닐때 4년동안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 서점이 문제집을 팔지 않는 서점이었거든요. 큰 고등학교를 두개나 끼고 있는 곳이었는데 말이지요. 문제집을 사러 온 손님들에게 항상 건너편에 있는 서점을 추천해드리곤 했어요. 그렇게 하더라도 수익은 충분히 나던 시절이었지요. 그때는요. 그러니까 시집코너가 큼지막하게 한쪽 벽면을 차지해도 수익이 충분히 나던 그런 시절이요^^

다락방 2013-05-20 10:05   좋아요 0 | URL
저는 왜 대학 다닐 때 서점에서 아르바이트 할 생각을 못했을까요? 어휴.. 지금이라도 하고 싶네요. 아니 그런데, 문제집을 팔지 않는 서점이 존재했었나요? 오..저는 상상도 할 수 없어요. 근사하네요! 문제집을 팔지 않는 서점을 한 번 차려볼까....흐음..

아무개 2013-05-20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술은 팔면 안되겠죠? 술파는 서점 ㅋㅋㅋ

2.작년 여름에 알라딘에서 팔던 셔츠 기억나시죠? 젤 큰놈으로 샀는데 저도 아주 그냥 딱!!!! 맞습니다. ㅡ..ㅡ

3.맥도날드 햄버거는 한 3일 정도 굶고 먹어야지만 먹을만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정말 너무 맛없어요.!

4.찌뿌둥한 월욜이네요. 이번 한주도 또 잘 버텨보자구요^^

다락방 2013-05-20 10:07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술을 팔고싶긴 한데, 다들 술 취해가지고 술을 막 책에다 엎지르면..어떡하죠;; 흐음.. 사람들이 책을 사지는 않고 들춰보며 술을 마시면 안되니까 술 파는 곳은 경계선을 정해놓고, 여기는 계산하지 않은 책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라고 써붙여야 할까요. 아, 근데 어쩐지..점점 좋은 서점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아, 그 티셔츠요. 저도 제일 큰 놈으로 요즘 매일 입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 조카가 제 품에 안겨서는 한 명씩 짚어가며 할아버지 아쩌시 할머니, 하고 놀아요, 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맥도날드 햄버거를 맛없다고 생각하시는 1人 이시군요. 진짜 반갑습니다!!

Mephistopheles 2013-05-20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물며 엄마는...??,,,,
(대낮 길거리 캔맥주 드링킹은 다락방님 포스면 분명 가능하고 남았을 껍니다.)

다락방 2013-05-20 10:08   좋아요 0 | URL
엄마는, 어휴, 감히 제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도 안하고 있어요. 전 진짜 못할 것 같아요.

여름인데 비싼 커피 사마시느니 캔맥주로 시원하게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래서 제가 돼지가 되는가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ephistopheles 2013-05-20 13:22   좋아요 0 | URL
돼지라뇨....우린 곰입니다..곰이요..곰..곰..곰!!!!

다락방 2013-05-20 16:21   좋아요 0 | URL
그럼 저는 꽃곰할래요. 꽃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관찰자 2013-05-2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그런 로또는
아무나 팔 수 없다는 슬픈 현실. ㅜㅜ

(전 그 로또 파는 것을 진짜로 알아보기까지 했다니까요;;)

다락방 2013-05-20 16:21   좋아요 0 | URL
아 또 그래요?

전 서점 얘기 엄마한테 아까 했다가 헛꿈꾸지 말라며 지청구나 들었네요. 하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