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십년전쯤 데이트하던 남자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이 우리 둘이 어떻게 데이트를 하게 됐냐고 물었다. 나는 매일 보다보니 정이 들었는가 보다고 얘기했다. 우리는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남자는 이 여자가 자기를 너무 좋아하고 자기도 외로워서 몇 번 데이트를 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굳이 이제와 그걸 따질 필요는 없을것 같아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굉장히 형편없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뭐야, 이 남자 형편없잖아, 구리네. 왜 이렇게 허영과 허세에 쩔어있지? 역시 짧게 데이트만 하길 잘했어, 라고 생각했다.
이런 꿈을 꾼 건, 내가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인것 같았다. 몇 년전에 읽고는 책장에 꽂아둔 책이었는데, 마침 조카가 와서 내 책장에서 책을 몇 권 꺼내 방바닥에 흐트려 놓았고, 조카가 가고 난 뒤 그 책들을 정리하다가 충동적으로 이 책을 집어 들고 다시 읽게 된 것.
내가 데이트하는 남자, 나와 연애하는 남자,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형편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내가 그분위기 혹은 그 관계에 푹 빠져있을 때는 알 수가 없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아무리 나쁜말을 해봤자 나에게는 와서 닿질 않는다. 니가 그 남자를 잘 몰라서 그래, 그 남자는 니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그 남자는 나한테는 안그래.
아리안은 프레데릭이라는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다. 물론 프레데릭은 자신이 아내와 관계가 좋지 못하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는 그말만 믿고 그를 사랑하게 됐다. 아, 물론 그 말을 믿지 않았다한들 뭐가 별로 달라졌을것 같지도 않지만. 그런데 그녀에게 아르뚜아라는 스물 아홉살의 남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프레데릭이 얼마나 형편없는 남자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전화를 걸기 전에 먼저 내 말을 들으세요. 전화를 걸지 않으면, 그 남자의 마음속에 의혹의 씨를 심어주게 되어 아마도 그가 질투를 하게 될 겁니다. 그는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연히 편안하지 못한 밤을 보내게 되지요. 어쨌든 아내와 함께 있어도 즐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전화를 건다면, 당신이 그를 안심시킨다면, 그는 아무 걱정 없이, 딴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는 전화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는 기분이 좋아져서 안심하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아내와 즐거운 밤을 보내겠지요."(p.89)
프레데릭은 아내와 사이가 좋았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중요한건 그게 아니지만, 그녀는 그가 아내와 사이가 좋아보였다는 아르뚜아의 말을 듣고 아마 거기에는 무슨 사정이 있을거라고 프레데릭을 변호하고 싶어한다. 아르뚜아는 그는 아내를 안으면서 나의 누나에게도 추파를 던졌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듣고서도 그녀는 좀처럼 믿고 싶어하질 않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니까.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는 자연스레 프레데릭이 얼마나 형편없는 남자인지를 알게되고, 그녀가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도 알게된다. 그리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결말, 서른 여섯의 아리안은 스물 아홉의 아르뚜아와 사랑하게 된다. 나는 그녀가 자신과 그에게 자신의 나이를 상기시키는 부분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난 서른다섯이고 곧 서른여섯이 되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서른여섯 살이라는 게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그래서 그 나이는 나를 깔봐도 된다는 겁니까?"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적잖아요."
"난 스물아홉이에요. 당신보다 7년 아래니까 그리 대단한 나이차가 아니라는 걸 명심하시죠." (p.84)
나는 아르뚜아가 그녀에게 7년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대단한 나이차가 아니라고 말하는게 몹시 좋았는데, 웁스, 나는 아마도 아리안에게 또 감정이입을 했나보다. 나의 공감능력은 내가 가진 모든 능력중에 가장 뛰어난 능력이 아닐까 싶다. 참 쓸데없게 주연이나 조연에 너무 몰입해버린다니까. 그래서 아르뚜아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는 뒤로 넘어갈뻔 했다.
"당신은 서른 살로 보이니까 우리는 한 살 차이밖에는 안 나는 거에요. 한 살이에요! 이제 더 이상은 나이 얘기는 하지 않는 겁니다, 알았죠?" (p.85)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서른 살로 보이니까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니. 참으로 명쾌하고 유쾌한 논리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형편없는 남자라는 걸 인정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일이다. 그 당시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그 남자가 형편없는 남자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그런 사람을 사랑한 나 조차도 형편없게 되어버리고 마니까. 내가 사랑했던 남자를 싫어하거나 미워하게 되는것보다 더 슬픈건 형편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게 아닐까. 한 때 아리안은 프레데릭의 전화를 기다리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푹 빠져버렸었는데. 그러나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은 보이기 시작한다.
영원한 것은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그것은 진리다. 또한 언제까지고 빛나는 사람도 없다. 아주 오래 빛이 날거라고, 그 빛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상대에 대해서 나도 그 빛이 사라짐을 느꼈다. 많이 안타까웠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안되는 것들이 있는것, 그것도 진리다. 아리안은 아르뚜아와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우리 사이에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신경을 썼다. 타임전등이 꺼졌다. 우리는 갑자기 어둠 속에 잠겼다. 나는 본능적으로 빨리 계단을 뛰어올라가서 손을 내밀었다. 뜨겁고 힘있는 손바닥이 얼른 내 손을 감싸쥐었다. (p.86)
오래전에 김영하의 산문집 『포스트 잇』에서, 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김영하는 한 화가의 얘기를 하면서 '이제는 그가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다' 라고 했었다. 나도 오늘 아침 강변역을 지나는 지하철 안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한강을 보면서 누군가를 떠올리다 '이제는 그가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네' 라는 생각을 불쑥, 하게 됐다.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은 기분이다.
이 책도 좋지는 않다. 작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리나 싶기도 하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중심을 못잡는 것도 같고. 그런데 몇몇 부분들이 썩 마음에 들어서 좀 오래 가지고 있으면서 틈틈이 펼쳐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 책의 221페이지 소제목은 무려, '내 욕망에 대답하는 남자' 라니까. 내 욕망에 대답하는 남자라니, 근사하잖아? 욕망에 대답해야 그래도 대답이라도 대접받을 수 있지 않겠어? ( ") 게다가 그 남자가 글쎄 무려 일곱 살이나 어려. 쿨럭.
요즘엔 십 년전에 듣던 노래를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