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밤, 이메일을 받았다. 기프티북으로 이 책, [프랑스식 세탁소]가 도착했다는 거였다. 표지도 제목도 너무 예뻐서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는데, 오, 메세지를 보니 무려 이 책은 '정미경'의 책인거다. 정미경의 새 책!! 그래, 정미경의 새 책이 나왔다!! 꺅 >.<

이승우를 알기전의 나는 국내에서 정미경과 한창훈을 제일 좋아했는데, 이승우를 알고난 후의 나는 이승우와 다른 국내작가들, 이라고 분류하기 시작했지만, 오, 정미경이라니. 킁킁. 게다가 내가 정미경을 좋아했다는걸 기억하고 보내주는 이 친구의 섬세함이라니. 무척 기뻤다. 정미경이다, 정미경. 아, 근데 책 너무 예쁜거 아니야?

 

 

 

 

금요일부터 2박3일간 순천에 다녀왔다. 토요일밤, 술을 마시며 호텔안에서 주말드라마를 보고있었는데, 남자주인공이 자신의 연애를 반대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없는 사랑이 있을까요?

 

남자(이정진)가 사랑하는 여자(유진)는 이혼녀이고 가난한집 딸이다. 이에 부잣집 남자의 엄마는 그녀를 반대한다. 도무지 자신의 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는 것. 그리고 아들에게 '대체 니가 뭐가 부족해서' 그여자를 사귀는거냐고 말한다. 남자는 이에 자신에게도 부족한 게 있다고, 자신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고, 엄마는 나를 다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저런 대사를 읊는거다.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있는거, 그게 사랑인걸까? '필요한 사람' 이 사랑인걸까? 나역시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에 연애를 한 적이 있긴 하지만,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사랑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가 '필요'하다고 느끼는거, 그게..사랑인걸까?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고, 내가 그에게 필요로 하는 여자로 존재하는 거, 상대는 그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 그건 내게 어쩐지 부조리하게 느껴지는데, 그러나 실상 세상의 모든 사랑은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에서 시작하는걸까? 내내 생각해도 아닌것 같다 싶고 그러다가 어쩌면 그게 자신이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내 사랑에 측은한 마음은 없었으면 좋겠고,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도 측은한 마음이 없었으면 좋겠다. 내 사랑의 기준에 측은한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내게는 어떤 기준이 존재하는걸까?  

 

 

 

 

일요일, 순천에서 돌아오기 위해 여수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피곤했던 나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잤고, 김포공항에서 눈을 떴다. 비행기가 멈췄고, 나는 가방 두 개를 꺼내기 위해 일어서서 짐칸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은 잘 열었는데 어어,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짐들이 내 짐보다 늦게 실려서 내가 꺼내야 할 가방이 저 안쪽에 있다. 나는 팔을 뻗어보고 까치발도 해봤지만 도무지 가방에 손이 닿질 않아..절로 헐, 소리가 나왔고 나보다 키가 작았던 친구는 앉아서 손이 안닿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하며 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당황하기 시작했다. 승무원이 지나가면 꺼내달라고 하려니 가방이 무겁고, 헐, 이건 뭘 어째야 하나, 부질없이 계속 까치발만 하고있는데, 뒤에서 이건가요? 하며 키가 큰 남자가 내가 꺼내려던 가방 한 개를 너무도 쉽게 꺼내 내게 준다. 나는 네,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들고는 그 가방의 주인인 내 친구에게 건넸다. 문제는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가방. 까치발을 하면 겨우 보이기만 하는 가방, 아놔..그렇다고 그 남자한테 저것도 꺼내달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그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안될거란걸 뻔히 알면서도 계속 까치발을 하고 그 가방에 손이 닿기를 바란다. 하아- 까치발을 백번하면 키가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팔이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마치 계속 노력하다보면 불쑥- 키가 자랄것처럼. 멘탈이 붕괴될 즈음, 그 남자가 다시 팔을 넣어-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더라!!- 내 가방에 손을 대며 이것도에요? 묻는다. 나는 네, 라고 답하고 그는 내게 가방을 꺼내준다. 와- 나는 고맙습니다, 라고 얼굴이 붉어져서 대답했고, 아아,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2박3일간 순천에 머무르며 등심을 먹고 소주를 마시고 와인을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몇시간이고 걸어가며 정원박람회를 구경하고 하늘과 나무를 사진속에 담고 초록초록한 세상을 보며 감탄에 젖었지만, 그 모두가, 그 모두가 비행기안에서의 키가 큰 남자앞에서 아무것도 아닌게 되었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건 나보다 키가 훌쩍 큰 남자의 긴 팔, 그가 꺼내준 내 가방, (키만)작고 무력한 내 앞에 나타난 그 키 큰 남자, 이 순간을 위해 나는 2박3일간 순천에 머무르며 코피를 쏟을만큼 체력을 소모한 게 아닐까 싶어졌다. 남자는 그럴 때 아름답다. 자신이 가진 힘을 함부로 써댈때가 아니라, 필요한 곳에 쓸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약하다는 이유로 막대하는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힘으로 도와주려고 할 때. 누군가에게 더 큰 키가 있고 더 센 힘이 있다면, 그건 그걸 이용해서 키가 작고 약한 힘을 가진 사람을 굴리며 놀라고 있는게 아니다. 세상엔 자신이 가진 힘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알고 있고, 제대로 쓸 줄 아는 남자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아름다운 일이다.

