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양재역에서 내려 5번출구로 나가 버스정류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혹시라도 641버스가 나보다 먼저 지나칠까, 자꾸 뒤를 돌아 확인하며 걸었다. 가방은 무거웠고 오늘다라 9센치 힐을 신었는데 우산까지 들고 걸어야 해서 이미 출근길이 힘겹게 느껴졌는데, 어어, 버스가 오는게 보인다. 아직 정류장은 멀었는데. 할 수 없다. 나는 저 버스를 타야한다, 냅다 뛰기 시작했다. 버스만 보느라 바닥을 볼 수가 없었고, 그렇기에 나는 두 번씩이나(!) 튀어나온 보도블럭을 밟았다. 잔뜩, 물이 튀었다. 종아리로 무릎으로 그리고 구두속으로. 철퍽철퍽 하는 구두를 신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지만, 버스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하아- 다음 버스는 11분 후에 온다는 안내문을 보았고, 나는 이미 흠뻑 젖어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 너무 가혹한 출근길이다. 월요일인데 비가 오다니, 이런건 진짜 치사스러워.

 

어제는 엄마가 교회에 가셨다가 김밥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나는 이미 유부초밥을 만들어 먹고 배가 불러 양치도 한 뒤였지만, 김밥을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맨 끝의 김밥을 하나 집었다. 단무지도 계란도 튀어나와 있어서 푸짐했고 컸다. 제일 맛있는 부분. 그걸 먹기 위해 입을 벌렸는데 아야, 아직 채 낫지 않아 딱지가 굳어있는 입술의 물집이 찢어지는 게 느껴졌다. 에잇, 또 찢어졌군, 하며 김밥을 씹는데, 어어, 뭔가 이상하다. 줄줄, 흐르는 느낌이야. 남동생에게 야, 나 혹시 피흐르냐? 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피가 줄줄 흐른다고. 얼른 휴지를 건네주길래 받아 입술에 대었다. 내 입술을 보고 조카는 놀랐다. 이모 피나? 왜그래? 그러더니 자기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 어떡해, 이모 피나, 한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웃었다. 그러게 왜 제일 큰 김밥을 먹고 입 찢어지냐고.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러게. 작은 거 먹지, 나는 왜 제일 큰 걸 집어가지고 입술에서 피가 줄줄... 아 삶이 치사스러워. 음..이건 삶이 치사스럽다기 보다는 내 욕심이 더 크겠지만.

 

 

사람이 자기의 주위에 있는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어떤 중립적인 영역 속에 담을 쌓고 들어앉아서 고립되거나 보호받을 수는 있다. 그것은 즉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며 이기주의를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을 세상만사 어느 것과도 다를 바 없는 높이에 두고 생각하며 세상의 텅 비어 있음을 느기는 경우라면 삶을 거쳐가는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에 혐오를 느낄 소지를 충분히 갖추는 셈이다. 한 번의 상처쯤이야 그래도 견딜 수 있고 운명이라 여기고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바늘로 콕콕 찔리는 것 같은 상태야 참을 길이 없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기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대도 있다.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空의 매혹, p.31)

 

 

 

 

 

 

 

 

 

 

 

 

 

삶이 정말 치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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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3-04-29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엑! 뭐 이런 글이 다 있담... 뭔가 우르르 쏟아지는 기분. 아침에 일찍 일어났는데 비가 와서 한숨 더 잤어요. 늦잠을 잔다고 해서 삶이 조금 더 나아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힝

다락방 2013-05-05 22:42   좋아요 0 | URL
늦잠을 잔다고 해서 삶이 조금 더 나아지는 건 아니라니, 뽀님아, 굉장히 위로가 되는 말이에요. 힘이 되네요. ㅎㅎㅎㅎㅎ 그렇지만 늦잠을 자고 싶어요. 오늘은 일요일. 늦잠을 잤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었고 낮잠도 잤어요. 헤헷

달사르 2013-04-2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에 대고 치사해! 치사해!
힘껏 외쳐보고 싶네요.

요새는 정말 날씨가 왜이리 치사할까요.
치사빤쓰..

근데 김밥은 맛있었어요? 피까지 흘렸는데 김밥이라도 맛있어야 덜 억울할텐데..

다락방 2013-05-05 22:43   좋아요 0 | URL
이게 벌써 일주일전의 일이 되어버렸네요, 달사르님. ㅎㅎ
네, 김밥은 먹을만 했습니다. 오늘은 유부초밥을 터지지 않게 잘 만들었어요. 맛있게 먹었답니다.
:)

당고 2013-04-30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토닥토닥 다락방 님......
괜찮아요?

다락방 2013-05-05 22:43   좋아요 0 | URL
네네, 괜찮아요. 마음 잡고 있어요, 당고님. 고마워요.
:)

2013-04-30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5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3-04-30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간적으로 사치스러운 삶으로 읽었다는~
다락방님의 장점은 힘든 시기임에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점^^

다락방 2013-05-05 22:45   좋아요 0 | URL
유머감각은 저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제가 가장 높이 사는 점 중의 하나지요. 잃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감각이에요, 기억의집님.
늘 고맙습니다. 기억의집님 댓글 읽을 때마다 힘을 낼 수 있게돼요.

자작나무 2013-04-3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 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 일지도 모릅니다.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 됩니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입니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가 아닌가요.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지요.

실상은 말 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입니다.

법정 스님

다락방 2013-05-05 22:45   좋아요 0 | URL
올려주신 댓글과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겁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하핫;;

비로그인 2013-04-30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스도 보도블럭도 빗물도 김밥도 진짜 다 너무 치사스럽네요 ㅠㅠ
다락방님한테 그러면 안되지! ㅠㅠ

다락방 2013-05-05 22:46   좋아요 0 | URL
내일이 월요일인데, 내일은 어떻게 보내게 될까요, 아른님? 내일부터는 좀 더 여유로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면 해요.

다크아이즈 2013-05-02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찍이 김훈이 말했어요. 삶은 치사스럽고 던적스럽다고.
근데 (글로) 볼 때마다 다락방님은 잘 견뎌내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 날마다 책 읽고 글 쓰고 또 관찰하고 쓰고 이러는 것 아닐까요?
아님 저처럼 견디고 버티기 위해 쓰고 읽고 관찰하시는 건가? ^^*

다락방 2013-05-05 22:49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저 잘 견디며 지내고 있는것 같다고 저도 생각해요. 어떻게 해야 버틸 수 있는지를 제가 잘 알아서 하고 있는것 같아요. 가끔은 제 머리를 제가 쓰다듬어 주고 싶어요.

팜므느와르님의 닉네임을 이렇게 보고있으려니, 책장에 사놓고 꽂아둔 김훈의 책이 생각나네요. 아, 그거 읽으려고 산건데, 하면서 말이지요. 하핫

단발머리 2013-05-02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괜찮은거지요? 궁금해서 들어왔어요
다락방님 씩씩한 여자사람이라 괜찮을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생각나서요.

오늘은 날이 너무 좋아요. 다락방님 마음도 '날씨맑음'이기를.......... 그러길 바래요.

다락방 2013-05-05 22:50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저 괜찮습니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잘 지낼거고요.
전 씩씩해서 정말 잘 버티고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 물어주어 고마워요, 단발머리님.

오늘도 날이 무척 좋더라고요. 남동생과 나가서 비빔냉면 사 먹고 들어왔어요. 저녁엔 갈비도 먹었고요. 제 마음도 점차 날씨 맑음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