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는 퇴근후에 서점에 들르자고 마음을 먹었다. 서점에 갈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퇴근이 무척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비가 멈추지 않아서 한 손에 우산을 들어야 했다. 흐음, 가방이 무거운데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서점을 가야하나, 가지말까 싶었지만, 가지 않으면 계속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것 같았다. 지하철을 탔는데 한 손엔 무거운 가방 한 손엔 우산이 있어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멍때리며 잠실역까지 갔다. 내려서 표를 대고는 교보문고로 향했다. 교보문고로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 그리고는 교보문고로 들어가 시집 코너로 향했다. 알라딘 어느 분의 서재에서 보아둔 시집이 있었던 터였다.

 

시집 코너에 들러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시인의 이름을 훑다가 내가 찾는 시집을 찾아냈다. 시집을 들고 곧바로 계산대로 갈까 하다가 아쉬워서 소설 코너를 둘러 보았다. 에세이 코너도 둘러보았다. 으응, 이건 무슨책이지? 괜히 책을 들었다 놓기도 해봤다. 그리고는 시집 한 권만 사기로 한거니 한 권만 사고 가자, 싶어 계산대로 향했다. 포인트 1,200점이 있는데 사용할거냐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렇게 시집을 사고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시집을 가방에 넣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가방에 넣으려다가 아뿔싸, 내 손에 우산이 들려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으응? 어디다 뒀을까? 지하철 안에서는 내내 가지고 있었으니 이곳의 화장실이나 바로 이 서점 안일텐데..나는 잠깐 서서 고민했다. 서점과 화장실을 다시 한 번 들어갔다 나올까?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거였다. 그런데 자꾸만, 찾지 말라고 누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생각해봐, 한 손에 우산을 들면, 너 그 시집 어떻게 읽을건데? 난 아마 또다시 한 손에 가방을 들고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창만 쳐다보다 지하철에서 내리겠지? 아니야, 그래도 우산을 잃어버리다니, 그것도 알면서 그런다니, 좀 그렇잖아? 그렇긴 뭐가 그래! 시집 볼래. 나는 과감히 돌아서서 지하철을 타러 갔다. 내 손에 우산은 없었다. 나는 부러 우산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잃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고 자꾸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잃어버리자, 뭐 어때, 누군가 주워가겠지. 누군가에게 필요했을지도 몰라, 뭐, 좋은 우산은 아니고 일전에 편의점에서 3천원 주고 산 우산이지만, 누군가에겐 필요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래서 나는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결국 나는, 지하철 안에서 시집을 펼쳐 읽을 수 있었다. 시를 잘 읽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랜만에 시집을 펼쳐 시를 마주치노라니 새삼 갈증이 풀리는 것 같았다. 시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런 마음이 드는건지 모르겠다고 스스로도 갸웃했다. 내가 펼친 시집은 이것.

 

 

 

 

 

 

 

 

 

 

 

 

 

 

 

 

 

 

함박눈

 

 

눈이 와, 여긴 함박눈이야

네 목소리를 듣고

별안간 난

한 번도 함박눈을 맞아보지 못한 걸 알았어

평범한 기쁨을 떠나 있는 것 같아

엄청난 사태로부터도

 

 

늙은 시인에게서 사랑 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말을 들을 때처럼 싱거운 얘기지

 

 

눈을 감고 눈을 상상해

폭설이 난무하는 언덕에 서 있어

두 팔을 벌려야 해

입을 쫙 벌린 채 눈덩이를 받아먹어

함박눈은 솜사탕만 할 거야

네게 한 번이라도 함박눈이 되었으면 좋겠어

눈발이 거세지고 조금씩 나는 파묻혀가고 있어

난 하얀 구릉이 되어 솜사탕처럼 녹아가네

눈은 죽은 비라고 루쉰이 그랬나?

 

 

네 얼굴에 내가 내리면

코가 찡하겠니?

나를 연신 핥으며 달콤해 아 달콤해 속삭일 거니?

나를 베개 하고 나를 안겠지

우린 잠시 젖은 후 흘러갈 거야

너무 싱거운 거 같아 망설인다면

삽으로 떠서 길가로 던지겠지

 

 

 

지하철안에서 이 시의 마지막 연을 읽는데, 아, 너무 좋은거다. 나는 참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꺼내어 저 마지막 연을 사진 찍었다. 지하철 안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사람들 몇이 쳐다보았다. 어쩌면 나를 찍는걸까,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도 보았을 것이다. 내 카메라는 내 시집을 향하고 있었던 것을. 그리고 나는 그 사진을 스맛폰의 메세지로 친구에게 보냈다. 흡족했다. 비가 멈추지 않은 금요일 저녁, 시 한 연을 전해주고 전해 받는 일이라니. 으쓱. 좀 멋지지 않나?

