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인의 『뱀』을 읽다보면 김이설이 떠오르고, 박연준이 떠오르고, 김사과가 떠오른다. 그들 사이의 어디쯤, 을 작가가 노린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나 윤보인은 그들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김이설의 고발성을 가졌고 김사과의 하드코어를 가졌다. 그런데 박연준같은 아련한 슬픔도 있다. 윤보인의 책속에서 외로운 사람들은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비참함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희망은 저 멀리 있는 것. 해피엔딩은 그들에게 생소한 단어. 만약 내가 일본 소설인 '가네하라 히토미'의 『뱀에게 피어싱』을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책, 『뱀』은 끔찍할 정도로 하드코어인 건 아니다. (하드코어를 좋아한다면 이 세상에 '뱀에게 피어싱'만한건 없다고 생각한다. 의미는 없는 하드코어였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실린 첫 단편 「뱀」에서 주인공의 외로움보다 내게 더 끔찍하게 느껴졌던건 어항에서 키우던 뱀이 없어진걸 발견하게 된 순간이다. 허물을 벗고 탈출한 뱀. 으악, 그 뱀이 어디로 간걸까. 난 절대로 뱀을 키우지 않겠어. 엊그제 만난 친구가 키우던 개구리가 밤사이 어항을 탈출한것을 여동생이 잡아서 다시 넣었다고 한 말도 생각났다. 으악. 난 개구리도 안키울거야. 일전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서 악어를 애완용으로 키우다가 너무 커져서 차 트렁크에 싣고 달리던 장면도 생각났다. 난 악어도 안키우겠어!



뱀 
악취 
줄 
일요일 
꼽추의 장례식 
바실리 사원 
살풀이춤 



이 책에는 총 여섯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나는 어젯밤 네 번째 단편인 「꼽추의 장례식」까지 읽었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생각했다. 단편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단편도 짧지만 하나의 이야기인데, 그 단편을 한 편 씩 읽어야 되는게 아닐까? 나는 항상 단편집을 한 권의 책으로 대하고 손에 잡으면 다 읽었기 때문에 많은 단편들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게 아닌가. 그래서 단편은 기억날만큼 강렬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렇게 읽었어도 피츠제럴드는, 로맹 가리는, 줌파 라히리는 여전히 기억나잖아. 윤보인의 단편들은 강렬하니 한 권을 다 읽어도 되지 않을까? 아니, 그걸 떠나서 이건 한꺼번에 주루룩 다 읽어내기엔 좀 벅차. 이것들을 단숨에 다 읽는건 내가 나한테 좀 못할짓인것 같아. 하루에 한 편씩만 읽어도 충분히 우울해지는데 이걸 죄다 읽자고? 어림없는 소리. 네 편이면 선방했어. 그만둬. 그리고 이건, 그러니까 나머지 두 편은 나중에 한 편, 그리고 또 나중에 한 편 읽도록 하자. 그렇게 나는 책장을 덮고 침대에 책을 두었는데, 그건 베개 옆이었다. 그리고 표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화장대 의자 위로 책을 치워놨다. 꿈에 뱀 나오면 어떡해.



책을 치웠기 때문인지 꿈에 뱀이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꿈에 나는 갈비를 데웠다. 그리고 약한불로 데워, 약한불로, 라고 잠꼬대를 하다가 내 잠꼬대 소리에 놀라 깼다. 갈비는 약한불로.



자, 다시 단편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나는 며칠전부터 피츠제럴드의 「리츠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를 읽고 싶었다. 분명 일전에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단편으로 읽었는데 어째서 기억나지 않을까? 리츠호텔만큼 큰 다이아몬드 얘기는 당연히 아닐테고, 그것은 상징이나 은유일테지, 어떤 내용인지 다시 읽어보자 싶어서 민음사의 단편을 꺼내들었다.


















아, 그런데 리츠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는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었다. 정말 그런, 그토록 큰 다이아몬드였다. 일전에도 피츠제럴드의 단편 「낙타의 뒷부분」을 읽고, 정말 낙타의 뒷부분의 얘기라며 놀라서 페이퍼를 썼던 기억이 나면서, 그래, 피츠제럴드는 정말 그것에 대해 얘기했었지!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자, 보자.



존이 열심히 말을 이었다. "다이아몬드도 있었어. 신리처 머피네 집에는 호두만 한 다이아몬드가 있는데 ‥‥‥."

퍼시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 아버지한테는 리츠칼튼 호텔보다 더 큰 다이아몬드가 있는걸." (p.136)



아, 정말 그런 다이아몬드에 대한 얘기였어. 정말 큰 다이아몬드에 대한 얘기. 이 단편의 등장인물인 존이 시골에서 보스턴의 명문학교로 진학하는 얘기는 선명히 기억났다. 맞어, 이건 읽은 기억이 있어! 그런데 왜 정말 저렇게 큰 다이아몬드에 대한 얘기는 전혀 기억나지 않을까. 자, 다시 다이아몬드.