 

 

 

요즘엔 내내 심규선의 노래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심규선의 노래에 대해서 할 말이 아주 많은데, 그건 나중에 따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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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05-1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천 다녀오셨군요. 글을 읽는 동안 기쁨과 측은함과 아름다움을 함께 느꼈습니다.
심규선을 좋아하신다면 시와의 앨범 <시와, 커피>도 들어보시길. 저는 이 앨범을 화일로 구매했는데, 다락방 님께도 보내드리고 싶네요.
그런데, 왜 제목이 난 아직 조금 더 자야해.죠?

다락방 2013-05-13 12:45   좋아요 0 | URL
아, 졸려서요. 어제 집에 돌아오자마자 잤어야 하는데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먹고 책도 좀 읽고 하다보니 충분히 자지를 못해 여전히 졸려서요. 여행 다녀오면 잠을 푹 자야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요. 물론 술을마신 다음날도 그렇지만요. 하핫.

비연 2013-05-1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엔 자신이 가진 힘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알고 있고,
제대로 쓸 줄 아는 남자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아름다운 일이다... 라는 대목이 좋아요.

그렇지 못한 남자들이 와글거리는 듯한 느낌 속에 살아서인지. 더욱더.

다락방 2013-05-13 12:45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비연님. 무식하게 힘만 가진 남자들이 너무 많죠, 세상엔.

점심은 드셨어요? 전 이제 점심 먹으러 갈 거에요. 오늘은 아름다운 일들이 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Mephistopheles 2013-05-13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가 큰) 북방 흑고래 같은 남자를 실제로 만났군요..-예지 페이퍼도 아니고 이거야 원-

다락방 2013-05-13 14:15   좋아요 0 | URL
키만 큰거지 다른면에서도 북방혹고래 같았는지는 제가, 그러니까, 알 수가 없잖아요? ( ")

=3=3=33=3=3=3=3=3==3=3=3=3=3

Mephistopheles 2013-05-13 16:47   좋아요 0 | URL
따로 만나셔서.........딸기잼을 만들어 보는 수밖엔...

다락방 2013-05-13 17:17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님. 날이 더워요. 저를 19금의 상상속으로 밀어넣지 마세욧!!!!!!!!!!!!!!!!!!!!!!!!!!!!!!!!!!!!!!!!!

2013-05-13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13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05-1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이승우 작가 이전엔 정미경이였단 말이죠?
정미경씨 책중에 추천좀 해줘봐봐봐요~~

부산 태종대 가고 싶네요. 해운대에 있는 대구탕집도 생각나고.....

다락방 2013-05-13 14:26   좋아요 0 | URL
저는 [장밋빛 인생]이 참 좋았어요. 그냥 막 외우고 싶더라고요. 그 작품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참 좋았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음 별은 셋 주겠는데 정이가는? ㅎㅎㅎㅎㅎ

저는 곧 부산도 가지롱요~~ 움화화화핫

아무개 2013-05-13 15:32   좋아요 0 | URL
에잇 췟
저도 갈꺼에요 흥흥!

