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십대 중반에 사귀던 남자는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고 선을 봤던 여자에 대한 얘기를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그녀와의 만남은 몇 번에 그쳤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는데, 나는 쓸데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의 그 과거의 여자를 질투했다. 왜 나는 좀 더 일찍 그를 만나지 못했던걸까, 왜 그녀와 선을 보게 둔걸까, 하고. 그러나 이런 생각을 입밖으로 내는 것은 쉽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상대로 하여금 나는 집착에 쩔은 여자로 보일지도 모르고 스토커적으로 느껴질테니까.


내 안의 스토커적 기질에 대해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뿐 어느 한 대상에 대해서는 다들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아니 에르노가 애인의 동거녀에 대해 이름과 직업을 궁금해하고 하루종일 그녀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나 역시도 그런 궁금증을 가진바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나는 많은 비윤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느 연인들에 대해서는 헤어지기를 바랐고, 어느 연인들에 대해서는 그가 그녀에게 질려버리기를 바란적이 있다. 언젠가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고백을 한다고 했을때는 그가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기를 속으로 얼마나 기도했던지.


그러나 이런 마음이 들때마다 나는 나를 타이르기에 바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바란다니, 이건 너무 못됐잖아. 그만둬. 그런 마음을 없애. 그런 마음을 가진 나는 나쁜년이야, 하는 자책들을 동시에 수반하는 이런 감정들에 대해서,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니,



젠장, 왜 안된단 말인가. 그저 생각이고 그저 내 감정인데!


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만 그런게 아니니까, 다들 그러고 사니까.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무언가 행동으로 옮긴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그런 마음을 좀 품었다고 한들, 뭐, 굳이 고해성사까지 해야하는거야? 억지로 웃으면서 축하해, 라고 말하는게 더 나쁘잖아?



일전에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고 내가 불편했던 건 그녀가 '지나치게 솔직'하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도 지나치게 솔직하긴 마찬가지인데, 그러나 이제 불편함보다는 인정을 먼저 한다. 내가 불편했던 건, 내 안의 그런 마음을 자꾸 들여다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내 안의 그런 마음을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가 자꾸 건드리니까. 그러나 이제 다시 읽는 아니 에르노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내가 내 안에 이런 마음들과 이런 생각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내가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쿨한 척 하는 사람은 있지만 정말 쿨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사실 우리는 속으로 아주 많이 찌질한 인간들이 아닌가. 그것이 연애에 있어서는 극으로 치닫고.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집착도 어느 순간 끝났던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연애에 있어서 실패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의 연애가 끝장난다고 해서 나의 연애가 더 찬란히 빛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나는 이제 자책의 끝을 달릴때마다 아니 에르노를 찾을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는 때때로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당신한테 말 안 했던가?"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최근 자신의 생활에 일어났던 일을 주워섬기며 일과 관련된 소식을 알려왔다. 이 질문 아닌 질문에 내 표정은 곧 어두워졌다. 그가 그 여자에게는 이미 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곁에 있기 때문에, 평범한 것에서부터 중요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은 그 여자였다. 나는 늘 두번째로 -그것도 잘해야-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즉각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긴 상태였는데, 그것이야말로 연인 사이를 공고히 하고 지속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한테 말 안했던가?" 라는 말은 나를 가끔씩 만나는 친구나 친지 그룹으로 분류해넣었다. 이제 그는 매일매일 자신의 삶을 털어놓기 위하여 더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도, 나를 가장 먼저 찾지도 않았다. "내가 당신한테 말 안했던가?"라는 말은 가끔씩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의 역할임을 일깨웠다. "당신에게 말 안했던가?"는 곧 당신에게 그걸 말할 필요가 없었지라는 소리였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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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2-06-1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ㅠ_ㅠ 다락방님 덕분에 저를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나 좋을대로 해석 -_-;;;;;;)
맞아요. 왜 안 되는가 말입니다. 내 마음인데 내 멋대로 하겠어요!!!(라고 절규;;;;)

다락방 2012-06-18 17:31   좋아요 0 | URL
내 마음을 봐줄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는데 거기에다대고 자꾸만 못됐다 안된다 하는것도 참 못할짓인것 같아요. 제 마음인데 앞으로 제 멋대로 하겠어요! 흥!!