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침대야, 아니면 구름이야? 퍼시, 네가 나가기 전에 사과하고 싶어."

"왜?"

"네가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말했을 때 의심했던 거." (p.145)



나도 의심했다. 그러니까 어떤 허영의 표시이지 정말로 그렇게 큰 다이아몬드가 있을거라고는(아무리 소설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퍼시를 의심했다. 퍼시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뭐, 결과적으로 보자면 퍼시가 존에게 미안하다고 오백 번 사과해도 모자라지만. 아니, 사과 따위로 될 일이 아니지만.





요즘 나의 남동생은 '하림'의 「출국」이란 노래에 뒤늦게 푹 빠져있다. 어제와 오늘, 생각난김에 친구들과 그 노래를 주고 받으며 하림에 대한 이야길 했다. 한 친구는 이 노래를 들을때마다 자기는 미친다고 했다. 출국도 좋고 같은 앨범에 실린 난치병도 좋다고. 나는 하림이 [ven] 이란 그룹으로 활동했던 시절의 노래, 「키보다 큰 사랑」을 엄청 좋아한다고 했다. 맙소사,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나는 십년도 훨씬 더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노래를 처음 라디오에서 듣게 될 당시의 나는 대학 4학년이었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재수생 남자아이와 사랑에 빠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하를 어떻게 남자로 보겠느냐고 코웃음치며 다녔는데, 나는 그때 단단히 빠졌더랬다, 정말. 이런일이 내게 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녀석은 편의점에 적힌 연락망을 보고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겠다고 온 날 부터 내게 매일매일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서 나는 귀찮아 핸드폰을 꺼놓기도 했다. 다른 알바생들은 원래 알던 아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처음 본다고. 처음에 나는 그런 녀석이 귀찮고 싫었다. 몸에 딱 맞는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도 싫었고 그렇게 싫다는데도 들이대는게 싫었다. 그런데 어느틈엔가 녀석의 전화가 오지 않았던 날, 하루 종일 우울했다. 그래서 나는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왜 전화 안해? 그 문자를 받자마자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전화 기다렸어? 라고. 그 때, ven  의 노래를 듣게 된거다.



사랑했었어 너 떠나지만 
함께한 시간 너라서 나 행복했어
이젠 슬픔만 남게 됐지만 
너때문이면 아파도 나 견딜거야
내 친구의 누나였던 너를 
처음 만나서 시작된 사랑
빨리 어른이(어른이) 되고 싶었어 (싶었어)
뭐든 널위해(널위해) 다해줄 내가 되도록
이별이(이별이) 먼저 오게 됐지만(됐지만) 
니가 있어서(있어서) 그때는 난 행복했어

*내 친구의 누나였던 너를 
누나라곤 한번도 부를수가 없었던거야
사랑했지만 내 전부였지만 
너보다 키도 큰 나였지만 
내 넓은어깨로 아무리 안아도 
언제나 너에겐 부족했겠지

너를 사랑해도 너의 어려움에도 
달려가 도울수 없었던 혼자서 
울어야 할 시간들이 더 많던 사랑이야
사랑해~~~

널 사랑해 세상 누구에게도 
너라고 말할수 없었던 웃음에 
가려진채 잊혀질 내사랑을 너만은 
너만은 기억해줘 

나의 사랑을



아,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이 노래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내내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내가 이 노래를 들었던 대학 4학년때도 이 노래는 몇년전 발표된 노래였던지라 내가 간 레코드샵에서 이 앨범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 때의 나는 시디가 아닌 테입을 들으며 다녔다. 보다못한 친구가 자신의 동네에 있던 허름한 레코드 가게를 찾아가 다행히 하나 남아있던 테입을 사다 내게 주었었다. 오늘 다시 이 노래를 찾아듣는데, 하아- 






몇 년 전,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다시 다른 직장으로 옮겨서도 꽤 오래 근무했을만큼 그때로부터 오래된 후에,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청나게 오랜만이라 우리는 반갑게 통화를 했는데, 녀석은 내게 말했다. 

그때, 너도 나 좀 좋아하긴 했어? 

나는 녀석에게 당연하지, 그렇게 매일 전화하는데 어떻게 안좋아해, 라고 답했다. 그러자 녀석은 '그러면 지금 다시 매일 전화하면 우리 잘 될 수 있어?' 라고 하는거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진 않다고.