 

 

말할 수 없는 애인

 

 

물이 없어도 표류하고 싶어서

외롭거나 괴롭지 않아도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돌아오거나 영 돌아오지 않겠지

가까운 곳에서 찾았어

우리는 모였지 인도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들과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 학생들

지난해 여름부터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었어

불한당 청년들의 표류처럼 불규칙적이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어휘와 문법을 습득하는 그들이 참 신기하더라

말이 무색해서 팔다리를 브이 자로 벌렸지

매알매일 뱃멀미가 났어

멀리서 돈 벌러 온 한 이방인에게 나는 미약했지만

그의 까만 손가락이 내 얼굴을 두드렸지

장난스럽게 단지 두드리는 시늉만 했는지 몰라

전혀 두드리지 않았는지 몰라

적절한 문장을 못 찾겠어 도무지 사랑할 수밖에

그는 자신의 긴 이야기를 음악 소리로 듣는 마을에 가서

내 갈색 귀에 다 털려버렸지 코 고는 소리도 뭔가 이상했어

외국인 남자는 어떨까 상상하지 않았다면

말 못할 관계로 가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어

생면부지의 것들을 만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지 않는다면

위험하지 않다면 살아 있는 게 아닌 건 아니지만

끝없이 문제를 만들어야 했어

시험 문항을 만들고

혼혈의 아이들을 낳아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의 모국어를 섞어 말할지도 몰라

콩밥을 나누고 에이즈 환자 모임에 가야 한다 해도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그를 사랑했어

 

 

 

나는 시를 외우지 못한다. 시를 외워 읊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마냥 동경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데, 이 시를 읽는 순간 이 시를 외워 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니, 사실 나는 이 시의 전문을 다 이해하지도 그리고 다 외우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그를 사랑했어, 라는 마지막 두 행의 의미를 살리려면 그 앞의 행들이 존재해야 할 것 같아 외우고 싶었다.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그를 사랑했어.

 

 

 

겨울 휴관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

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

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

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

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

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

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

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

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

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

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오래전에 친구는 내게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성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나는 이 시를 읽는 내내 그 친구가 생각났다. 그때 우리가 마주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환한 낮에 만나 술집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함께 있었던 그 토요일이.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시집은 뒤로 갈수록 모호한 시들로 가득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으로 빙빙 돌지만, 이 앞의 시들 만큼은 자꾸 자꾸 읽고 싶어진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언젠가 트위터에 끊임없이 사람들의 글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나는 한 순간, 이 사람들 외로운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외로운것 같아, 혼자인 것 같아, 다들 자신이 뭘 하는지 알려주려 하고 어디있는지 알려주려고 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를 원하고. 요즘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혼자이기를 원하면서 그러나 혼자이려 하지 않고, 혼자이려 하지 않으면서 사실은 또 혼자이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지?

 

 

모하트는 SNS 라는 이름이 정말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교를 목적으로 하는 네트워크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은 오히려 비사교적이 돼버리니 말이다. (p.140)

 

 

책 속에서 여자주인공은 페이스북 때문에 쉽게 범죄에 노출된다. 놀랄일도 아니다. 우리는 어느틈에 어디에서 무얼했는지 죄다 밝히며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죄를 저지르는데 유용했던 페이스북은, 사건을 해결하는데도 역시 단서들을 제공한다. 문제가 만들어지는 곳에서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도 나타나는 건 당연한 결과인가.

 

 

책은 재미있어서 손에 잡으니 책장을 휘리릭 넘기게 되는데, '좋다' 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책 뒷면의 이 책에 대한 찬사들을 보니 유독 '마이클 코넬리'의 것이 눈에 띈다.

 

"맵시 있고 최신 유행에 밝은 탁월한 작품. 난 이 책을 사랑한다." -마이클 코넬리

 

 

흐음, 마이클 코넬리님, 나는 당신의 책이 이 책보다 훨씬 좋은걸요. 이 책은, 내가 사랑할만한 책은 아니에요. 난 이 책을 사랑하지 않아요.

 

 

 

 

토요일인 어제는 1박2일로 여행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같이 가기로 한 동행이 새벽에 연락해왔다. 너무 아파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렸다고, 여행을 취소해야겠다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다시 잠들고 아침에 눈을 뜨니 토요일 하루가 온통 비어있고, 내 것이었다. 그래서 『아스라이 스러지다』를 읽고, 시집을 마저 들춰보고, 토요일자 경향신문을 훑었다. 그 토요일이 마냥 소중했다. 아, 이렇게 하루가 텅 비어있는 토요일이라니. 앞으로는 토요일을 좀 더 자주 텅 비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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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1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여의 토요일을 즐겼군요, 다락방님.^^ 겨울 휴관, 좋아서 세번 얽어봅니다. 저도 시를 외워서 읊는 사람들 신기하더라구요. ^^

다락방 2012-12-17 16:15   좋아요 0 | URL
네, 겨울 휴관 좋죠. 누군가가 막연히 그리워지게 하는, 그런 시에요. 헤헷.

dreamout 2012-12-1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요리이야기 책을 읽었는데..
저녁 먹고 그 책 얘기를 써보려고 했는데..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지금은 아무것도 쓰질 못하겠어요. ㅋ

다락방 2012-12-17 16:14   좋아요 0 | URL
우앗, 그 요리이야기 책은 뭐에요? 혹시 『가든 스펠스』에요? 저 읽어보고 싶어서 보관함에 넣어두고 있는 책이거든요. 그 책이에요?

dreamout 2012-12-17 22:03   좋아요 0 | URL
아! ㅎㅎ
이야기 책. 소설은 아니구요. ^^
그야말로 요리에 관한 책. 레시피도 있는.. 요나의 키친. 이라고. ㅋ

다락방 2012-12-18 08:43   좋아요 0 | URL
리뷰 봤어요. 그리고 장바구니에 쏙- ㅎㅎㅎㅎㅎ

조선인 2012-12-17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 안에서 시집 사진을 찍는 여인이라니... 확 프로포즈 하는 남자가 없었다는 게 당최 이해가 안 갑니다.

다락방 2012-12-17 16:14   좋아요 0 | URL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요.........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