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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플까봐 ㅣ 꿈공작소 5
올리버 제퍼스 글.그림, 이승숙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10년 11월
평점 :
나에게는 29개월을 살고 있는 조카가 있다. 아직 소녀라고 부르기엔 어린 나이. 집 밖을 벗어나면 그곳이 어디든 소리지르며 뛰어다닐 만큼 순수하다. 말을 할 수 있게 되고부터는 이 아이는 아주 궁금한 게 많다. 수시로 묻는다. 이모 왜? 할머니 왜? 엄마 왜? 작년 가을, 온 가족이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가고 있는중에 자기 아버지의 무릎 위를 밟고 서서 뒤를 돌아 나에게 쫑알쫑알 대는데, 지나던 승무원이 위험하니 자리에 앉으라고 얘기했다. 아이 아버지는 앉으라고 아이를 달래는데, 아이는 승무원을 향해 또 묻는다.
"왜?"
자주 우리 집에 놀러오는 조카는 퇴근후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내가 내 방에 들어가기 무섭게 쪼르르 나를 따라온다. 그리고는 내게 이모 뭐해? 하고 묻는다. 나는 옷갈아 입어, 라고 대답한다. 내 책장에서 책을 꺼내고는 이모 책읽자, 라고 한다. 그렇게 침대위에 책을 꺼내두고는 곧 안아달라고 한다. 저기 위에, 자신의 팔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려고. 내가 번쩍 조카를 안아주면 조카는 책장 맨 위의 책을 어김없이 꺼내고서는 또 보자고 한다. 아직 글자를 익히지도 못한 아이인데. 키우는 열대어 어항 앞에 가서는 물고기 밥 줬냐고 묻고 삼촌 방에 들어가서는 이것저것 다 만져가며 이건 뭐냐고 묻는다. 내가 하품이라도 할라치면 이모 졸려? 라고 묻고 할아버지가 등산복을 꺼내 입으면 할아버지 어디가? 라고 묻는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조카가 물어댈때마다 우리는 즐겁게 웃으며 대답해준다.
이 책의 호기심 많은 소녀를 만날 때, 딱 나의 조카를 보는 것 같았다. 너는 누구 조카야? 라고 물으면 이모 조카야, 라고 대답하는 나의 조카.
조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할머니다. 참 이상도하지, 할머니가 키워준 것도 아닌데, 가끔 우리집에 놀러올 때 보는게 전부인데, 그런데 왜그렇게 할머니를 좋아할까. 조카가 보고싶은 마음에 영상전화를 하면 이모, 하고 부르고서는 이내 할머니 보여줘, 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투덜대면서 할머니를 바꿔줘야 한다. 내가 걸었는데!!!!! 부산 여행중에는 차 안에서 조카가 낮잠이 든 터라 아이 엄마와 잠든 조카를 두고 다른 식구들끼리 잠깐 나갔다 왔다. 자갈치 시장에 갔다 다시 차로 돌아갔는데, 고새 일어난 조카는 할머니와 이모를 찾으며 울었단다. 차 문을 열고 우리가 타기 무섭게 조카는 자기 할머니에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할머니 보고싶었어
라고 말한다. 아, 이 어린 아이가 보고싶다는 말을 아는구나, 그게 뭔지 아는구나.
소녀에게는 할아버지가 그런 존재였다. 소녀가 세상의 모든걸 궁금해하고 호기심 가득한 채 신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자신의 옆에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호기심에 답을 해주고 또 그 모든 말들을 들어주었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가 어느날 자리를 비운다. 소녀는 텅 빈 의자를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나는 그림책을 읽다가 울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소녀가 이 텅 빈 의자를 발견하는 순간, 텅 빈 의자 앞에 놓여있는 소녀를 마주하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이 아이에게 처음 닥쳐온 이별, 이 소녀는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할까. 소녀는 이 아픈 마음을 어쩔줄몰라 자신의 마음을 꺼내어 병에 넣고 목에 건다. 마음을 꺼내고 나니 더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다.
아이에게 죽음을 가르쳐줘야 하는 시점은 언제일까. 얼마전 영화 『아무르』를 보면서도 나는 어른이라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만약 나였더라도, 그러니까 이만큼이나 자란 나이지만, 소녀와는 거리가 멀지만, 나 역시도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꺼내어둘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어할 것 같다. 네, 내 마음을 꺼내어 병에 넣어둘게요, 그럴게요. 그런데 아이가 이걸 어떻게 감당할까. 이 소녀가 어떻게 감당할까. 네가 울고 소리지르고 슬퍼하고 힘들어해도 그 의자에 다시 할아버지가 와서 앉는 일은 없어, 이 잔인하고 모진 말을 어떻게 해주어야 할까.
소녀는 이제 더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은대신, 세상에 무엇도 재미있는게 없다고 느낀다.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고 아무것도 신나지 않아.
그리고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 어릴적의 자신과 닮은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 소녀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 나도 저런 적이 있었지.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들어가있는 병을 깨뜨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던지고 때려봐도 그 병은 깨지지 않고 그 안의 마음은 자신에게 돌아오질 않는다. 그 때, 자신의 어린시절과 닮은 소녀가 그 병을 건네받는다. 그리고 그 병안에 있는 마음을 꺼내준다.
마음을 꺼낸 후에 그 마음은 제자리를 찾는다.
빈 의자를 발견 했을 때도, 그리고 마침내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도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고인다. 양철나무꾼님의 리뷰를 보았을 때만해도 나는 이 책을 조카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언제고 이 어린 아이도 누군가를 잃는 아픔을 경험하게 될텐데 그때 이 책을 보았던 것이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데 조카를 주기 전에 내가 펼쳐보고 내가 눈물을 흘렸다. 내가 봐도 이런데 이걸 아이들이 어떻게 읽는담, 나는 도무지 이걸 보여줄 자신이 없다. 이걸 읽게 할 자신이 없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 그걸 내가 할 자신이 없으니 나는 그것을 아이의 엄마에게 맡겨야겠다. 이 책을 보여주렴, 그러나 언제 보여주는게 좋을지는 너에게 맡길게, 라고. 이 책을 아이에게 보여주기 전에 읽어보게 될 내 여동생도 코끝이 찡해지겠지. 여동생도 아마 한동안은 보여주지 않고 책장에 꽂아두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소녀가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 마음을 꺼내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소녀는 어떤 삶을 살게됐을까. 소녀일때도 혹은 어른일때도 누구나 마음 다치는 것이 싫어 마음을 닫아두려고 할 때가 있다. 사람이 혼자 살지 않고 여럿이 더불어 사는 까닭은, 그러니까 내가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고 애인을 만나면서 사는 까닭은, 내가 빈 병에 마음을 넣어뒀을 때를 위해서인걸까. 그럴때 내 마음을 꺼내어 제자리에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한 일이라서.
내가 본 그림책들 중 가장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은 내 책장에 꽂아두고 조카를 위해서는 한 권을 다시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