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에 친구와 둘이 제주올레를 걸었을 때였다. 파랑색 화살표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걸으면 왼쪽으로 바다가 보이는 코스였는데, 그 길을 걷는중에 갈대숲이 있었다. 아니, 갈대숲이었는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오른쪽에 집이 한 채 보였던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친구와 나, 단 둘뿐이었다. 오는길 어딘가에서도 그리고 조금 더 걷다가도 사람들을 만났지만(올레길 걷는 박중훈도 봤다), 그 길에서는 우리 둘뿐이었다. 대낮이었는데도 사람이 없으니 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와 나는 깜짝 놀랐는데, 개 짖는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친구와 나는 소리를 지르며 뛰었다. 어떻게 해야할줄을 몰랐다. 그 개를 진정시키는 사람은 커녕 우리 주변엔 다른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뛰었다. 그 개가 우리를 따라온건지 아니면 묶여서 짖기만 한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때의 공포만은 생생히 남아있다. 친구는 우리가 야자수가 있는 바닷길을 걷다가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나와 '어디를 걸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다르게 갖고 있지만, 큰 개가 우리를 물듯이 짖어서 무서웠던 것에 대해서는 나와 기억이 같았다. 우리는 지금도 가끔 그 얘기를 하고, 그 기억 때문에 종종 '제주도 다시 가자, 올레길은 말고' 하고 얘기하곤 한다. 나에게 올레길을 여전히 큰 개 짖는 소리와 무서움으로 먼저 떠오른다. 바다를 끼고 걸었던 낭만적일수도 있었을 기억은 개 짖는 소리 저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요즘 이 책을 읽고 있다.
재미있는데도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가지 않아 왜그럴까 왜그럴까 하며 천천히 읽는중인데, 이 책에서 이런 부분을 만나게됐다.
나는 약 20분이면 공원(혹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부르듯이 특별 보호 구역)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 반 정도 걸었을 때 오른쪽으로 얼마 떨어진 거리에서 "거기 누구시오?" 라고 묻듯이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 가깝거나 위협적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큰 개가 짖는 소리임이 분명했다. 그 음색에 담긴 무언가가 그것이 늑대로부터 그리 많은 세대를 거치지 않은 상당히 크고 검은 육식 동물이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다른 개가 함께 짖기 시작했다. 이제는 괜히 짖는 소리가 아니었다. "적색경보! 우리 구역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라는 뜻이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개들은 점차 광란 상태로 변했다.
나는 불안한 나머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개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력과 다름없이 우주의 법칙이다. 내가 옆을 지나가려 할 대마다 녀석들은 언제나 마치 내가 자기의 알포Alpo(개 사료 브랜드의 하나-옮긴이)를 빼앗기라도 하는 듯이 행동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몇 년 동안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던 개라도 밖에서 내가 지나가는 냄새를 맡으면 분노에 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잠긴 창문으로 기세등등하게 몸을 날릴 것이다. 털 달린 슬리퍼만 한 작은 개가 내 피와 힘줄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공터에서 노부인들을 질질 끌며 달려온 적도 있다. 모든 개는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공허한 숲에 혼자 있다. 숲은 졸지에 거대하고 외로운 곳으로 변했다. 몸집이 크고 화가 난 것으로 짐작되는 개 두 마리가 나를 발견했다. 내가 발걸음을 재촉할 때마다 두 가지 사실이 점점 명확해졌다. 나는 분명 개들의 표적이고, 녀석들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짖는 소리가 "우린 너를 해칠 거야, 친구.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야. 흐늘흐늘하게 조각 내주겠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차디찬 선언이었다.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숲 밖으로 도망치지 못할 거야. 우리가 곧 너를 따라잡을 테니까. 누군가가 과학수사반에 연락해놓는 편이 좋겠군."
나는 숲을 걱정스럽게 흘끗 바라보며 종종걸음을 치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개들이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할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방어물로 쓰기 위해 돌멩이를 집어 들고 몇 미터를 달렸다.(중략) 개들은 이제 나와 거의 나란히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쪽으로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했을 뿐 녀석들과 나와의 거리는 약 12~15미터를 넘지 않는 듯했다. 녀석들은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점점 불안해진 나는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pp.89-90)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이 부분을 읽는데 심장이 두근거리는게 느껴졌다. 내 호흡이 빨라질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개가 짖는 소리에 놀라 무서워하며 떨던 내 공포가 다시 찾아오는 것 같았다. 하아- 싫어. 큰 개가 짖는 호주에는 결코 가지 않겠어, 하고 다짐하고 싶었지만, 하아- 나는 언젠가 먼훗날, 회사를 그만두고 거기에 가야할 이유가 있는데..
그나저나 빌 브라이슨은 진짜 글 재미있게 잘 쓰는 듯. 내가 처음 읽은 빌 브라이슨의 책은 『나를 부르는 숲』이었는데, 이 책은 선물받고 한참동안을 책장에 꽂아두었더랬다. 숲..에 간걸 쓴 책이 재미있을리가 없잖아;; 라는 생각으로. 그러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후 읽으면서 선물한 친구에게 완전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었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선물하고. 배낭을 메고 숲을 걷는 그 책이 되게 재밌는거다. 하하. 짐을 쌀 때부터 재밌더라. 『발칙한 유럽산책』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상하게 이 호주여행기는 책장이 더디 넘어간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야지. 내가 호주에 가야할 이유가 포르투갈로 혹은 스페인으로 옮겨졌으면 좋겠다. 아, 포르투갈에도 스페인에도 개는 있겠지. 다만 날 보고 짖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개야. 난 너를 미워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날 보더라도 그렇게 크게 짖지 마, 제발. 아무리 내가 더 무섭게 생겼더라도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