아, 이게 다 하림 때문이야. 방금전에, 오전 09시 40분. 나는 충동적으로 까페로 달려가서 생크림이 얹어진 뜨거운 커피를 사왔다. 생크림을 좀 더 넣어달라고, 많이 좀 넣어달라고 컵의 뚜껑을 닫기전에 말했다. 지금은 이걸 꼭 마셔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생크림이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아, 원래는 제목을 [단편을 읽는 방법]으로 하고 문학적인 페이퍼를 쓰고 싶었는데, 이게 뭐람.


다 하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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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5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2-10-05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리츠호텔만한 다이아몬드 저도 읽었어요 ㅋㅋ 굉장히 특이했던 작품이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생크림 얹은 커피는 역시 커피 지름신을 부르네요^^ 다락방님이 러브 스토리는 언제나 들어도 달달해요. 생크림보다 더요

다락방 2012-10-05 17:26   좋아요 0 | URL
네, 블랑카님. 굉장히 특이하고 섬뜩한 작품이에요. 그 엄청나게 부자인 집에 친구를 초대해서 다이아몬드 산을 보여주고 대신 그 말이 밖에 새지 않도록 그들을 나중엔 가두거나 죽여버리죠. 어떻게 이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될 수 있는지 새삼 피츠제럴드에게 감탄했지 뭐에요!!

달달한 부분만 적어서 달달하지, 저 뒤는 아주 썼답니다. 흑흑 ㅠㅠ 내게 사랑은 너무 써~♪

테레사 2012-10-05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근데 다락방님, 다락방님은 주로 언제 이런 글을 쓰세요? 진짜 부지런하시고, 기억력 좋으시고, 문장력도 짱!!

다락방 2012-10-05 17:49   좋아요 0 | URL
저는 주로 사무실에서 근무시간에 직장 상사의 눈치를 봐가며 다다다닥 씁니다. 뭔가 생각나면 긴 글이어도 쓰는데 시간이 걸리지는 않아요. 다다다닥 쓰면 되니까ㅎㅎ 부지런하기 보다는 근무시간에 딴짓을 하고 있...............인용문은 책 봐가면서 쓰는거니 기억력은 패쓰고, 음, 문장력은 .. 어디...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칭찬 들으니 짱 좋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당고 2012-10-0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다른 소설집에서 윤보인의 <악취>를 읽고 충격받았더랬어요. 저한테는 좀 강렬했나 봐요. 흠-

다락방 2012-10-05 17:52   좋아요 0 | URL
우앗, 저 악취를 빼놓고 읽은 것 같아요! 어떻게 건너뛴거지? 오늘 집에 가서 책을 다시 봐야겠어요. 바로 [줄]로 넘어갔는데..

유부만두 2012-10-05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하림은 그저...닭;;;;

다락방 2012-10-05 17:53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아까 제가 알고 있는 정보가 맞나 싶어서 검색창에 하림 쳤더니 닭이 먼저 뜨더라구요. ㅋㅋㅋㅋㅋ

가연 2012-10-0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극적인 재수생이네요. 근데 나이차가 쫌..ㅎㅎ 대학교 4학년과 재수생이면 한 4살 차이나지 않나요? 제 친구 중에 그 정도 나이차보다 조금 더 심했던가 덜했던가 어쨌든, 그렇게 사귀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여자애가 나이가 어린 쪽이에요. 그런데 풋풋하기는 한데 싸우기도 많이..ㅎㅎ 저야 그저 부럽.. 지만, 아아니, 그게 아니라 어쨌든 먼 훗날의 이야기보다는 사귈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구먼요

다락방 2012-10-06 12:23   좋아요 0 | URL
나이차는 세 살이었어요. 저는 스물셋 그 친구는 스물. 이건 뭐 나이차 나는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실제로 띠동갑으로 나이많은 남자를 만나보기도 했고 네 살 어린 남자를 만나보기도 했는데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이 생기는거지 나이는 크게 장애가 되거나 불편하진 않은것 같아요. 전 누굴 만나든 별로 싸우면서 사귀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자주 싸웠다는 친구는 다른 사람을 만나도 자주 싸울것 같은데요? 그건 나이들고 이별과 사랑을 반복하면서 점차로 나아지겠지만, 사람 성향문제인 것 같아요.

다 지나가버린 일이라거나 다가올 일들에 대한 얘기는 부담없이 할 수 있지만 진행중인 얘기는 좀 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건 엄청나게 (제 개인적으로는)오글거리는 일이에요. ㅎㅎㅎㅎㅎ

크크크 2013-06-13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이 노래 듣네여... 감사여...

제이제인 2015-01-2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저와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계시네요

물론 전 반대의 남자역할이였지만 ㅋ

하림을 좋아해서 틴휘슬이란 악기도 접해보고 ㅎㅎ 키 보다 큰 사랑에 푹빠져 살았던

그때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