아무개 2012-06-18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찌질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건 정말 쉽지 않은거 같아요.

치맥을 포기하는 것 만큼 제겐 어려운 일입니다 ㅡ..ㅡ:::::::

날이 더우니 머리속엔 온통 치맥생각뿐~

다락방 2012-06-18 17:31   좋아요 0 | URL
저는 제가 찌질한 인간이란 걸 곧잘 인정하곤 하는데, 그만큼 또 제가 잘난 인간이라고 자뻑에 빠지기도 해요. 그래서 아마 보통의 인간인가 봅니다. ㅎㅎㅎㅎㅎ

전 배탈났어요, 마중물님. 설사 ㅜㅡ

아무개 2012-06-18 21:09   좋아요 0 | URL
설...........사..............는 좀 어케 진정이 되셨남요?

혼자 또 뭐 맛나는거 드신거죠? 그렇죠???

설마 치맥? @..@

다락방 2012-06-19 09:16   좋아요 0 | URL
마중물님 ㅠㅠ 진정이 안되어가지고 저 진짜 지금 죽을맛이에요. 밤새 잠도 못자고 오늘 출근에도 한시간 반이 걸렸어요. 지하철 역마다 내려서 쉬느라고. 아파요 ㅠㅠ

달사르 2012-06-1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질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쿨한 척하려니, 것도 고역..차라리 찌질한 본모습을 보이자! 싶다가도...
여전히 쿨한 척..ㅠ.ㅠ

아..나도 다락방님 따라 아니 에르노 책 읽어야겠어염!

다락방 2012-06-18 17:32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쿨한 사람은 세상에 없는것 같아요. 다만 쿨한척 하는 사람만이 있을뿐.

아니 에르노는 달사르님도 좋아하실거라 생각됩니다. 흣 :)

2012-06-18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9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2-06-19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를 읽으면?
자신의 내면속에 숨겨진 남에게 보이기 싫은 구석을 들여다 보게 되는군요.
음~
그러니 조금씩 땡기군요.
음~
나도 한 스토커 하는데..ㅋㅋ
나도 한 찌질녀 이기도 한데..ㅠ
그래서 슬픈 책(?)일 수도 있겠어요?ㅋ



다락방 2012-06-19 09:36   좋아요 0 | URL
누구에게나 스토커 기질과 찌질한 기질은 있지 않을까요? 다만 그것을 겉으로 얼마만큼 표현하느냐의 차이인것 같아요. 그걸 어느정도는 자제할 줄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못하는 순간 '스토커다', '찌질하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것 같아요.

네, 그래서 슬픈 책이죠. 또 그래서 무섭기도 한 책이구요. 아..너무나 솔직한 글이에요, 책나무님.

2012-06-19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0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2-06-1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책이 있었어요? 저 지금 <탐닉>이랑 <단순한 열정>이랑 이 책이랑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건지 헷갈려요. <탐닉> 읽고 느낀 거랑 지금 다락방님 느끼신 거랑 많이 겹쳐서 고개가 끄덕여져요. 아니 에르노 정말 설명하기 힘든 강점이 있는 작가 같아요. 저도 질투쟁이랍니다.^^;;

다락방 2012-06-20 13:22   좋아요 0 | URL
전 블랑카님 리뷰 보고 [탐닉] 읽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품절이더라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사서 읽게 된거에요. 역시 이 여자는 참 솔직해요. 지나치게 솔직해서 불편하다가 위로가 되다가 해요.

저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병적으로 질투가 심해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기억의집 2012-06-2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하다기보다 미리 포기하는 사람은 있는 것 같아요. 미련은 남으면서도 아니다 싶으면 거리를 두고 관계를 딱 자르는 사람이요. 그건 사람의 성향이라서요. 집착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다락방 2012-06-21 14:13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제가 그런 성향의 사람이에요. 전 미리부터 포기도 잘하고 관계 끊기도 잘하죠. 아니다 싶은데 계속 가서 뭐하나, 빨리 다른 사람 만나게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라서요. 이건 말씀하신대로 쿨하다기 보다는, 제 경우엔, 저 역시도 상처를 덜 받고 싶은 생각 때문인 것 같아요. 흐음.