별 세개인데 외우고 싶다라.....더 궁금하네요^^

다락방 2013-05-13 15:35   좋아요 0 | URL
「몇 시에요?」
「여덟시」
「이제 돌아가요」
「지금은 상인의 시간, 장사치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죠」
민의 얼굴은 이제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상인의 시간을 견디며 말없이 물풀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윈드 브레이크 하나로 견디기에는 분명히 싸늘한 날씨였는데 민은 춥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재킷을 벗어주자 민은 고개를 저었다.
「옷을 줄 때가 아니라 돌아갈 시간이에요. 벌써 여덟시 삼십분이네요」
어둠에 눈이 익은 민이 몸을 기울여 내 손목시계를 읽는다.
「여덟시 삼십분이라. 그건 수학자의 시간이죠」 민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언제 가려구요?」
「시인의 시간에요」
「그건 언젠가요?」
「알 수 없는 일이죠. 난 지금 이 순간 시인이 됐으니까」 (pp.50-51)

아무개 2013-05-13 15:41   좋아요 0 | URL

우와!!!!!!!!
외우는 거에요? @..@

우리 부산에서 봅시닷 ㅋㅋㅋ

다락방 2013-05-13 15:58   좋아요 0 | URL
아니, 제가 이런 문장을 외울 능력이 되겠습니까!!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데려온겁니다. 어디에 썼던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아이큐가 높지 않습니다, 아무개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관찰자 2013-05-1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히 주말에 쉬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월요병을 앓는(?)다는 것도 웃기지만
갑자기 더워진 날씨 때문인지 확실히 월요병이 있네요.

너무 무기력해서 입안이 얼얼해지게 매운 비빔냉면을 시켜 먹었지요.
그랬더니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면서 정신이 번쩍 나네요.

뭐 드셨어요? 점심?

다락방 2013-05-13 14:49   좋아요 0 | URL
저는 오징어볶음 먹었어요. 오징어를 싫어하는데 오징어볶음의 그 매콤한 양념맛이 땡겨서요. 오징어가 너무 많아서 좀 짜증스러웠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었어요. 지금 배가 터진다능. 동료랑 커피도 사마셨어요. 생크림 올려진거(오늘은 너무 피곤하거든요 ㅠㅠ)로. 생크림 푹푹 퍼먹고 왔답니다.

blanca 2013-05-13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프랑스식 세탁소 책 표지 너무 아름다워요. 저 책이 궁금했어요. 다락방님 꼭 읽고 써 주세요. 권하신다면 저는 또 따라 읽겠어요. 그리고 키 큰 남자의 저 적절한 도움도 근사하네요.

다락방 2013-05-13 14:50   좋아요 0 | URL
저 책 표지 너무 예쁘죠. 제목도 짱 좋지 않아요? 너무 예뻐서 얼른 읽고 싶어요. 네, 도착하는대로 읽고 꼭 페이퍼나 리뷰나 뭐든 여튼 쓸게요. 너무 기대됩니다. 므흐흐흐흣

세상은 역시 여자와 남자가 한 데 어울려 살아야 하는것 같아요, 블랑카님. :)

프레이야 2013-05-13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려 정미경, 그녀의 신작이라니ᆢ곧바로 퐁당~ 담는 소리 들리죠? 땡스투유. 제목도 프랑스식ᆢ이라니. 게다가 표지는 저렇게나 아름답다니요. 남자는 역시 무거운 거 척척 들어주고 그럴 때 멋져요ㅎㅎㅎ

다락방 2013-05-13 17:1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프레이야님. 무려 '정미경' 인데 '프랑스식' 세탁소고 표지까지 아름다워요. 읽지 않을 수가 없지요.

네, 남자는 무거운 거 잘 들어주고 형광등 갈아주고 페트병 뚜껑 따주고 뭐 그럴 때 제일 멋진것 같아요. 하핫;;

아무개 2013-05-13 20:43   좋아요 0 | URL
또 반드시 북방흑고래여야하죠! 냐하하하하하~

다락방 2013-05-14 13:16   좋아요 0 | URL
얼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진 2013-05-1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미경의 책인데다 표지까지 예뻐! 이게 웬 횡재랍니까. 보니까 김숨의 신작 소설도 나왔던데 그것도 표지가 우아하더라구요. 일단 급히 읽어야 할 책이 쌓여있는데... 눈독들이지 말아야 겠어요. 흐

다락방 2013-05-13 19:23   좋아요 0 | URL
저도 김숨의 책을 중고책알림등록 해두고 대기하는 중입니다. 알림 오는대로 질러주겠어! 하면서요. 김숨도 눈여겨 본 작가이고, 정미경은 꽤 오랫동안 저의 패이버릿이었지요. 이승우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하핫.

표지 죽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